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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우리는 건국신화로 단군왕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동시에, 단군왕검이 세웠다고 알려지는 고조선의 건국 시기(기원전 2333년)를 배운다. 교육 체계에서 이 둘을 다루는 진지함의 차이는 분명하여, 단군왕검이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나온 자식이며 이 환웅이 곰과 호랑이 사이에 벌이는 일에 대한 설명은 당시 복속시킨 부족들의 애니미즘적 숭배 대상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되고, 사실 그나마도 그리 진지하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반면, 조금 더 머리가 굵어진 상태로 수업을 듣고 있으면 기실 이 기원전 2333년이라는 시기조차 어떤 의미에서 그 환웅에 대한 신화와 크게 차이 없는 신뢰도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지만, 그 저자인 일연조차 이 시기를 가리키는 설화의 신뢰도를 의심하며, 더 정확한 추산으로는 그보다는 좀 더 이후에 등장했으리라는 부연 설명이 붙는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문제는 일연이 그 설화를 어째서 기재하였느냐에 있다. 더 정확하게는 이러한 설화와 신화에 대한 수용이 역사학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이뤄졌느냐에 있기도 하다. 구체적으로는, 어째서 단군왕검이 환웅의 자식이라는 것에 대한 것을 역사에서 배제하고, 단군왕검이라는 사람의 실존 자체는 역사 속에 그대로 남겨두느냐에 대해서다. <그리스인들은>에서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키케로다. 키케로는 로물루스나 아우구스투스의 탄생 설화 및 신과의 혈통을 비웃지만, 로물루스나 아우구스투스라는 실존 인물이 있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신화가 섞이지 않은, 우리 시대 기준으로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생각될 역사적 기술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키케로의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신화적 역사가 걸러졌음을 의미하며, 그 당시 사람들에게 신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예화한다.



현대에는 거의 실전되어버린 풍습에 가까울 계보적인 권위가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누구의 자식이며 누구의 후손으로서 그 선조들로부터 어떤 위광이나 덕성을 이어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에게도 냉소를 던진다. 그러나 이렇게 된 시기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으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이 계보는 한 도시의 왕 뿐 아니라 그 도시 자체와 이어져 있으며, 도시의 시민은 자신이, 현실적으로는 그리 큰 권력도 영향력도 없는 한낯 시민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그 계보적 헌사에서 힘을 받는다. (어쩌면 이러한 국가적 계보와 거기에서 오는 위안은 여전히 몇몇 '선진국'들에는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특히 자기들이 이 현대국가의 전범이 될 제도를 만들어냈다는 정치적 계보에서.) 이 헌사는 일반적인 정치적 갈등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되, 서로의 존망을 걸 정도로 극적인 갈등 상황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기만인가? 그렇지는 않다. 당시에는 신적인 것에 대한 이중적인 믿음이, 신적인 것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을 포함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바흐찐이 중세의 카니발적 면모를 드러내는 라블레의 글에 대해 논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 있을지도 모른다. 엄숙한 것의 대척자로서 이것을 희화화하는 카니발과 풍자적인 글들이, 자신을 풍자 대상에서 떨어뜨리는 근대의 풍자와는 달리 그것을 정말로 비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기보다는 이 희화화하는 주체 자체도 그 웃음 속에 포함시키는, 말 그대로 그저 대척자로서의 웃음. 덕분에 폴 벤느는 <그리스인들은>에서 신화와 설화를 역사로서 기술하는 이들을 설명함에 있어 몇 번이고, 이것이 고대에 선취된 이성적 비판의 예시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정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근대적인 현상일 뿐이다. 신화 비판은 그보다는 좀 더 소극적인 자세에서, 지금 볼 수 없는 것은 과거에도 볼 수 없었으리라는 태도와, 그러한 것들을 포함하는 신화가 어떤 진실을 가리고 있을 뿐이라는 태도로 이뤄진다. 미노타우로스를 미노스 왕의 흉포한 장군 타우로스로 해석하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이야기는 그 예시다. 이를 어떤 문화적 흐름, 또는 고대의 진리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도 한 예시면서, 타우로스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 것 또한 그 예시다. 만약 이것이 현대의 해석이었다면 타우로스 역시 부정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푸코를 읽은 사람은 예상했겠지만, <그리스인들은>이 전제하는 이러한 역사 맥락적인 해석은 매우 푸코적이다. 폴 벤느가 우리에게 그리스인들이 신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이해해보도록 권유하는 것은 근대의 에피스테메 속에선 결코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없는 사유를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이따금 이것이 네이글의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처럼 과거를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무언가로 우리로부터 격리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따금 이런 식의 굴곡을 만날 때마다 즐거이 우리와 그들 사이의 차이를 생각해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