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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절판되어 중고로나 겨우 구했던 책이 훨씬 나은 품질로 재발매되어 이를 처음 읽었을 때 했던 생각 중 구체화하여 정리합니다. 다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과열될 경우 자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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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이 68운동-신좌파와 환경운동, 그리고 그 실패에 대한 책이라는 걸 밝힌다. 오에 겐자부로는 그 대표작 <만엔 원년의 풋볼>에서 드러나듯 2차대전까지 유지되던 어떤 역사적인 의미가 담긴 전체주의, 혹은 그런 운동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는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게도 환경에 대한 애호 및 환경 보전을 위한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환경 운동이 그렇듯 이는 실패하거나 관심을 받지 않고, <홍수>에서는 학생들의 정치 운동과 그것이 묘하게 섞여서 제시되며 신좌파의 실패와 환경운동의 실패가 어우러져 이것에 무관심한 세계를 규탄하는 주인공과 그의 자폐적인 고통이 글의 핵심적인 모티브로 나온다. 책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잠시 접어두고, 왜 이 책이 지금 유의미한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자.



류이치 사카모토는 한국에서 인기가 매우 많은 사람 중 하나다. 죽은지 조금 된 지금, 최후의 회고록이 한국에 출판되어 상당한 판매고를 올리고 있고, 그 전에도 음악적으로 인기가 많았던 이 사람은,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본토에서는 상당히 인식이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이유로 반원전 운동의 기수 역할을 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및 반원전 운동으로 인하여 원전을 다수 축소하였고 이는 전체적인 전력 공급망의 재조정으로 이어졌다. 2022년 지진으로 인해 화력 발전소 다수의 가동을 중단하자 그 문제는 훨씬 심각해졌고, 전력 부족으로 인한 고질적인 정전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상황에서 여전히 반원전을 주장하는 유명 인사가 좋게 보일리가 없다. 



아마 한국에서도 뜨거운 감자로 이어지는 이 주제의 문제는, 사실 틀린 말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한국에서라면 기우라고 넘길 수도 있겠다만 일본에서는 실제로 참사가 벌어졌고, 일본의 수많은 공적인 매체들이 어쨌든, 그래도 정부 지침을 거스르지는 않는 선에서, 최대의 우려를 표했고, 잡지나 인터넷 같은 일반 매체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우려 속에서 최대한 조정을 한 결과가 이 전력 위기이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공급 문제로 그 위험은 오히려 커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환경 운동의 성공 예시 중 하나였을 일본의 탈원전 정책이 예상도 못한 정반대 문제를 드러내며 터졌으니, 시민들이 류이치 사카모토를 규탄하며 할 말도 참 애매했을 것이 분명하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와는 달리 여기에는 딱히 '잘못'이라고 할 건 없다. 책임의 주체만 몇몇 있을 뿐. 이것은 환경 문제가 부딪히는 문제 중 하나에 불과하다.



최근 읽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평평한 지구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재로 기후 변화 부정론자들을 규탄하려고 하는데, 책 전체에서는 그 규탄의 활력이 점차 빠져만 간다. 이유인 즉슥, 그보다 훨씬 더 즉각적이면서 크나큰 피해를 주는 코로나 사태 속에서 자신의 예상이 정반대가 되는 걸 목격한 탓이다. 예로부터 사회 운동가, 예술가, 환경 운동가, 어느 쪽이든 사람들을 변화시키려 하는 사람들의 신조는 어느 정도는 비슷했다. 냉담한 이들에게 충격을 줘서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줘라, 그러면 변할 것이다! 코로나는 그 예시로, 아무리 코로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실제로 코로나에 걸린 다른 사람들을 보거나, 민감하게 코로나 환자들을 격리하고 치료하는 모습을 보면 변할 수밖에 없을 테다.



허나 미국에서의 코로나 사태는 딱히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흘러갔다. 원래부터 코로나를 위기로 이해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더 과민하게 반응하는 반면, 그렇지 않던 사람들에게 코로나에 대응하는 문제 뿐 아니라 코로나가 존재하느냐, 라는 질문조차 매우 정치적인 의제가 되었고, 실제로 그 어느 국가들보다도 파멸적인 피해를 입는 상황 속에서도 이 대립되는 이해관계는 결국 조정되지 않은 채 사태가 끝나버렸다. 덕분에 저자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하여 그들을 바꾸는 법'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내려가다가, 오히려, 결코 그럴 수 없으리라는 충격을 받고 흐지부지, 투표로 이들을...... 바꾸기보다는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주장으로 책을 마무리짓는다. 이것은 환경 및 기후 변화 문제가 슬슬 우리에게 피부에 와닿고 있음에도 그 주장들이 딱히 힘을 얻지는 않으리라는 또 다른 문제다.



덕분에 환경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실천적인 차원에서도, 이론적인 차원에서도 자주 겉돌곤 하는데, 묵시론적인 접근으로도, 현실적인 접근으로도 이를 해결할 수 없겠다는 예감이 들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기후 카지노>와 같은 책에서는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접근으로, 국제 사회와 국내 정치에서 이 문제를 조율할 수 있는 경제적이고 행정적인 접근법을 제안하지만 이것이 과연 문제를 얼마나 해결하거나 늦출 수 있는가는 둘째치더라도, 실제로 받아들여지느냐부터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홍수>는 바로 이 두 가지 측면에서의 실패를 사실상 체화하고 있는 듯한 책이다. <홍수>의 패배주의는, 사실 당시에는 너무 이르고 그저 패배를 위한 패배로만 보일 정도로 자폐적이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2023년, 지금 이 책을 보면 <홍수>에서 말하는 세계의 냉담함,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 그리고 젊은이들이 자신을 재앙의 원인으로 몰려 린치당한 조선인들과 동일시하는 이유를 좀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무엇이 악하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홍수>를 다시 읽어보고 싶지만, 참 우울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