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24b0d121e09c28a8699fe8b115ef0464df8ee3c1



전기가오리라고 하는 구독제 철학 잡지(?) 서비스에서 나온 책이고, 비매품이며, 덕분에 구하는 데에 조금 애를 먹었다. 그럼 왜 굳이 이런 책을 읽게 됐느냐? 약간의 사정이 있다. 일전에 롤스의 <정의론>을 한 번 읽어보려다가 생각 이상으로 맞지 않았는데, 1장에서 전제하며 시작하는 원초적 입장과 무지의 베일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허술하다고 느껴졌던 탓이다. 구체적으로는 이런 흐름이었는데, 1) 롤스는 공리주의를 비롯한 다른 사회 규칙들과 비교하여 자신이 제시하는 정의의 원칙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이고자 하며, 2) 이를 보이기 위해 해당 규칙들이 비교 대상에 오르는 것은 원초적 입장에 선 무지의 베일 아래의 개인들의 선택이되, 3) 이 개인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거나 처할지를 알지 못하며 그 제한된 지식은 자신들이 지금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정도에 한한다, 정도로 이해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이 3)이라는 것이 정말 중립적인 전제일까? 그 개인들과 개인들의 “이해”는 매우 시대/지역 국한적인 개념이며, 기실 3)의 순간 이미 여러 전제에서 어느 정도 예상되는 결과를 낼 배심원단을 고르는 것과 비슷한 효과가 나리라 생각했다. 이 중립적인 무지는 이해를 할 수 없거나, 어떤 경향성에 쏠리는 이해를 하는 사람들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전제가 되는 원칙들을 수용하기 힘들다고 판단하니, 당연히 그 다음으로 이를 바탕으로 분배나 여러 사회 제도에 대한 논증을 이어가는 내용을 굳이 읽을 필요는 없는 듯했다. 찾아보니 비슷한 비판을 하는 글들이 이미 꽤나 있어 (특히, 원초적 입장으로서 호명되는 군중이 과연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사람을 포함할 수 있는가? 라는 지적이 인상적이었다) <정의론>에 대한 기대를 버리며 다른 책을 보려다가, 바로 이 지점에 대해 리처드 로티의 <철학에 대한 민주주의의 우선성>을 읽어보기를 권유받았다.


이 감상을 쓰고 있는 건 <철학에>가 인상적이었던 탓이다. (일례로, 롤스의 <정의론> 감상도, 예전에 읽다만 노직의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감상도 딱히 적지 않았다.) <정의론>을 읽으며 느꼈던 부족함이나 애매함, 그리고 뭐라 표현하기는 힘들었던 불편함이 짧은 글에 축약되어 있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롤스는 <정의론>에서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시대와 문화 국한적인 시각, 정당화될 수 있는 이 개인이라는 주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논쟁, 그리고 여타 기반적인 철학적 정당화에 대해, 가볍게 묵살한다. 또는, 그것들을 종교와 비슷한 수준에서 사적인 문제로 만든다. <정의론>은 결코 지금의 체제가 가능한 수많은 체제들 중 최선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택할 수 있는 체제들 중 현재의 체제가 최선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는 실제 현실을 반영하는 판단이다.


로티는 토마스 제퍼슨이 미국 건국 시 종교적인 문제를 “신경 쓰지 않는” 의미에서의 종교적 관용을 국가의 기초로 잡고자 함을 언급하며 글을 시작한다. 이것은 그러한 태도가 어떤 신학적 의미나 자세를 함의하든,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의 체제에 영향을 주지는 않도록 하겠다는 절단이다. 현대 자유민주주의는 종교를 이런 식으로 처리하도록 노력한다. 종교는 전체적인 의미에서 탄압되지는 않지만, 종교가 사적인 영역을 벗어나 공적인 영역에서 사회적 제도와 충돌하는 순간, 언제나 사회적 제도가 이기게끔 한다. 물론, 이것은 그 개개인이 전부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행동을 하도록 담보하지도 않고,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마찬가지로 니체나 로욜라와 같은 이들이 자유민주주의가 전제하는 개개인의 한계를 벗어나는 사회적 전제를 주장할 때, 그들은, 다른 영역에서는 다른 불이익이 가해지지는 않겠지만, 정치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미친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롤스는 그저 너무나 보수적인 전제를 깔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정식화는 지금 이 순간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이 모든 것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지금의 제도가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부디 선을 넘어 이 제도를 파괴하지 말고,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상황들이 무엇이 있는지를 규명해 최대한 방지하자. 이러한 접근에서는 개인이라는 주체와 인권이라는 개념 등이 별로 의미가 없다. 저 개인이 어떤 역사적인 전제를 담고 있는지, 인권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고 왜 보존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식화는, 만약 그런 것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반박이 이 정치 제도에 거슬러 올라와 영향을 끼치지는 못할 테다. 더 이상 그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되도록 사회를 만들겠다. 


그렇게 니체와 로욜라는 융단 밑으로 슥, 밀어넣어진다. 우리는 딱히 지금의 제도가 다른 모든 제도들의 위협 앞에서 영원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것은 계몽주의적인 전제-이성적인 주체들이 토의하다보면 도달할 하나의 진리로서-이고, <정의론>은 사실 그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제목 <철학에 대한 민주주의의 우선성>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민주주의는 아도르노가 지적한 것처럼 철학적 정당화를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로티는 롤스가 전제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전제하면 좋을 듯한 하나의 도식을 제공한다. 합리적 행위자들의 집단이 아닌, 서로 다른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이들의 막연한 그물로서의 사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들이 최소한으로 공유할 수 있는 전제 뿐이다. 그리고 <정의론>은 딱 그 정도 선에서 존재한다.


로티를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생각 이상으로 매력적인 저술이라 그의 다른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상당히, 매력적으로 뻔뻔한 미국식 사고관이다. (많은 미국인들은 자기들이 뻔뻔하다는 걸 인지하지도 않고, 인지할 생각도 없이 뻔뻔한 것 같다.) 하지만 역시 Carl Schmitt의 저서를 읽는 게 먼저겠거니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