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장 마지막엔 마침표를 찍어야한다.
내가 그 간단한 법칙을 처음 배운 건 안정효 선생님의 "글쓰기 만보"에서였다. 안정효 선생님께선 문단 구성과 문장, 쌍따옴표의 사용법따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방법을 적어두셨는데, 처음 읽었을 땐 그 세세함이 되려 내 심기를 건드렸던 것 같다. 왜 그렇게 써야되는데. 사춘기 아이처럼, 부러 문단과 문장을 구분하지 않는 이상한 글로 난 처음 펜을 집어들었다
안정효는 23년 7월 1일에 죽었다.
매카시가 죽은지 2주가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쿤데라는 안정효가 죽은지 딱 한 주 뒤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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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매카시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당신을 싫어한다. 표현과 미학에 집착하는 한편, 서사의 깊이감은 모자라다. 사고가 유치하고, 관념적이다. 너는 (자신들은 결코 그리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잘 팔리는 대중 작가에 다름 아니다. 그런 식으로 썼었나. 당연히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대회에 참가하기로 마음 먹은 건, 매카시는 그렇게 읽을만한 작가가 아니라 말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4대 작가니, 서부극을 문학의 경지에 올렸느니 - 아니, 솔직히 매카시는 그냥 장르 작가에 불과하다, 그렇게 잘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내 비위를 거슬렀을까. 내 독후감은 그 지점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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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시의 작품은 단순한 서부극이 아니다. 그보단 부조리극의 문법에 가깝다.
더 로드와 핏빛 자오선은 매카시의 대표작들이다. 두 작품 모두, 배경 설명엔 어떤 부분도 할애하지 않는다. 더 로드는 이미 멸망한 후의 세계를 그리는 데, 어째서 이 상황에 이르렀는지 아무런 설명도 주어지지 않는다. 주인공 소년과 아버지는 부조리한 상황에 적응해나갈 뿐이다. 핏빛 자오선도 부조리하긴 마찬가지다. 주인공의 내력을 길게 설명하는 여타 소설들과는 다르게, 핏빛 자오선에서 내력은 다 잘려나간다. 주인공 소년은 이유도 모른 채 인디언 사냥꾼 틈에 낀다. 이렇듯 설명되지 않는 부조리함은 매카시 작품의 공통된 특징이다.
매카시의 독특한 문체가 이런 서사의 효과를 극적으로 살려준다. 매카시 소설에 구두점은 등장하지 않는다. 구두점은 다른 언어로부터 대사를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구두점이 없어지면, 자연히 대사와 독백, 묘사 간의 구분이 없어지고, 이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부조리한 상황을 극대화한다.
묘사도 마찬가지다. 작중 묘사는 1인칭인듯, 3인칭인듯 묘한 인상을 주어 작가조차 이야기의 진행을 모르는 듯 시치미를 뗀다. 핏빛 자오선과 더 로드에서 주인공의 이름은 숨겨져 있는데 이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작품의 부조리함에 한층 몰입하게 만든다.
매카시는 서부극에 부조리극의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완성했다. 시적인 문체, 장황한 묘사, 그리고 독특한 배경 설정이 작가로서의 특색에 한 몫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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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매카시를 싫어한다.
작품의 좋고 나쁨과 별개다. 매카시의 작품 세계엔 시대-착오적인 무언가가 남아있다. 하지만 작가 자신은 그 시대-착오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탓에 작품 뒤엔 역겨운 냄새가 떠다닌다. 이를테면 명동 거리 어느 구석에 철거되지 않고 남은 임시 화장실처럼. 꼭 자기가 그곳에 서 있는게 당연하다는듯이 굴지만, 어울리지 않는 배경에 나는 다만 코를 감싸쥘 따름이다.
어째서 매카시는 서부극에 부조리극의 문법을 도입했는가.
부조리는 인간 실존의 근원이다. 이 얘기를 한 게 카뮈였는지 사르트르였는지, 나는 이제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하는 극단적 부조리를 통해, 매카시는 인간을 말한다. 인생은 늘 돌연한 선택의 연속이다.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택들이 사람을 만든다고 실존주의자들은 말한다. 매카의 작품 세계도 이 선상에 있다. 소설적 사건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 작가는 인물들에게 끊임없이 물어본다.
더 로드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생존을 위할지, 생활을 위할지 끊임없이 도전받는다. 일련의 선택이 소년과 아버지의 여행이라는 이야기로 완성된다. 한편, 핏빛 자오선에서 선택의 문제는 좀더 주목받는다. 더 로드와는 달리 '홀든 판사'라는 일종의 초인을 투입함으로써, 어떤 선택도 결정적이지 않음을 증명한다. 주인공 소년이 결국 홀든의 손에 죽는 건, 어쩌면 그 모든 선택이 거시적인 시선에선 무게가 없다 말하는지 모르겠다.
실존과 구원, 부조리와 선택 - 이런 주제들에 대한 매카시의 열정. 하지만 실존은 이제 철지난 유행에 불과하다.
영혼과 의식, 구도와 구원 - 이 헤묵은 주제들. 답은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그럴듯한 기술로 포장하는 싸구려 신비주의. 19세기 낭만 시대에나 볼 수 있던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난 매카시에게서 읽어낸다. 도스토예프스키나 앨런 포의 시대였더라면 모르겠지만, LLM이 등장하고, 더이상 언어와 심리가 신비하지 않은 시대에 매카시는 결국 감정 포르노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매카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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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였을까. 간만에 다시 펴본 매카시에게선 어딘지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홀든 판사와 소년의 이야기를 아주 오랫동안 몰입해서 들여다볼 수밖엔 없었다. 그건 어쩌면 이제 매카시의 이야기에도 돌이킬 수 없는 마침표가 찍혔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히 추측해본다. 한평생 하나의 주제로 글을 쓴 작가의 마지막에서 오는 몰입감. 전세기 작가들이 그토록 열심히 좇았던 '인간의 실존'이란 허상을, 나도 한 번 좇아보고 싶게끔 만드는 그런 열정.
모든 글엔 마침표가 찍힌다. 23년 밤하늘에 유독 많이 찍히는 마침표들을 바라보며 새삼 되새긴다. 20세기의 소설이 끝나가고 있다. 이어질 문장들이 이전의 문장들보다 아름답길 나는 다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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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소년이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지나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저 지나쳐가는 것이기 때문에.
치태식이!! 드디어 뛰었구나!!
잘 읽었습니다
사람 새끼들 다 느끼는게 비슷비슷하긴 한가보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