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자오선과 로드의 비교
코맥 메카시의 두 작품은 공통점이 많은 작품이다.
1.둘 다 소년이 중심이 된다.
2.그 소년의 이름을 모른다.
3.소년이 무언가를 상징한다.
4.그 소년이 여러 곳을 방랑한다.
5.여러 일을 겪고서도 소년은 똑같이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내 눈에 띄는 차이점은 아버지다.
핏빛 자오선의 주인공 아버지는 학교 교사다. 주인공이 태어나는 날 사자자리인지 북두칠성인지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별이 쏟아졌다(한국 고전이었다면 비범한 인물 증거라 해석 ㅎ)고 말하고 퇴장한다.
학교 교사라 하지만 하급 노동자와 구분도 안 가며 잊힌 시인의 시를 읊으며 다니는 보잘 것 없지만 낭만 있는 인간.
그러나 이 사람은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존재하지 않음으로서의 역할이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아이의 안에는 이미 이유 없는 폭력이 스멀스멀 싹트고 있다. 모든 역사는 그렇게 흘러간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지 않는가. 열네 살에 아이는 가출한다.’
아무튼 주인공의 집이 별로 좋지 못했던 것 같다. 부모인 아버지가 제대로 케어를 안 해줘서 애가 험한 환경으로 떠나간다.
그 후 소년은 인디언들을 학살하는 용병으로 들어가게된다.
반면 더 로드의 주인공은 비록 세상이 멸망했더라도 사랑해주는 아버지가 있다.
더블 주인공 체제. 아버지에게 소년은 신의 말씀이며 불씨, 희망이다.
핏빛 자오선의 소년은 황폐하고 폭력에 무덤덤한 성격이지만
더 로드의 소년은 순수하고 다정하다.
이게 다 아버지가 다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핏빛 자오선은 아버지의 손에서 탈출한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다면
더 로드는 아버지의 품에서 부화하고 성인이 되가는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그런데 더 로드에서 소년이 신의 말씀, 희망이라면 핏빛 자오선의 소년은 뭐란 말인가?
내 짧은 소견으로는 핏빛 자오선의 소년은 목격자다.
소년은 명확한 목적의식 없이 그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용병으로 들어갔고, 여기저기 휩쓸려다니다 판사 일행에 합류했을 뿐이다.
소년은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도덕판단도 없이 그저 총을 쏴야 할 상황이 됐으니 총을 쏘고 도망쳐야 할 상황이니 도망친다.
그런데 남들과 차별되는 부분이 있다.
함께 일하던 동료가 부상을 입어 죽어가니 남들이 외면해도 자신은 구해준 것,
판사 일행이 전멸하자 손을 씻고 평생 후회하는 마음으로 살아간 것.
그런데도 절대악으로서의 판사에게 소년은 반감을 느끼더라도 무엇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악의 생산은 무한히 반복된다.
핏빛 자오선의 엔딩은 난해한 문장이라 어려운데 이미지로 생각해보면 장난감 병정이 원형으로 둘러서서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아닌가?
결국 소년은 죄책감을 느끼더라도 판사의 거악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판사와의 대결이 이루어지지 않고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 시간의 흐름이 판사와의 대결이다.
소년의 순수함과 정의심은 아주 미약하고 현실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으며 시간이 갈수록 약해지는 반면
행동하는 거악인 판사는 여전히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여러 사람을 매혹시킨다.
결국 목격자는 어디까지나 목격자일 뿐이었다.
이제 더 로드의 소년=신의 말씀. 핏빛 자오선의 소년=목격자 로 정립했다.
그런데 아버지와 관련된 재미있는 퍼즐이 있다.
핏빛 자오선의 챕터 11 부분에 판사가 묘한 말을 한다.
몇 해 전 앨러게니 산맥 서쪽 미개척지에 어떤 사내가 마구 가게를 운영했다.
그런데 그 지역을 지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래서 사내는 인디언 복장을 하고 가게 근처에서 구걸을 했다.
그런데 지나던 사람이 마구업자가 백인인걸 안다고 했다.
마구업자는 그 사람을 집으로 초대했다.
아내가 그 사람을 잘 대접하자 사내는 가난한 살림을 보고 큰 가치를 지닌 동전 두 개를 기부한다.
마구업자는 욕심이 나서 자기 아내에게 줄 동전이 없느냐고 묻는다.
사내는 그 마구업자에게 수치를 알라고 한다.
'그 설교에는 마구업자가 한때는 알았으나 이제는 잊고 만 것들이 담겨 있었고, 또한 처음 듣는 말들도 있었지.'
그 때 인디언이 자기 동족의 시신을 싣고 간다.
그 야만인조차 미덕이 있다.
사내는 그 야만인도 우리보다 못할것이 없다고 한다.
마구업자의 아들은 그 인디언 자신을 위한 길이라고 한다.
마구업자는 사내를 바래다준다.
마구업자는 그 와중 사내를 죽이고 뒤처리를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부인은 평생 진심으로 그 사내를 애도한다.
마구업자는 다시는 누구도 해치지 않으며 늙었다.
죽기 전 아들에게 그 얘기를 고백한다. (고해성사)
아들은 자기에게 자격이 있다면 아버지를 용서하겠다고 한다.
마구업자는 자격이 있다고 단언한다.
아들은 사실 전혀 유감스럽지 않았다.
그 죽은 사내를 질투했기 때문이다.
그 사내의 무덤을 헤집어놓고 서쪽으로 가 살인자가 된다.
마구업자의 아내는 야생동물의 짓이라 여기고 무덤을 복원한 후 예전처럼 꽃을 바치며 애도한다.
여인이 할머니가 된 후 그 무덤을 자기 아들의 무덤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죽은 사내의 새색시가 있었다.
새색시는 아이를 배고 있었는데 그 젊은이의 아들이었다.
아이에게 아버지는 모호한 역사가 됐고 아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아들은 완벽한 아버지를 물려받았다.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실이었다.
모호한 얘기고 모호한 퍼즐이다.
나는 아버지와 아들을 중심으로 이 퍼즐을 풀고싶다.
유사성으로 맞춰보겠다.
주인공 아버지-한 때 교사였고 잊힌 시인의 시를 외고 다님.
보잘것 없음. 아이를 가르치지 않음. 무능.
마구업자-뻔뻔함. 예전에 미덕을 알았으나 모르게 됐음. 무능.
사내-미덕을 가짐. 돈을 가짐. 인디언의 미덕을 보고 자신과 다르지 않다고 함. 마구업자에게 살해당함.
사내의 아들-존재하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오히려 완전한 아버지를 상상하게 됨.
소년-열악한 집을 떠나 살인자가 됨.
마구업자 아들-얘기를 듣고 서쪽으로 떠나 살인자가 됨. 살인자라는 점에서 마구업자와 같아짐.
사내를 질투함(어떤 면에서일까?) 그래서 사내의 무덤을 헤집음.
질투하면 닮으려고 하기 마련. 그런데 사내의 미덕과는 다른 길을 감.
사내의 무덤을 헤집은 것도 그 사내처럼 되지 못하기 때문에 무덤을 헤집었을 것이다.
정말 사내처럼 되고자 했다면 오히려 무덤에 애도를 했을 것이다.
그 사내의 미덕에 질투를 했을까?
그 사내의 부에 질투를 했을까?
결과를 보면 아마 부에 질투를 한 것 같다.
아버지가 가르친다는 속성을 생각하면 사내는 마구업자 아들의 새 아버지나 마찬가지다.
아들은 아버지의 나쁜 부분을 배웠다.
이 가설은 이후 얘기에서 보완된다.
아들이 사내의 무덤을 팜(아들의 이상 파괴)
엄마가 그 무덤을 복원시킴 그리고 그게 자기 아들의 무덤(자기 이상으로서의 아들 사망)
죽은 사내의 새색시가 아이를 배고 있음(아들의 윤회)
죽은 아버지의 존재를 물려받음(완벽한 아버지)
여전히 모호하니 일단 일대일 대응을 해보자
소년-마구업자 아들(살인자, 방랑)
아버지-마구업자(무능. 미덕을 잊음)
사내의 아들은 맞출 상대가 없다.
사내도 마찬가지..
다시 생각해보자
사내-미덕을 가짐. 돈을 가짐. 인디언의 미덕을 보고 자신들과 다르지 않다고 함. 마구업자에게 살해당함.
사내의 아들-존재하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오히려 완전한 아버지를 상상하게 됨. 일화가 없음.
한쪽은 죽어서 환상을 남기고 한쪽은 환상때문에 나쁜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분명 소년은 아버지가 있고 결점을 보고 자랐다.
아버지의 완벽함에 짓눌리려해도 짓눌릴 수 없다.
그야말로 다른 아버지가 있지 않는한..
자, 알겠나??????
다른 아버지다. 다른 아버지.
아직도 모르겠나?
아버지라니까??
하나님 아버지! 그런데 작 중 하나님은 항상 무능하다!
그런데 교리상 하나님은 완전무결하다!
완전무결한 아버지의 부재!
하나님의 부재!
미덕 있는 사내!
미덕을 버린 아들!
아들이 스스로 미덕을 버렸기 때문에 아들은 고통을 받게 된거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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