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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필력이 수준급이어서 술술 잘넘어가는 편임. 그 자리에서 단숨에 끝까지 읽었다. 논픽션답지않게 강력한 반전을 심어둬서 그 부분부터는 빨려들어간 듯이 읽음.

책의 주제는 "혼돈"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인데 여기서 혼돈은 불행으로도 볼 수 있고 통제불가한 세상사로도 볼 수 있음. 저자는 여자랑 원나잇하다가 남편한테 이혼당하고나서 히키상태에 빠졌는데, 재활을 위해 할 수 있는걸찾다가 데이비드 조던이라는 학자를 발견함.

조던은 어류 표본을 채집해서 유리병에 보관하고 학명을 붙이는 어류학자인데, 인류가 발견한 전체 어류의 1/5을 명명했다고 평가될 정도로 대단한 인간임. 저자는 여기서 조던을 통제불가능하고 날것 그대로의 자연(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소명의식에 가득찬 인간으로 묘사함.

그런 인간이 어느날 지진으로 자기가 보관하던 표본의 대다수를 파괴당함. 하지만 이런 거대한 혼돈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망하지 않고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표본을 다시 만들어냄. 저자는 무자비한 혼돈에도 불구하고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조던에게 이끌림. 조던은 아내, 자녀, 제자를 잃어버리는 불행도 겪지만 끝내 이겨내고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을 멈추지않음.

하지만 자연에 질서를 세우려는 열망이 지나친나머지 조던은 우생학자로 굴러떨어짐. 작가는 그가 우생학에 심취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스승인 아가시에게 있다고 봄. 아가시는 어류와 같은 열등한 종과 인간이라는 고귀한 종 사이에 위계의 사다리가 있다고 믿었음. 그런 사다리는 고귀한 종이 타락하면 열등한 종으로 후퇴할 수 있다는 도덕적 경고-또는 신의 섭리-를 드러낸다고 주장하였음. 이런 위계의 사다리를 제자인 조던은 인간에게 적용한 것임.

결국 조던은 만년을 우생학자로서 전념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함. 저자는 혼돈을 극복할 방법으로 질서를 부여하는 조던에게 이끌렸지만 사악한 우생학자의 얼굴을 마주하게되었고 그를 거부하게 됨. 질서는 혼돈과 다른 방향에서 폭력을 불렀음.

그런데 뜻밖의 사실이 저자를 사로잡음. 현대 분류학에서 어류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임. 어류라는 구획은 대단히 자의적이고, 어류라고 불리는 몇몇 종은 오히려 소와 같은 포유류와 훨씬 근친적이라는 게 증명됨. 조던은 어류학자로서 어류를 분류하며 평생을 바쳤지만 사실 어류(물고기)는 존재하지 않았음. 그가 견고하게 조직한 질서의 사다리는 다시 혼돈 속으로 돌아간거임.

하지만 이런 혼돈이 꼭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음. 무질서의 혼돈은 오히려 질서가 놓친 것을 보게 만듦. 저자는 자기가 남자 파트너를 원한다는 강박을 가졌지만 여자 파트너도 좋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실의에서 벗어남. 인간은 광활한 우주의 미물에 불과하고, 우주적 관점에선 삶의 의미조차 찾을수없는 혼돈에 던져진 존재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음. 그런 관점에서 벗어나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가 되면 됨. 때로는 굳은 질서에서 벗어나 혼돈을 받아들일 때 더 나은 삶의 길이 열린다고 저자는 역설하며 책은 끝을 맺음.

개인적으로는 조던의 이야기와 저자의 깨달음(사실은 여자 파트너를 원한다는 것) 사이의 연결이 약하다고 느낌. 하지만 그 외의 부분은 설득력있었음. 조던의 과학사적인 이야기와 질서-혼돈이라는 철학적 텍스트를 교직해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인상적임. 일독을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