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가 없으면 그들은 영원히 먹을 것을 얻을 수 없단 말이다! 그들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한 어떤 과학도 그들에게 빵을 줄 순 없는 거야!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그들도 자기의 자유를 우리의 발 밑에 갖다 바치고, <우리를 노예로 삼아도 좋으니 제발 먹을 것을 주십시오> 하고 단원할 게 틀림없어.”

-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우리는 죽을 수 없어 살아가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죽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연명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라, 죽음을 고의로 선택하려 몸부림치지 않는 이상 어떻게든 살아가게끔 삶을 유지시키는 하나의 거대한 제도 속에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응급실로 실려가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 죽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농담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이 현대 사회가 실제로 모든 죽음을 극복하려고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죽음은 결코 수용될 수 없는 최악의 상태로서, 이것을 포함하는 모든 대안을 묵살시키는 불길한 무엇인가로 우리로부터 멀리, 저 멀리 격리된다. 고독사라는 특이한 형태의 죽음이 점차 늘어나고, 공개적인 자리에서의 죽음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에는 신기한 연관성이 있다. 현대가 죽음을 너무나 잘 관리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의 죽음이 체계 바깥에서 이뤄졌던 과거와는 달리, 우리의 모든 것을 채집한 이 안에서 우리의 죽음은 그 하나하나가 이 체계의 빛을 바래게 할 것이기 때문에.



  이 죽음으로부터의 철저한 거리 둠은 역설적으로 삶으로부터의 거리 둠과 동일하다. 우리의 사회적 삶은 이 육체적 삶, 죽음과 맞닿아 있는 삶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 위대한 것이 되며, 사회적 삶의 유지는 다른 모든 잣대를 망가뜨리며 유일한 척도로서 사회 위에 우뚝 선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의 측도 위에서 다른 대안 하나 없이 모두를 견줄 수 있다.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소련의 몰락과 역사의 종언을 조금 다른 의미로 해석해,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이 사라져버린 세상에선 자본주의 세상에 대한 적합도만이 우리의 척도가 된다는 분석을 한다. 이것을 돈이라는 키워드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삶과 대비되는 문명이라는 대비가 더 정확한듯 보인다. 우리가 살아 숨쉬게끔 유지시켜주는 이 문명 속에서의 살아감. 슈니츨러의 <라이겐>은 성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삶에서 문명까지의 인물상을 진화의 도식처럼 늘어놓는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을 다시 쫓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정작 도식으로부터 탈피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이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이 사회 바깥에 무엇이 있는가? 기아? 집단학살? 멸망? 정말로, 사회적 삶에 대한 기여도 외에 무엇을 기준으로 이야기하고 싶단 말인가?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이라는 웹소설은 바로 그 자리에 있다. 이것은 죽음이 곧 삶이며, 삶이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이고 낭만적인 사회 위에 내려앉은 ‘문명’의 이야기이며, 어느새 그 문명 속에서 이외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게 되어버린 이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계약을 맺은 화신으로서 지구에서 이세계로 와 계약의 내용대로 세상이 이행되도록 일을 해야 하며, 계약을 맺기 전에 플레이했던 게임의 내용을 시뮬레이션 삼아 동료들을 구하고, 요정의 신들의 심장들을 확보해 각각의 심장이 새로운 신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으며, 갈등이 해소되며 인간과 요정 사이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사실 그저 요정들을 몰살시키고 인간 세계의 논리가 비로소 온 세상에 적용되는 상태로 향할 뿐이다. 하지만 사실 그 상태가 바람직하다면 문제 될 것은 없으리라. 과연 그런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유명한 대심문관 일화에서, 대심문관과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들은 한 개인의 이야기기도 할 테다. 원래의 일화는 단지 신성한 자유와 그에 대비되는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며, 대심문관은 그리스도의 이상을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중생들을 구할 길은 이 땅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바로 그 중생 중 하나인 이 개인은 대심문관이 일궈낸 이 세속적인 교회에서 좋은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이 좋은 삶을 일궈낼 방법까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그리스도가 말하는 이 삶 이후의 무언가를 이해할 수 없다. 죽음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어떤 시각도 떠올릴 수 없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감회된 대심문관의 뺨을 때리며 울부짖는다. 제기랄, 대체 내게서 무엇을 앗아간 거요? 왜 나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냔 말이오?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에 지워버린 또 다른 가능성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거요? 그러나 그는 동시에, 그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는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을 너무도 잘 안다.



  인간의 신들에게 덮어씌워질 요정의 세계는,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낭만적이다. 영혼과 마법이 일상적인 세계에서 죽음은 삶과 분리될 수 없었으며, 삶을 하나의 연극으로 보는 시각은 훨씬 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여져, 영원히 어린 아이들이 늘 짧다고 느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잔인한 놀이를 하다가 떠나는 것이 바로 삶이다. 그들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아닌 이의 죽음은 완전히 무가치하며,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이에 대한 무제한적인 사랑이 겹치고 겹치며 하나의 사회를 이룬다. 그들은 귀족적이고, 명예로우며, 이 모든 수식어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에서 서술되었다. 요정이 아닌 그 누구도 이 낭만적인 제국, 인간과 늑대인간이 잡아먹히거나 애완동물로 길러지는 세상을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제국이 무너진 순간, 새롭게 만들어질 사회에서는 많은 것들이 달라지리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과 덮어씌워지는 것은 다르다. 모든 것은 결정되었다. 세상은 너무나 이질적인 형태로 유도되었고, 낭만은 그 세상과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신과 마법은 없다. 남은 것은 마치 릴케가 바라본 것처럼, 너무나 관료적이고 무서운, 껴안자마자 그 품에서 바스라질 문명의 아름다움 뿐이다. 아, 하지만 대체 관료라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관료는 이 세상에서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다. 천상의 질서는 인간 세상에 결코 적용되지 않으며, 인간의 신들은 어떻게든 요정과 늑대인간을 그 자리에 고정시키게끔, 자신의 질서를 흐뜨러뜨리지 않는 상수로 만들 수 있게끔, 원천 없고 무작위적이라고 할 만한 체계들을 각 도시에 부여했다. 금융 논리가 전 도시를 휩쓸고 있는 주식 시장이 한 곳에 있으며, 동시에 중세 풍 판타지에나 나올 법한 용병 길드와 그들에게 호위받는 마차를 모는 상인들이 있다. 돌성벽에서는 괴수들이 선을 넘는 것을 막고 있으며, 저 너머 어딘가에서는 첨단 마법 공학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천루를 오른다. 모든 움직임은 괴수의 습격에 대한 부담을 갖거나 차원문이라는 통제되는 수단을 통해 가능하며, 폭력은 아즈리온 교단의 사제들에게 거의 독점될 수 있도록 화기에 대한 연구는 엄금되어 있다. 서로 다른 도시들은 서로 다른 꿈을 꾸지만, 그 꿈을 꾸는 이가 누구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그저 어느 날에부터인가, 옛 신의 심장이 담긴 피연못을 막기 위해 몇 백 년 간 이어진 독재 정권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늑대인간과,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돈을 '사랑'하는 요정들이 있을 뿐.



  이 세상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은, 그 고통을 누구에게서도 찾을 수 없다. 삶을 유지하는 이 제도는 자신의 묵직한 무게를 모든 이들에게 나누고, 누군가는 조금 더 많이 받는다. 짓눌린다. 그러나 정말로 자리에서 벗어날 생각인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지 못하고 도망쳐 수많은 세월을 광기 속에서 보내다 결국 그 이상의 희생을 치룰 다짐을 하게 된 대장군은, 그럼에도 이것이 최선의 선택임을 알고 있다.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휘어잡고 있는 이 운신할 곳 없는 조밀한 체계 속에서는 선택하지 않음이 하나의 선택이며, 어디로든 움직이는 순간 주위의 모두가 갑작스럽게 늘어난 무게 속에서 신음한다. 제발 돌아와! 그러나 그 이상은 할 수 없다. 대장군은, 자신처럼 움직이고자 하는 고민을 하며 실제로 움직이는 것 자체가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하나의 거대한 사치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러니 최소한 이에 대한 보상은 해야 할 것이지만, 어떻게? 눈을 돌리는 순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동시에, 이 환경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 길은 자신이 떠나온 그 세계를 가리켰을 뿐이라는 것도. 대신 조금 나아진 환경은 그녀에게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인 인간 도시 중 하나를 제시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주인공 란드와르는 정작 볼로디아는 점차 이해하고 있는 신적인 시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생각을 포기하고, 지구인의 도덕과 화신의 의무 사이에서 생기는 행동의 유예를, 멈춘다. 대장군 볼로디아는 행동하지 않는다는 선택으로 최악의 행동을 저질렀다. 자신 역시 그렇다. 행동하자. 무예와 살육의 신으로서. 이 길 속에서 그는 볼로디아가 선택해야만 하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끝과 현재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고 있다. 그는 바로 그 세계에서 고통받았으며, 그 세계에서 살 수 없었기에 이 계약을 해야만 했던 이다. 하지만 아무리 냉소적으로 말하려고 해도, 란드와르 본인조차 자신이 그 지구의 체계 대신 제시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대안도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안다. 입을 다문다. 행동한다. 여기서 야기되는 우울증에 대한 병리학은 매우 사적인 문제가 된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좋지만, 그것이 사회의 구조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도록 해라. 네 할 일을 해라. 네 스스로도 그게 제일 나은 선택일 것을 알 테니까.



  이것은 생각의 죽음, 가능성의 죽음,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문명적인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다시 하나의 삶을 위해 몰입할 생각이 없다면, 그들에게 주어진 대안은 그저 거부 뿐이다. 테네브로즈, 벨레다, 펠로시, 그 밖의 모든 긍정적인 이들이 세상을 웃으며 밀어낼 수 있는 건, 그 안에 딱히 아무 것도 없는 탓이다. 삶에 대한 거부, 다시 태어남에 대한 거부, 태어남에 대한 거부…… <칠드런 오브 맨>을 찍던 쿠아론은 당시에 자신의 암울한 전망이 반대로 긍정적인 전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로 이상하다. 인간의 눈먼 돈, 늑대인간의 꼼짝 못할 체계는 모두 그들이 살아 있게끔 만들며, 그 견고함과 유능함은 그들의 사고 바깥, 요정의 방식, 과거의 방식을 어떤 의미로도 이해할 수 없도록 눈앞을 가로막는다. 마침내 인간의 방식, 인간들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적인 삶이 그 변두리의 문을 두드린다. 이제 독재는, 제국은 끝이다! 그 말을 들은 남은 이들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렇다면 앞으로 도래할 것은, 우리가 그것이 죽기를 애타게 기다려야 할 것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이 질문은 너무나 이상하고 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정상을 대체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그러니, <계약직>은 죽음의 자살에 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저자는 이미 이러한 삶을 예고한 바 있다. "역병의 저주는 사람과 괴수를 썩어 문드러지는 몸에 가두었고, 그들이 영토 바깥으로 나가는 것마저 막았다. 누군가는 죽음을 택했지만 누군가는 새로운 몸을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저주는 불사의 축복과 등가였으며 주검으로서의 삶은 원래의 삶보다 다채로웠다. 이제 늪지대의 부패자들은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움직인다. 산 자들에게 죽음의 은총을 베푸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죽음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