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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어 문제라는 유명한 주제가 있다. 인식론과 지식, 학습이나 심신 문제Mind-body problem 등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문제인데, 우리가 어떤 것을 안다고 말하기 위한 연역적인 조건이 매우 허술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JTB(Justified True Belief)라고도 불리는 이 문제 자체가 여러 보강과 그에 대한 반례를 통해 사실상 해결 불가능한 문제로 넘어간 만큼 이 주제를 길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요점은 우리의 학습과 지식에 대한 연역적 정당화가 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런 식으로 논리의 한계가 여러 분야에서 드러났다. 19~20세기에 드넓게 확장된 논리는 20세기 후반부에는 더 이상 학문의 주역이 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영역에서 기틀로서 남아 있었다. 그리고 21세기에는 어쩌면 그보다도 더 축소될지도 모른다. 학습과 지식에 대한 새로운 파라다임으로 기계 학습이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른 탓이다.



<기계 학습을 다시 묻다>는 바로 이 기계 학습을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눈부신 성과와 별개로, 학습과 지식에 대한 접근법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제안하는 책이다. 저자는 수십 년간 기계 학습을 연구하며 얼추 거의 맞는Probably Approximately Correct; PAC 학습을 제안하였고, 이 방법론이 기계 학습의 기초가 되어 튜링상을 받았다. 이것을 단순히 기계 학습이라는 하나의 실용적 학문에서의 기여로 국한한다면 그리 흥미가 없을 수는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반대로 기계 학습이 우리의 학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가 학습한 지식이, 기계 학습의 결과로 배운 지식을 비판하는 것과 동일한 지점에서 비판될 수 있다는 점과 함께. 우리는 정말로 무엇을 엄밀히 판단하여 아는 걸까? 우리의 앎은 대체로,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휴리스틱의 결과물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 휴리스틱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것일까?



먼저 이 PAC 학습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이것은 주어진 입력이 무엇에 속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가설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알고리즘이다. 그 가설은 하나의 다항식으로, 여러 차수의 변수들의 합으로 입력받는 표본 사이에 하나의 경계선을 그어 입력들을 구분한다. 현재의 가설 함수는 새 입력에 대해 정답을 맞출 수도 있고, 반대로 틀릴 수도 있지만 그 경우 가설은 그 예시에 맞춰 조금 수정된다. 주어진 표본에 대해 이 과정을 반복하였을 때, 임의의 수준의 정확도를 갖는 가설이 생성될 확률을 원하는 수준 이상으로 높일 수 있다면 이는 PAC 학습 가능한 문제이다. 엡실론-델타 논증이 극한값을 정의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 역시 얼마든지 정교해질 수 있는 형태로 학습을 정의하고 있다. 많은 문제들이 실제로 PAC 학습 가능하며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딥 뉴럴 네트워크 상에서의 학습 역시 다항식 대신 퍼셉트론을 사용하여 조금씩 학습해나간다.



이 일련의 수학적 과정은 생명의 진화 과정을 생각해볼 때도 유의미하다. 유전적 변이를 통해 다양하게 생겨나는 생물체들의 집단 속에서 각각의 생물체들의 생존과 사망은 그 생물체의 유전자가 환경에 제시하는 가설이 올바른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며, 그 집단의 유전자 풀은 환경과의 적합도를 반영하여 수정된다. 물론, 환경은 어느 정도 일정해야 하며 적합도가 높아질 수 있는 어떤 규칙과 같은 것이 존재해야 할 테다. (이를테면, 이 변화된 환경에서는 열에 더 잘 버티거나, 땅에 잘 숨어야 한다, 같은.) 이것이 단순한 비유가 아닌 이유는 그 자그마한 변화가 실제로 빠른 시간 내에 큼지막한 진화를 야기할 수 있음을 기계 학습을 통해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찍어서 나오는 50%의 확률보다 아주 약간이라도 정확도를 높일 수 있는 약한 학습이 가능하다면, 그 반복을 통해 상술한 PAC 학습과 같은 강한 학습이 가능하며, 그 시간은 유의미할 정도로 짧다.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운운하는 진화론에 대한 비판을 포함해, 진화론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이론을 요구하는 경과 시간의 문제도 해결되는 셈이다.



동시에, 우리의 지능이라는 것이 이런 방식으로 학습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다. 아기가 태어난 이후 우리와 같은 지능을 가질 때까지의 기간 동안 아이는 빠르게 학습을 해나가며 여러 지식을 얻는데, 학습 과정에서 아이는 많은 실수를 하고, 그것을 바로잡아주는 교사가 있다. 이 과정이 기계 학습에서 담보하는 것과 과연 다를까? 카너먼과 같은 학자들이 우리가 지식들을 종합하여 판단을 내리는 주체라기보다는, 그러한 지식들을 통해서 형성된 머릿속에 있는 어렴풋한 느낌을 꺼내는 것에 더 가까우리라 분석한 것처럼, 학습과 지식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연역적인 이성에서 점차 귀납적인 직관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것은 기계 학습에 대한 현대의 연구가 단지 인공지능 뿐 아니라 일반적 지능에 대한 연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계>에서도 언급하듯, 우리는 아직 우리의 지능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분명한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논리 영역이 우리에게 가장 빠르게 분명해졌을 뿐, 그 밖의 다양한 능력,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라고까지는 생각도 못한 능력들이, 실제로는 참 복잡하고 흉내내기 힘든 탓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인공지능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는, 우리 자신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사회 속에서 그 문화를 체득하고 있으며, 동일한 질문에 대해 매번 서로 다른 답변을 하고, 지금도 계속 무언가를 학습하고 있는 듯한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라고 생각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