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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웬 과학철학? 내가 궁금한건 그런 전문적이고 딱딱한 분야가 아닌데?'






사람들이 흔히 철학사 입문자에게 추천하는것은 철학사, 혹은 고대 철학자임. 왜냐면 기초가 필요하고 기초는 곧 오래된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기초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맞는 생각이지만 그 기초가 철학사이거나 고대철학이라는 생각은 조금 숙고를 해 볼 필요가 있음....



정말로 철학의 기초가 되는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1. <생각과 추론, 판단> 에 대한 지식과 이해

2. <앎과 지식> 에 대한 지식과 이해

3. 그리고 저것들이 세계와 갖고 있는 관계에대한 관념


간단하게 말해서 '인식론' 이라는 분야가 철학의 기초가 된다는것임.

왜냐면 철학은 과학이나 기타의 분과 학문들과 달리 통일되고 고정된 방법론이 없기때문임. 철학의 특성상 모든 대상에대하여 질문하고 대상의 총체에대하여 탐구하며 대상을 탐구하는 탐구행위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함. 이런 전방위성, 총체성, 메타성은 철학을 다른 학문과는 크게 다르게 만드는, 그리고 모든 학문의 기초이자 근원으로 만들어주는 이유임. 수학은 수학적 오브젝트나 수학적 진실에 대한 메타적 고민 없이도 할수 있지만 철학은 그렇지 않음.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정의에 의해서' 철저하게 철학이 아님.




진정 철학 입문자에게 필요한 기초는 무엇일까?

그것은 철학의 역사에대한 개괄이나 그 흐름에대한 지식과 이해, 혹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같은 '철학의 기원' 이라 여겨지는 인물들의 사상에대한 지식이 아님. 오히려 이것은 철학의 공부에 있어서 상당히 고급수준의 전문적인 영역에 들어감.


철학에 들어서려는 이가 반드시 갖춰야 할 능력은 첫째 비판적 사고와 회의하는 능력과 태도, 두번째는 지식에대한 이해, 세번째는 실재에대한 이해임.

이것들은 서로 독립되어있지 않으며 굉장히 긴밀한 관계를 가짐. 예를들어 앎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알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따지다 보면 결국 앎의 대상인 실재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문제로 이어지게됨.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절대로 철학사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현대 이전 철학을 깎아내리려는게 아님. 결코 그런 의도를 갖고 이런 말을 하는게 아님. 오히려 내가 지금 중요하다고 말하는 내용들중 상당부분은 근대(데카르트~흄)에 집중적으로 논의된 것들임.




'그러면 인식론을 공부하면 되지 않나요?'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어. 분명 내가 중요하다고 말하는것들은 과거 인식론에서 다뤘던 문제들임. 그렇지만 오늘날의 인식론은 이미 거기서부터 너무 멀어져서 굉장히 전문적이고 어떻게보면 지엽적인 문제들을 논하는 분야가 되어버렸음. 철학에 발들이려는 이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논하고 있는 상태는 아님.



그래서 가장 적합한 입문 절차는 바로 "과학철학의 기초 파트" 를 공부하는것이야.


과학철학은 과학에대한 철학인데, 과학이란것은 지식을 얻는 방법임. 그렇기때문에 과학철학은 기본적으로 지식을 얻는 방법 일반에대한 논의를 포함하며, 다른 지식을 얻는 방법들에 비했을때 과학이 어떻게 다르고 어떤 특징을 갖는지를 연구함. 이런 흐름에 따라 기본적으로 연역, 귀납같은 지식을 얻는 방법에대한 기초적인 개념들이 등장하고, 가설 추론같은, 생각과 판단 추론의 문제들이 논의되며, 나아가 실재(주로 과학적 실재에 한해서지만)에 대하여 말하게 되지.







나는 철학사를 공부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사를 통해서 쉽게 범할수 있는 오류를 파악할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함.

무언가에대해 엄청나게 고민하고 숙고한 다음 해당 문제의 성질에 따라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경향대로 치명적으로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한참 후에 깨달은 뒤 다시 오랫동안 고민해서 정정하게 되는 일, 물론 개인적인 지적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꽤 값진 경험이겠지만, 한두번으로 족하다 생각함.

이미 기존의 선배 철학자들이 똑같은 문제를 똑같은 방식으로 실패하고 남긴 기록들이 있으므로, 우리는 선대의 경험을 흡수함으로써 시간과 열정을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쓸수 있음.


다시말해서, 철학사의 가치중 하나는 (일반 역사의 가치에대한 정통적 견해처럼) 오류를 피해 갈수 있는 지침을 제공해 준다는것이고, 이것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오류를 거를 체가 되어준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역설적으로 철학사, 그리고 예전 철학들은 그들 자신 자체만으로는 오류를 제거해주지 못함.

왜냐면 그것들은 당대에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기때문임. 모든 저서들은 무엇에대해 주장할뿐이지, "내가 주장하고 있는 이것은 틀린것이고 지금 당신이 읽고계신 내가 쓴 책은 틀린 책입니다" 라고 말하진 않잖음.



오류를 제거하는데 있어 역사보다 더 먼저 발동되어야 하는 체는 바로 사실과 경험의 체임.

사실과 경험의 체는 다시말하자면 경험에 의해 얻을수 있는 사실에대한 지식으로, '사실에대한 믿을수 있는 지식'과, 그것이 논리적으로 거부하는 결론들의 결합으로서 오류를 걸러냄. 예를들어서 물리세계에대한 믿을수 있는 지식은 귀신이 존재할수 없는 이유를 말해주지. 물리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때문임.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나는 꽤 여러번 독서모임이나 독서커뮤니티를 해봤는데, 그중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많이 대화를 나눠봤지만, 그들 대부분은 저런 기초를 갖추고 있지 않았음. 그래서 그들이 누군가의 전문적인 이론에 대해 장황히 설명했을때, 그것들중 몇몇 개념들에 대해서 "그래서 그것이 실재의 무엇에 대응하나요" 라고 물었을때 그들은 말할수없는 당혹감에 빠지게 되는걸 여러번 목격함. 격투기가 싸우는 능력과 기술이라면, 철학은 생각하는 능력과 기술이겠지. 격투기를 배운다는 사람이 근력이나 유연성, 심폐지구력같은 기초체력과 기본기를 연마하지 않고 그럴듯해 보이는 자세나 고난도의 기술만 연습한다면 그건 실전성이 없음. 말하자면 중국무술이랑 비슷한거지. 실전에 돌입하면 아무것도 못하게됨.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체력은 비판적 사고, 자기검토적 태도, 회의하는 성향임.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실인데 태도와 성향이란 사실 굉장히 중요한 기초능력임. 싸움꾼에게 있어 깡이나 투쟁심이 굉장히 중요한 기초능력인것처럼...

비판적이고 회의적이며 의심하는 태도와 성향이 없다면 철학은 일종의 교조주의적이거나 숭배적인 행위가 되어버림...







얘기가 길었는데, 그래서 아무튼 그러므로 철학 입문자에게 가장 중요한것은 철학의 기초체력을 기르는것임. 그것은 인식론 분야에서 훈련할수 있음. 그런데 현대 인식론은 기초체력보다는 특수기술에 가까움. 그래서 부적합. 그렇다고 데카르트나 흄을 읽으라고 하고싶진 않아. 그렇게 되면 이미 입문이 아니지. 결국 가장 좋은것은 과학철학의 기초부분을 알아보는것이라고 생각함. 그리고 그중에서 저 책은 굉장히 간결하고 적은 분량(400페이지 정도) 임에도 정말 필요한 핵심만을 잘 짚어준 책이었음. 그러므로 추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