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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비극론만을 남기고 소실된 것은 비극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비극을 희극보다는 좋아하고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장미의 이름>이 선보이는 가상적인 시나리오는 우리가 잃어버린 또 하나의 아쉬운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바흐친의 라블레 분석이 그 기회비용을 이야기하는데, 죽음과 삶이 한데에 모여 화해하듯 공존하고 상부와 하부가 뒤집히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섞이며 그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자라나고 풍성해지며 확장되는 그로테스크한 세상은, 우리가 공감하기는 힘들면서도 이런 방향으로 발전한 세상이 또 얼마나 흥미로웠을지 상상하게 해준다.



그로테스크, 기괴하다는 말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된다. 이러한 구분은 어떤 모범적인 규격이 딱 맞춰 정해져 있는 근대로부터의 흐름에서 기인했고, 이러한 규범에 들어맞는 삶에 더 많은 자원과 효율적인 작동이 집중되는 동안, 바깥의 것들은 더더욱 철저하게 배척되고 소각되며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다만 이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라블레가 <가르강튀아>를 쓰던 시절에는 조금 다른 구분이었는데, 하위의 자연으로부터 상위의 초월적인 것까지의 수직선상에서 더 위로 상승하거나, 아래로 하강하거나, 두 움직임으로 구분되는 경직된 체계에서 정상과 비정상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로테스크는 그저 자연에서 자연으로, 수평적인 움직임을 선보였을 뿐이다. 저 하늘의 질서는 격하되어 자연으로 떨어지고, 죽고 파묻혀 똥이 되어 다시 태어나며 그것을 온 민중이 웃으며 지켜본다. 그리고 이것이 딱히 저 하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의미는 아니다.



애석하게도 우리 시대에 웃음은 다소 부정적이고 반어적인 무언가로 변질되었다. 풍자는 풍자 대상을 격하시키며 그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도록 만드는 것이고, 무엇을 보고 웃는다는 것은 그 대상을 웃음의 현장에서 배제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블레가 표현하고자 한 르네상스 시대의 웃음은 근대 이후의 웃음과는 다르다. 하나의 거대한 자연의 요란한 웃음 소리 속에서 다치고 꺾이며 죽어가는 이조차도, 어이 없이 웃다가 죽는 그런 우스꽝스러움이 엄숙한 세계의 이면에서 또 하나의 실재를 구현하고 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라는 거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가 되며, 그들이 먹고 마시고 싸고 죽는 것은 이 그로테스크한 자연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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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tery Flesh Pit>은 바흐친의 라블레론이 말하는 근대 이후의 변질에 대한 좋은 예시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거대한 고생물체를 다루는 이 현대 괴담 시리즈는 그 영문 모를 거대한 육체를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다루는 정신 나간 기업과 그 명소를 찾는 관광객들을 다루되, 거기에는 웃음기가 없다. 이 기획은 그저 고생물체가 언젠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맞이하는 파국을 위한 전조일 뿐이며, 그 파국과 이후의 이야기는 틀림 없이 공포스럽고 부정적이다. 고생물체에게 먹히는 시설과 그 안의 사람들은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을 뿐이고, 이들이 고생물체의 안에서 다른 생명체로 부활해 돌아다니는 그로테스크한 새로운 삶은 어떻게 생각해도 긍정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없다. 이 생명체에 대한 이야기가 라블레의 손에 쓰였다면 저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이런 개같은, 니미럴, 좆까지마, 따위의 욕설을 한 마디씩 내뱉으며 죽었다가, 그 마지막 유언을 계속 내뱉는 우스꽝스러운 동물로 다시 태어나 주위를 떠돌고 있었을 테다.



하지만 이런 현대도 나쁘지는 않다. <Mystery Flesh Pit>은 지금 이대로도 흥미로운 이야기이며, <가르강튀아>를 도저히 흥미롭게 볼 수 없는 스스로가 참 안타까우면서도, 그 반대편에 있는 글들에 느끼는 매력을 생각하면 이 선택과 집중에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