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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리 감흥은 없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읽었을 때도 이것이 주류 해석과는 조금 다른, 마르크스주의적인 해석이라는 걸 알고서 읽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것보다는 조금 더 흥미로웠던 탓일지도 모른다. 사실, <다른 방식으로 보기> 같은 책을 읽고 미술 비평서를 읽는다는 건 그의 의도와는 달리 서로 충돌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래서 이 천 위에 덧칠된 물감, 깎여나간 돌덩이를 보고 그 기술에 감탄하는 이상으로 무엇에 경탄해야 할까? 예술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합리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진리 혹은 세계에 대한 직관 등을 전달해줄 수 있다는 가짜 희망을 주었고, 그것은 21세기에는 완전히 좌절된 기획이다. 그렇다면 그런 21세기에 미술을 보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본다는>의 첫 두 장은 미술이 아닌 동물과 사진을 다루는데, 그래서 오히려 이 부분들을 읽을 때가 더 재밌었다. 비록 이 부분에서도 어느 정도 뻔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동물과 인간 사이 관계의 단절, 동물이 본래의 삶을 잃고 인간에 대한 비유, 인간성을 체화하는 무언가, 그리고 마침내 동물원까지 소외되는 과정을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해온 일과 함께 바라보는 시각은, 뭐라고 할까, 참 20세기스러운 분석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사진술이 어떻게 인간의 감각을 세계로부터 분리시키고, 그 사진술로서 포착한 계급적인 부조화, 계급 체계가 강요하는 하위 계급의 불편함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가피한 폄하는 조금 더 노골적이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전쟁 및 참사의 사진이 우리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에 대한 분석은 흥미로웠다. 우리가 바라보고 본능적으로 그 프레임 속의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고 느끼지만 그럴 수 없는 상태를 일상적으로 겪는 상황 속에서, 점차 그 본능에 둔해지며 이 좌절을 자신의 좌절이 아닌, 이러한 사회 전체에 대한 좌절로 돌릴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 이 분석은 우리가 폭력적인 게임과 영화를 규탄할 수 있다면, 동일한 논리로 어떤 온정적인 보도조차 규탄할 수 있게 되며, 사실 우리에게 깊은 차원에서 그 둘의 영향은 그들이 공유하는 문제점이 워낙 커 둘 사이의 차이점이 유발할 추가적인 문제점 따위는 더 신경 쓸 필요가 없으리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 같기도 하다.



미술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와서는, 시작할 때에 했던 말처럼 그 이상의 어떤 감흥도 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미술은 지루하고, 무가치하며, 그러한 시각을 우리에게 공유해주는 예술가의 시각이란 참 평범하기 짝이 없다. 그가 그림을 그리기 전에 살았던 환경이 그에게 우리가 보는 것을 실제와는 다른 질감으로, 이를테면 건물과 그 사이의 대로를 마치 돌덩어리들과 그 사이의 계곡과 같은 것으로 표현하도록 했다는 것은 그저 그렇구나, 하는 것 이상의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어떤 고상하고 학문적인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림의 전경이 어떤 식으로 배경과 뒤섞여 하이데거의 현존재를 느끼도록 하는가-아, 그러니까 지금 시네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라면 참 풍부한 감수성을 갖고 계시군요.



그렇게 감상을 정리하다 보니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20세기까지의 그 전범으로서의 예술에 여전히 남아 있는 가치의 잔향을 싫어한다. 그것이 어떤 '교양', 문화 자원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우스꽝스럽다. 아마 이건 키치에 대한 이야기와도 조금 맞닿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훨씬 덜 학술적이고 훨씬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우상들 사이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삶 속에서, 내가 함께 그것에 감탄하는 척하고, 그 너머의 의미를 이해하는 척 이상의 변화를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자신에게 둘러싸인 체계 덕분에 추앙받는다는 점 이외에는 다를 것이 딱히 없는, 백화점에 진열된 명품의 브랜드 가치 만큼의 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