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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자체는 Carl Schmitt의 다른 여러 글들을 함께 엮어 놓은 것이지만, 일단 그 첫 글인 <로마>를 읽은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목적은 달성되었다 싶어 미리 감상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내용을 이해했음에도 찾아오는 총체적 난감함 역시 글을 적으며 어느 정도 정리되리라는 예상 때문이기도 하다.
<로마>에서 Schmitt는 자유주의가 전제하는 대표의 개념을 대리인이 아닌 진정한 인격체로서의 대표, 어떤 권위가 전제되는 위대한 존재에 대한 역사로부터 찾는다. 대리인은 그저 제도적으로 편의상 사람들의 의견을 대리로 전달하도록 뽑힌 이에 불과하고, 뽑혔을 때와 마찬가지로 제도에 의해 언제든 대체될 수도 있다. 다만 그런 것은 원래 대표가 전제하는 것이 아니었고, 대표는 오히려 이 인민들 모두를 대표할 수 있는 인격체로서 그 모두보다 어떤 점에서 뛰어나리라고 전제되었다. 물론, 그것은 능력적인 뛰어남보다는 왕, 교황 같은 권위적인 뛰어남에 더 가까운 표현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대표 개념이 점차 사라져 가는 이유는 그 제도에 의해서만 출현할 수 있는 대리인을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알고리즘적 제도에 의해서만 돌아가는 사회라는 생각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사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정말로 20세기에 서로 머리를 맞대고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사상이고, 기존의 세상과 완전히 괴리되는 사상이다. 이들은 둘 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야 한다는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대신 기저에서 알고리즘적으로-좀 더 인문학적인 어휘로 말하면, 유물론적으로-우리의 의사와 완전히 무관하게 돌아갈 수 있는 세상의 설계를 전제한다. 그것은 자연과학이 그 뿌리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학문으로서 우리의 관점을 실증주의적으로 바꾸는 것과 함께 하며, 자본주의의 자본가들과 공산주의의 노동자들은 과거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큰 차이가 없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어떤 형이상학적인 권위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이렇게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 경제적 사고에 근거해 행동한다. 그들이 이룩하고자 하는 이상적 사회에는 대표가 존재할 수 없다.
이 대표의 부재는 결과적으로 대중민주주의의 실패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경제적 사고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두 다른 대중적 집단이 정치적으로 대립할 경우, 중재 이외에 어떤 것도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는 탓이다. 중재가 사태를 해결하는 일은 거의 없고, 그저 유예하며 결코 끝나지 않을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재확인하며, 재재확인한다. 그렇다면 대리인들의 역할 없이 제도적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그렇지 않다. 국제연맹이라는 예시를 통해 보자면, 이 개체가 그저 제도적인 법률을 기계적으로 따를 뿐이라면 그것은 결코 현 상태에서 우위에 있는 이들을 거스르는 결과를 야기할 수 없고 새로운 국가의 승인과 같은 안건은 그들에게 유리한 경우에만 승인된다. 국제연맹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인격적 결정이 필요하며, 그 결정을 위해서는 대리인 아닌 대표가 필요하다.
그러나 대표는 자유주의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는 없다. 자유주의는 어떤 것으로도 침범 받지 않을, 신성한 "사적인 영역"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의 근본은 종교 전쟁 이후에 합의된 침범 받지 않을 사적인 종교의 영역에 있다. 대표에게 부여할 권위가 필요한 마당에 권위를 극단적으로 축소시켜 모두를 신성한 개인으로 만드는 자유주의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리가 없다. 대신, 그 대안은 로마 가톨릭주의에 있다. 로마 가톨릭주의는 수많은 반대자들이 위선적이라 생각할 정도로,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모두를 품고 있다. 누군가는 가톨릭의 이름으로 보수주의를 말하고, 누군가는 가톨릭의 이름으로 신성한 자유를 말한다. (아마 우리에게는 가톨릭이 파시즘을 승인하며, 이후 해방신학이 한시적으로 승인된 것이 좋은 예시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 모두는 그럼에도 그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모든 인민을 한데 묶는 어떤 이에 의해 대표된다. 그의 권위는 로마 가톨릭주의에서 온다.
이 "모순적인 것들의 복합체"는 결코 자유주의에 의해 다스려질 수 없다.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은 당시 Schmitt가 살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실패와 함께 살펴볼 때 이해할 수 있다. 나치 독일의 참담함으로 인해 언급되지 않기는 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의 의회는 늘 마비되었고 대통령의 긴급 명령권이 과반수의 일을 결정했다. 베버가 제안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 세속화되는 종교와 그에 따라 작동하는 자유주의적 의식은 문제의 원인이 되면 되었지, 해결책은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우리는 자본주의(미국)와 공산주의(소련)가 제시하는 현대적인 변혁과 그 문제를 막기 위해서, 로마 가톨릭주의의 그 양립 가능한 권위를 정치의 근본으로 다시금 확실하게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내가 정말로 납득할 수 있을리가 없다. 참 안타깝게도, 베버의 책을 읽을 때처럼 Schmitt의 주장은 바로 그 미국과 소련의 시대-어쩌면 그 이후-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비기독교적인 근본을 가진 국가의 국민이 공감하기 참 난감한 무언가다. 우리는 세상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돌아간다는 전제에 그 반대보다 더 익숙한 시대에 살고 있다. Schmitt의 "대표"를 선출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것이 꼭 68운동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야기한 권위의 해체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흥미롭고 설득력 있는 논증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우리가 21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권위를 어떤 식으로든 세울 수 있게 된다면, 그 때야말로 다시 Schmitt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그 권위가 너무나 필요한 시대이기에 다시금 Schmitt의 이름이 들먹여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칼 슈 미 트.. - dc App
좋은 글 감사
님 슈 미 트 빌런임?
슈 미 트 는 도래하는 것이다 이 댓글은 슈 미 트에 의해 대중의 실패로서 예언되었다 답변 또한 슈 미 트에 의해 이해될 수 있으니 이 이상 쓰지 않겠다
도래할 주 슈 미 트 님을 경배하겠습니다
허거걱... 메시아의 도래보다 더 무서운 칼 슈 미 트의 재림...
"자연적 우주의 접근은 틀린 것이다. 문제의 핵심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자유를 상실하는 영역은 인격적 관계의 영역이다. 그리고 신에 대해 열려있다는 의미로는 더 이상 인간이 신 앞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자유의 상실은 정욕과 같은 특정한 신체적 흠결 때문에 결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격적 관계의 성격에서부터 나온다. 자연적 자유는 유지되고 있지만, 영적인 자유는 파괴되었다. 사람은 더 이상 공동체의 자발적 개방성을 지니지 못한다. 사람은 구속되어있다. 그렇다. 그러나 본성상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의 구속은 자기 영혼의 폐쇄성에 의해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출전이 어디인지
비록 입헌군주정이라고 하나 여전히 왕이라는 상징이 기능하는 일본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칼 슈ㅁ1트가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겠네. 한국의 경우에는 대표성을 띨 수 있는 상징체계가 아예 없다시피 한 가장 '현대적'인 나라라 더더욱 지금으로서는 슈ㅁ1트의 관점이 흥미로우면서도 막연하게 다가오는 듯. 다만 자본주의-공산주의가 유물론적 관점을 도입하면서도 여전히 모종의 형이상학적 권위가 지속된다고 생각하는데-설령 착각이거나 자기기만일지언정-그거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도 있으면 좋겠다... 난 언제쯤 슈ㅁ1트를 읽어보게 될라나... 아무튼 잘 읽었음
존 롤스의 "죄와 믿음의 의미에 대한 짧은 탐구". 진짜로 롤스가 쓴 거 맞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