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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의 매 순간 선택을 한다. 이성은 우리에게 질문과 동시에 선택지를 제시하고 우리는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고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흔한 경우는 아니다. 주어진 것들 중 하나를 고르면 그건 판단이고, 판단이 우리에게 이익이 될수록 우리는 판단력이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인간이 욕망의 동물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 속에서 판단을 통해 욕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본유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달리 말해 판단이란 곧 순수함이고, 대의다.
문제는 판단은, 판단력은 언제나 맑고 고유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판단의 수원인 이성에 대적하는 많은 본성들을 우리는 갖고 있다. 통칭하여 감성이라고 부르는 본성들 때문에 우리는 실수하고, 바보처럼 행동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며 심지어는 스스로의 욕망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육신에 깃든 영성지향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육신이 요구하는 것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신은 크나큰 장애이다.
장애를 이겨내어 최선의 판단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뒤틀린 카오스(chaos) 그 자체인 세계에는 수많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고 있고 주체는 톱니바퀴, 또는 그 톱니바퀴를 조종하는 하나의 밸브 내지는 레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말인 즉슨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행동을 취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주체가 파악한 범위 내에서의 적절함일 뿐 전체의 관점에서는 효용이 0에 가까운 무용한 발버둥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사실 옳고 그름이란 것은 없는 것 아닐까? 어떤 판단으로도 최선의 효용을 얻을 수 없고, 얻을 수 있다 한들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조차 알아볼 수 없다면 옳고 그름이라는 단어는 허상에 불과할 따름이고 오로지 숫자, 0부터 9까지 수의 무궁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대소 관계의 비교가 판단의 전부인건 아닐까? 그런데 사실 그 대소 관계조차 불분명한 판단력이 부여한 의미없는 의미가 아닐까? 그러니까, 순수라는 건 사실 없는 게 아닐까?
<햄릿>의 주인공 햄릿에게 주어진 고뇌는 내게 이상과 같이 읽혔다. 도처에 부덕과 불안과 죽음이 숨죽이고 있는 세계 속에서 햄릿은 그 권위의 정점에서조차, 즉, 고결함의 지상(至上)에서조차 더러움의 소치를 발견했다. 그런 세계에서 왕자란 왕관이 씌워진 먼지쯤이나 되는 존재다.
3막 1장의 저 유명한 “살 것이냐 아니면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시작하는 긴 독백에서 햄릿이 죽음을 암시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삶의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은 더러움, 더러움 뿐이다. 불륜, 음모, 가족살해 따위의 더러운 사건이 발생하는 왕가에서는 도무지 도금된 고결함의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길고 지루한, 진흙탕 싸움 같은 플롯 속에서 햄릿은 단 하나의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을 우직하게 밀고간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클로디어스, 거트루드 폴로니어스, 레어티즈, 오필리어, 그 외 많은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 최후에는 자신까지.
부덕의 성취를 위해 단 한 사람(부왕)이 죽은 것과 비교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부덕함보다 고결함이 더 많은 사람의 희생을 필요로 했다. 햄릿은 어디까지 내다보고 판단했을까? 5막 1장에서 햄릿은 요릭의 유해를 바라보며 절친 호레이쇼에게 이렇게 묻는다. “자네는 알렉산더대왕도 이런 꼴을 하고 땅속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호레이쇼는 답한다. “그렇겠지요.” 그러자 햄릿은 이렇게 말한다. “알렉산더는 매장되었다, 알렉산더는 먼지로 돌아갔다, 먼지는 흙이다, 흙으로 진흙을 만든다, 따라서 알렉산더의 변신인 흙으로써 사람들은 맥1주통 마개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시저 황제가 죽어서 흙이 되어 구멍을 막아 바람막이가 될 수 있을 거야. 오, 온 세상을 경외감으로 떨게 하던 그 흙이 벽을 때워서 겨울의 돌풍을 막다니.” 햄릿의 판단은 죽음이었다.
비극으로써 순수는 성취되었다. 햄릿은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아니, 셰익스피어는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수한 비극보다는 더러운 희극과도 같은 삶을 살아간다. 앞서 말했듯 햄릿의 판단은 대의였다. 대의라는 것은 잠깐 솟아올랐던 책 구석, 종잇장 끝의 불길에 불과하다. 그 불길이 조금 더 퍼지긴 했다만 여전히 그 비중은 크지 않다. 그러나 극의 최후에야 등장하는 포틴브래스의 호기심은 대의를 계승하는 촉매로 기능할 것이다. 불길이 사그라들고 남은 검은 자욱을 보는 사람은 호기심을 갖는다. 저기 무슨 내용이 있었을까? 어떤 텍스트가 불에 타버린 걸까? 그런 호기심만으로 순수에 대한 인간의 천착은 계승된다.
그런 천착은 옳은 판단일까? 호기심에서 비롯하는 비극은 옳은 결과물일까? 순전한 내 생각은, 거기에 옳고 그름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일련의 행동은 욕망, 또는 욕망의 부산물일 뿐이다. 카오스를 살아가는 존재가 순수를 좇는 것은 자연스러운 판단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이 무의미한, 일종의 미적 판단의 문제인 셈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옳은 질문은 순수에 대한 호기심이 언제나 아름답냐는 것이다. 다시 순전한 내 생각은, 그렇다, 이다. 근거는 박약하다. 혼령과의 대화, 요릭의 유해를 바라보며 독백하는 햄릿, 숨막힐 듯 예리하고 절묘하게 교차되는 두 젊은이의 대결 구도와 악인의 강렬한 죽음 따위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장면들을 읽었을 때의 카타르시스, 순수를 좇는 청춘의 정열을 목도하는 희열을 자신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라도 나는 <햄릿>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맥1주통은 ㅅㅂ 왜 금지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