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작품. 사실 예전부터 엄청 읽어보고 싶었으나 종이책은 절판되고 웃돈이 많이 붙어 걍 더러워서 안읽는다 이러고 말던 작품인데 이번에 이북리더기를 구매하면서 이북으로 구매해서 봄. 어떻게 보면 나에게 있어선 하나의 새로운 도전과 같은 작품임. 마찬가지로 책 내용도 도전과 관련됨.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 대표되는 혁신 세력과 가진 것을 공고히 하려는 보수 세력의 마찰과 그것을 뛰어넘어 계속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도전이 인상깊다.
비트겐슈타인의 인생 노트
비트겐슈타인의 말들을 옮긴 책. 편협한 오독일 수 있겠지만, 삶에 있어 진정 중요한 것은 답을 알 수 없는 형이상적인 문제들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인생을 살아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견디는 것. 그 속에서 행복을 위해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디로 삶의 중심은 실제 생활에 맞춰져야 하는게 아니냐고.
좋은 사람으로 사는 법
괴로움은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에 따라 생기며, 그 괴로움을 없애고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법인 이해와 사랑, 갈망과 두려움 없이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사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짚어준다. 올바른 ‘견해’에 입각해 사고하고 행동함으로써 불교의 키워드인 상호의존성을 토대로 차별을 금하고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라는 윤리적 지침을 추출하려는 틱낫한의 노력이 엿보인다.
개인적인 체험(스포 있음)
장애아를 낳은 ‘버드’가 아이를 죽이느냐 살리느냐 깊은 고뇌를 다룬 작품. 버드는 자유와 책임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며, 도덕적 수치심에 괴로워한다. 버드를 둘러싼 세계는 버드의 불행을 비웃는 듯하면서도 무심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체험이 정말 개인적인 체험에 지나지 않을까? 이 작품이 감격스러운 것은 개인의 쾌락을 위한 자유의 방종에 빠지지 않고 기꺼이 아이를 책임진다는 버드의 위대한 선택과 함께 방종으로 비상하려는 ‘버드’를 붙잡아 일깨우는 공동체인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초상
이문열의 작품을 전부 읽어본 건 아니지만 읽어봤던 작품 중에서는 가장 좋았던 작품임. 입시부터 시작해 대학 재학 중의 이문열의 고뇌와 진심이 담겨 있는 거 같아서 특히 좋았음. 어린 시절에 이문열과 같은 고민을 하며 살았던 현대인이 얼마나 많을까 의구심이 들긴 하지만, 고뇌의 주제는 다를지언정, 젊은 사람들의 고민의 무게가 결코 다르지 않을 터, 그런 점에서 젊은 날의 고뇌와 함께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단순한 서사지만 꽤나 감동스러움.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모두가 무엇인가 극복하려는 의지를 지닌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보편성을 갖춘 책이 아닐까? 이 점이 이문열의 진심어린 과거가 담겨있단 점과 더불어 이 작품을 좋아하게 되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간디의 비폭력 운동은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톨스토이는 교회나 국가에 내재된 폭력성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독특한 것은 저항의 방법이 폭력을 동반한 자기 방어적 저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태복음 5:38~40)라는 구절을 중심으로 주요 신상수훈을 잘 지키며 사는 것으로 이상 사회가 펼쳐지리라 믿었다.
어떤 종교를 믿든 중간에 왜곡되거나 권위있는 자들의 해석에 따른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말씀을 직접 공부하며 마음에 새겨 충실히 살면 어떻게 세계에 폭력이 난무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생활에 그 말씀들을 녹여내어 묵묵히 실천하는 것뿐이다. 어떤 고난이 따를지라도 말이다. 책읽기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활자를 기계적으로 읽어 내는 일이 아니라, 책에서 얻은 내용을 바탕으로 삶에 녹여내는 것이다. 그것이 톨스토이가 나에게 준 교훈이다.
만엔 원년의 풋볼(스포있음)
장애아를 낳고 시설에 보낸 뒤 괴로워 하는 미쓰의 부부와 학생운동가로 사회를 규탄하다 전향하여 좌절하는 다카시의 이야기. 이들은 새 인생을 살기 위해 고향으로 떠나고, 이들의 인생은 만엔 원년의 농민 봉기를 주도한 증조부의 동생과 농민 봉기를 수습하는 증조부의 인생과 각각 비례한다.
본래 삶이란 처절함과 간절함이 있으면, 일반인의 기준에서 선뜻 이해가 안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 비합리성이 오히려 때론 내면의 진실을 강하게 보여주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다카시와 미쓰 부부 역시 마찬가지다. 다카시는 자기 처벌을 위해 자기가 과거 저질렀던 것이라 볼 수 있는 강간살인을 저지르고, 자기 처벌을 완수하며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미쓰 부인 역시 장애아를 낳고 시설에 버리자는 미쓰의 말에 순순히 따르던 과거를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다카시와 불륜을 저지르며 수동적 여성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주체적 여성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미쓰는 동생 다카시가 죽은 뒤에 봉기 실패 후 해외로 망명하여 쥐죽은 듯이 살았던 증조부의 동생이 사실은 골짜기 마을 고장에 숨어 살며 이전의 실패한 봉기와 달리 실리만을 챙기는 성공적 봉기를 이끈 주동자였단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과는 다른 유형의 인간들의 격정과 도취에 대해, 다카시와 자살한 자신의 친구의 진실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늘 지니고 있던 죽음으로의 지향을 버리고 이 이해를 통해 다시 한 번 살아보기로 다짐한다.
우리는 내면의 처절함과 간절함을 토대로 나 아닌 것에 대한 이해를 도모함으로써 우리는 종종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이지고 보이지 않던 세계가 비로소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되는 때가 있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 아닐까? 알아야만 사랑할 수 있고 아는 만큼 사랑한다. 그리고 알아야만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오에 옹 책도 읽어봐야 하는데 나중에라도 꼭 읽어봐야겠다. - dc App
읽으면서 재미도 재미지만 괜히 노문상 수상작가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음 츄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