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복수, 최초의 정의
"인생에서 분명한 사실이 있고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친 교훈이 있다면, 그건 누구나 죽일 수 있다는 겁니다."
<대부>에서 마이클 콜리오네가 자신의 정적을 암살할 때 말한 대사이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말이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살인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범죄 중 하나이자, 평온한 사회 질서를 한 순간에 공포로 깨트리는 혼돈의 잉태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살인은 인류 역사에서 매우 흔하고 가까운 일이었다. 여기서 가깝다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살인은 지금보다 자주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살인이 지금처럼 엄청난 금기도 아니었다. "정당한" 살인은 벤데타, 명예살인, 협객 등 인류 역사 곳곳에서 등장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풍습의 잔재가 남아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살인에 면죄부를 주는 것을 넘어서, 자신과 공동체의 명예를 위해서 마땅히 수행해야 하는 성스러운 의무가 되기도 했다. 공동체를 모욕하거나 공동체의 일원에 위해를 끼친 자에게 피로써 그 대가를 치르게 하는 행위는 국가라는 압도적 폭력 독점 집단이 나오기 전까지는 정의의 실현이었다.
이러한 "정당한" 살인 중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바로 자기의 부모 혹은 친척의 죽음에 대한 복수이다. 예기의 "불구대천"은 부모의 원수를 의미하는 말이며, 모든 복수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무거운 복수를 의미한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사람은 대부분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먼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혈연 집단은 모든 공동체 중에서도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이다. 그리고 이러한 혈연 집단 중 한 명을 죽이거나, 명예를 모욕했다면 응당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피가 피를 부르는 이러한 방식은 혈연 집단을 끈끈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혈연 집단을 포괄하는 더욱 더 큰 공동체를 만드는 데에는 장애가 있다. 이러한 씨족 집단을 넘어선 더 큰 정치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러한 살인의 정당화의 특권을 개인이나 혈연 집단으로부터 뺏어 올 필요가 있었다. 살인에 대한 정당화의 근거를 "복수"라는 직관적이고 감정적이며 개인적인 문제에서 "정의"라는 추상적이고 이성적이며 공동체적인 문제로 대체하는 과정이야말로 혈연 집단을 넘어선 더 거대한 정치체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살인의 정당화가 복수에서 정의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바로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나오는 복수의 여신인 에리니에스가 가진 살인의 특권이 정의의 여신인 아테나에게로 이전되는 오레스테스의 재판 과정이다.
2. 복수에서 정의로 : 에리니에스와 아테나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 여신을 모독한 것으로부터 시작된 아버지가 딸을 죽이고, 아내가 남편을 죽이며,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피비린내나는 비극적인 가문의 이야기는 그리스 비극의 단골 소재이다. 그리스 비극 3대 작가로 불리우는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모두 아가멤논 가문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소재로 희곡을 써냈다.
<자비로운 여신들>은 아이스퀼로스가 지은 오레스테이아 3부작 중 가장 마지막 편으로,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피로 점철된 가정사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가멤논은 아르테미스 여신의 분노를 사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쳐서 겨우 그 분노를 달랬다. 그러나 자신의 딸이 희생당했다는 것을 안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이를 알고 자신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아가멤논을 살해하고, 이를 알게 된 아가멤논의 딸 엘렉트라와 아들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살해한다. 그러나 이는 존속 살해를 극도로 혐오하는 복수의 여신인 에리니에스의 분노를 사게 되고, 이들의 공격으로부터 오레스테스를 보호하기 위해 아폴론과 아테네가 오레스테스의 죄에 대한 재판을 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오레스테스는 무죄를 받았고, 에리니에스는 복수의 여신이라는 이름 대신 자비로운 여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자비로운 여신들>은 이 중에서 오레스테스의 재판을 다루는 아이스퀼로스의 희곡이다.
이 재판은 얼핏 보기엔 아이스퀼로스의 살인이 정당한지에 대해 판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명분일 뿐, 그 본질은 닉스의 딸들이자 복수의 세 여신인 에리니에스가 상징하는 고대의 규율인 "피의 복수"와, 젊은 신 아테네와 아폴론이 상징하는 새로운 규율인 "법과 정의" 중 누가 살인의 정당성을 지니는 지에 대한 주도권 싸움이다.
"꿰뚫어 버리는 운명의 여신이 실을 자아내어 우리가 영원히 갖는 몫이 있으니, 악의로 친족을 살해하면 그들이 대지 아래로 내려갈 때까지 그들 발자국을 뒤따른다네. 그래서 죽더라도, 그자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리라."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가 믿는 단 한 가지 정의는 친족을 살해한 자는 응당 피의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레스테스의 죄는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죄보다 더욱 무겁다.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가멤논은 혈연 관계가 아니지만, 오레스테스와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혈연관계이기 때문이다. 마치 가이아가 자신의 혈육을 죽인 자신들의 남편을 자신의 자식들로 살해한 것 처럼,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혈연이었으며, 자신의 자식 외에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은 가이아처럼 에리니에스는 당연히 혈연이라는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믿고 있었다. 반면 그러한 가이아의 통치를 끝내고 확고한 신들의 왕이 된 제우스와 올림포스 신족은 혈연을 뛰어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이성의 신 아폴론과 지혜의 신 아테네는 세계의 근본적인 욕망과 감정으로 가득찬 고대의 신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이들은 혈연 집단을 넘어선 공동체 폴리스의 보호자였으며,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새 시대의 젊은 신들이었다.
그리고 이번 오레스테스의 재판은 욕망과 감정에 충실한 혈연 집단과,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폴리스들 사이에서 누가 살인에 대한 정당성을 잡느냐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살인에 대한 정당성을 개인과 혈연 집단의 복수심과 분노에 계속 맡겨도 좋은 것인지, 아니면 개인과 씨족 집단의 복수심과 분노를 넘어선 더욱 거대한 주체가 결정해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오레스테스의 살인이 정당한가라는 문제는 첨예한 대립의 과정을 거친다. 에리니에스는 그들의 행동의 정당성을 옛 신들에게서 찾는다. 에리니에스는 닉스의 딸이며, 그들의 임무는 운명의 세 여신인 모이라이에게 부여한 임무이다. 반면, 아폴론은 오레스테스의 살인의 정당성을 새로운 질서를 가져온 젊은 신들인 제우스와 헤라에게서 찾는다. 이들은 혈연을 대체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질서인 왕권과 결혼을 상징한다. 아폴론에게 있어서 왕과 지아비에게 충성하는 것은 어머니에게 충성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것보다 아내가 남편을 죽이는 것이 더 큰 죄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부모를 대체하는 더욱 강력한 권위의 등장을 알리며, 에리니에스는 이 재판에서 지게 되고 살인의 특권은 혈연 집단에서 폴리스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목숨의 대가는 그와 동등한 목숨이라는 단순한 살인의 논리는 더욱 복잡해지고 정교해졌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압도하는 새로운 권위가 만들어지고, 그리고 그 정점에는 제우스가 상징하는 "왕권"과, 아테네가 상징하는 "정의", 아폴론이 상징하는 "이성"이 있다. 이제 더 이상 살인은 분노라는 감정과 복수라는 직관적인 과정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권위보다 더욱 강한 권위가 등장하고, 욕망과 감정이 아닌 사법 시스템과 법이라는 더욱 엄격한 방식이 도입되었다. 복수의 세 여신은 이제 새롭게 등장한 신들에게 살인이라는 그들의 특권을 넘겨주었다.
이제 더 이상 살인은 개인이나 씨족 집단의 복수심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다. 씨족 집단은 더욱 강력한 권위인 폴리스와 국가에 의해 해체되었다. 이제 살인의 특권은 폴리스라는 정치체가 소유하게 되었으며, 국민 국가의 시대에 이르러 그 누구도 감히 국민 국가가 가진 살인이라는 특권을 다른 집단이 소유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3. 달라진 생명의 가치 : 아가멤논의 죽음과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죽음
에리니에스가 상징하는 혈연 중심의 복수는 아테네가 상징하는 법과 질서가 주관하는 형벌로 대체되었다. 폭력의 정당화의 근거는 개인과 씨족의 복수심이 아니라 공동체의 정의로 바뀌었다.혈연 중심으로 뭉쳐있는 씨족 집단에서, 폴리스가 탄생하고, 법과 질서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스에서 시작한 에리니에스에 대한 아테네의 승리와 "정의로운 살인"의 주관자로서의 폴리스의 등장은 로마 제국의 등장 이후 더욱 정교해지고 강력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폭력을 완전히 독점한 국민국가의 등장과 함께 더 이상 협객이니 벤데타니 하는 에리니에스의 잔재는 사라져버렸다. 마침내 젊은 신들이 에리니에스가 가지고 있던 살인의 특권을 완전히 가져온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보자. 젊은 신들은 주권을 차지한 뒤에 에리니에스가 가지고 있는 살인의 특권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살인의 특권 그 자체가 바로 주권이다. 에리니에스가 지배하는 세계는 벌거벗은 자연 상태의 생명, 정의와 법이 존재하지 않는 야생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모든 생명은 "평등"하고, 그렇기에 죽음은 죽음으로 대가를 치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젊은 신들의 등장과 함께 생명의 위계가 생기고, "죽어도 되는 존재"와 "죽으면 안되는 존재"가 나뉘어지며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등장했다. 이제 살인은 곳곳에 편재해있는 당연한 현상이 아니며, 주권 권력의 허락이 떨어져야지만 가능한 극도의 "예외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주권의 반대편에, 주권에 의해 살해되지도 않지만, 주권에 의해 보호받지도 않은, 법의 내부와 외부에 위치해있는 한 존재를 본다. 주권자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살인의 희생자이자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이다. 아테나와 아폴론, 그리고 제우스가 가지고 있는 주권 권력에 반대편에 위치한, 살해당했으나 보호받지 못하는 한 존재. 제우스에게 왕홀을 받은 아가멤논을 죽인 자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지만, 자신의 딸을 살해한 자를 죽인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죽인 자는 정의를 실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아테네의 법정은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정의의 희생양으로 살해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그의 죽음을 보호하지도 않았다. 바로 이 법정에서 주권은 살아 숨쉬고 먹고 움직이는 벌거벗은 생명(조에)을 공동체 내에서 의미를 지니는 생명(비오스)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들어난, 법의 바깥에 위치해있는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가 존재한다.
4. 근대 주권 권력의 본질 : 생명과 주권의 관계
그러나 이 지점에 와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과연 살인과 주권의 연관성은 아직도 유효한 것인가? 잔혹한 신체형이 사법의 상징이었던 시기는 계몽주의와 근대에 이르러 거의 사라지고, 지금은 사형조차 없는 시대가 아닌가. 프랑스 혁명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이후, 생명의 위계는 끝나고 모든 생명은 다시 평등해진 것이 아닌가?
얼핏 보기에 현대의 주권 권력은 생명의 위계를 결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주권 권력이 생명을 다루는 방식이 바뀐 것일 뿐,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살게 내버려 두고 죽게 하는" 기존의 주권 권력의 행사방식은 "죽게 내버려두고 살게 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바뀌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현대 생명정치권력의 본질을 본다. 현대의 주권 권력은 더 이상 "죽어도 되는 자"와 "죽으면 안 되는 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대신 주권 권력은 벌거벗은 생명 전체를 포획하고, 주권 권력의 범위를 벗어나서 생명을 유지하는 방식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이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권 권력 내에 있어야 하는 것이며,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모두 주권 권력의 범위 내에 속해 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제 "국민"이 되었으며, 주권 권력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국민을 생산해내며, 그들을 정치적 생명으로 길러내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를 뒤집어 말한다면 이제 주권 권력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생명을 잃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주권의 범위에서 배제되었지만,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는 존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난민들과 불법 체류자들은 살아 숨쉬지만 주권 권력 그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살아있고, 그렇기에 주권 권력에 범위 내에 속해있으나, 결고 주권 권력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때론 주권 권력이 직접적으로 이러한 존재를 만들기도 했다. 나치 독일 시기에 유대인이 그러했으며, 일본 군부는 총력전을 시사하며 국민들을 구하기 위해 전 국민을 희생시키기까지 했다. 주권 권력에서 배제되어 살아있지만 살아있을 수 없는 존재. 이들이 바로 호모 사케르이며, 현대의 클리타임네스트라이다. 현대의 주권 권력은 생명의 위계를 결정하는 예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살인과 주권 권력의 관계를 은폐하고 벌거벗은 생명과 죽음을 최대한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감추어 그 본질을 숨긴 것일 뿐, 주권 권력의 본질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죽어도 되는 자"와 "죽으면 안되는 자"라는 개념은 이제 "국민"과 "비국민"으로 변했고,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는 선은 평상시에는 모호해 보이지만, 국민의 생명이 위험해지는 "예외 상태"가 등장하는 순간, 그 무엇보다 잔혹한 선으로 변한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주권자가 등장해서 누가 비국민인지, 누가 호모 사케르인지 결정한다. 아가멤논과 클레타임네스트라의 죽음이라는 예외 상태에 아테나가 등장해 "죽어도 되는 자"와 "죽으면 안되는 자"를 결정한 것처럼, 주권자는 예외상태일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인생에서 분명한 사실이 있고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친 교훈이 있다면, 그건 누구나 죽일 수 있다는 겁니다."라는 말처럼,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했던 -그렇기에 똑같은 죽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갚을 수 없었던- 생명은 주권 권력의 등장으로 위계가 생겼다. 이것이 주권의 본질이다. 벌거벗은 생명인 '조에'를 정치적 생명인 '비오스'로 바꾸는 것이 바로 주권의 본질적인 역할이며, 바로 이러한 주권의 반대편에 이들에게서 완전히 배제될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포획되지도 않은 호모 사케르가 존재한다.
근대 생명 정치는 이러한 주권의 본질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더 나아가 살인이라는 권력의 본질 자체를 무대 밖으로 내보내고 언급 자체마저 봉쇄하는 방식으로 권력의 본질을 숨겼다. 그러나 파시즘, 난민 등 근대 국민 국가의 한계점이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아무리 근대 국민 국가가 살인의 잔혹함을 윤색하려 해도,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법 바깥의 세계, 혼돈의 잉태자인 살인이야말로, 인간 사회가 권력을 구성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오레스테이아 나름 재밌게 읽는다고 읽었는데 ㅋㅋㅋ 역시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들어봐야 감상의 폭이 느는구나 잘 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