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가부분 : 학살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을 통해 바라본 현시대의 악에 관하여 : 장애 유뮤를 놓고 바라본 사회적 차별과 배제의 문법 ]

뉴요커지를 통해 아이히만의 행동을 악의 평범성으로 규정했을 때, 일반 대중은 그의 논지에 격렬한 비판을 가했다. 이는 그가 아이히만의 행위를 미화할 뿐 아니라, 유대인 피해자들의 고통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는 아렌트의 주장을 완전히 오해한 것이었는데, 그는 되려 이스라엘 법정을 옹호했으며 그들과 똑같이 아이히만을 추악한 범죄자로 규정했다. 다만 그는 ‘악의 평범성’ 이론에 근거하여, 아이히만이라고 하는 평범한 사람과 그가 저지른 악행을 구분하려고 한 것 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이히만이 인류 역사에 다시 있어서는 안되는 범죄자로 전락한 것은 그가 본질적으로 악인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히만이 갖고 있던 진짜 문제는, 스스로의 행위가 초래할 결과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범죄 자체는 그의 동기가 아니었고, 스스로의 동기에서 벗어나는 일들에 관해 충분히 사유하지 않은 것이 그를 악인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히만이 타인의 의도에 따라 맹목적으로 끌려간 수동적 존재였던 것은 아니다. 스스로의 임무에관해서 그는 충분히 유능했고, 능동적이었다. 다만 그는 자신의 행위가 다른 층위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에대해 충분히 사유하지 않았다 .’악의 평범성’ 개념을 주창할 때, 아렌트가 주목한 것은 악의 주체가 가진 특이성이 아니었다. 또한 그것은 아이히만 본인이 특별히 어리석다는 의미도 될 수 없다. 그는 다만 스스로에게 부과된 의무에 충실했을따름이었고, 이는 재판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서도 본인에게 부과된 책임을 성실하게 수용한 태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일반 대중은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히만을 그가 저지른 범죄의 결과에 따라 절대적 악인으로 규정한다면 논쟁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관념, 혹은 문학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선인과 악인 중 어떤 범주에도 뚜렷하게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가 저지른 행위 자체의 결정 주체는 그 자신이었으므로그가 다만 거대 관료제 사회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오류이다. 형사 소송의 범죄에 관해, 그의 범죄를 넘어선인격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는 그가 저지른 행위의 동기를 개인의 특질로 규정하는 일에 만족하는 것으로, 인류 전체가 타파해야 할 거대 범죄의 본질을 호도할 우려를 낳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의 사례를 통해 인류가 당면한 악의 본질은, 행위의 주체인 개인에 관한 어떠한 본질적 특성과도 연관지을수 없다. 이는 그가 괴물적 악마성을 가진 개인이어서가 아니라, 우리 속의 어떠한 사람과도 같은 평범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건의 본질을 직면한다는 것은, 그러한 범죄가 아이히만이 아닌 또다른 개인을 통해서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악의 도래와 성장을 막는 유의미한 방편은 최악의 일을 벌이기이전에 충분히 사유하는 일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 보호 시설, 혹은 수용 시설은, 시설의 도움을 받는 장애인들의 복지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는 장애인이 사회 속에 녹아들어 충분히 동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뿐만 아니라,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고 차별이 고착되도록 기능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설 내 장애인에 관한 처우에있어서도 비인간적이며 폭력적인 대접이 자행된다는 증언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시설 자체의 존립 근거는 장애인 복지를 위한다는 명목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되려 그 울타리는 평범한 우리를 그들로부터 더욱 철저히 구분짓고 그들의 고통에 무심한 태도로 이어진다. 이는 특정 지역에 장애인 보호 시설이 건립된다는 예고가 등장할 때, 지역주민의 여론이 이를 막는 쪽으로 기우는 사례를 통해 증명된다.



장애인에게 비인간적인 대우를 자행하는 시설 내부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부족한 인력과 여건 탓에 통제적으로 대할 수 밖에 없다는 호소가 돌아온다. 장애인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았던 개인 역시 복지의 사각 시대에서 고군분투하는 개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시설의 존재 자체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의 동기 속에도 개개의 장애인을 핍박하거나배제할 용의가 없다. 다만 그들 역시, 시설의 등장과 함께 생활 반경이 편견과 가치 절하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 할 뿐이다. 장애를 둘러싼 국면에서 바라볼 때 그들은 분명히 기득권일 수 있지만, 그들 역시 스스로의 땀과 노력으로 이뤄낸 재산의가치를 지키고자 할 뿐인 평범한 개인에 불과하다.



마땅히 공존해야 할 장애인을 시설이라는 공간에 몰아넣음으로서 우리는 다만 우리 속에 특별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한 이들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만다. 어느 누구도 그 책임이 한 개인에게 있다고 질타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공동체의모든 구성원이 마땅한 책임에서 눈감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고통은 다만 개인의 몫이라는 각자도생적 사고방식과 연관짓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보호시설로 대변되는 한국 사회의 단면은 직접 피해자인 장애 당사자뿐 아니라, 언제고 똑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는 개인에게도 잠재적 불안감을 야기한다. 내가 눈감았던 타인의 고통이 나의 것이 되었을 때, 스스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회가 개인의 고통에 귀기울이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생각에 앞서, 사회 속의 개인과 개인에게 규정된 다양한 스펙트럼에 대해 충분히사유하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존엄할 권리를 갖는다는 인권의 명제를 생각할 때,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그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면 그 책임은 우리가 속한 사회의 몫이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개인의 의무는 다만 법을 준수하고, 노동을 비롯한 개인의 책임을 소극적으로 완수하는 것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한 개인이 입체적이며, 다층적 존재인 것처럼 사회는 상호 교류하며 발전하는 유기체적 성질을 띄고 있다. 따라서 우리 안에 놓여진 불완전한 포용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 나 아닌 존재를 인식하고 공감하는 사유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본인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