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무의 시대 



현대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무의미한 것으로 느껴지는 대허무의 시대다. 기존에 우리를 규율하던 모든 것들로부터 인간은 해방되었다. 인간은 드디어 무엇인가에 얽매이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누린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자유는 인간에게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비극을 맞게 하는 원인이 된다. 


현대는 행위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 행위에 가치를 매길 수 없다면 인간의 가치도 없어지는 것일까? 인간은 행위를 통해 가치를 정립하고 실현하기에 말이다. 인간의 가치가 모두 무너진 허무의 나루터에서도 인간은 망연자실하여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살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지닌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다. 허무의 세계 속에서 인간의 존재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인간의 가치는 누가 답변해줄 수 있을까? 신? 신은 이미 죽었다. 이 대지에 남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다. 우리는 “스스로 하고 싶은 것에 따라” 전통적 가치에서 벗어나 행동에서 잃어버린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그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만이 인류를 구원해줄 수 있다. 이제 구원은 인간의 몫으로 남는다. 


하지만, 새로운 인간의 가치의 정립은 너무나 피로하고 요원한 일이다. 누군가는 허무의 원인을 밝히고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일생을 쏟았고, 누군가는 허무의 늪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무의미란 비극과 부조리에 반항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으며, 누군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가치를 찾아 헤매며 삶을 게걸스럽게 핥아대며 춤을 추었다. 


허무를 극복하는 것,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란 인간에게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며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 것일까? 답이 보이지 않는 요원한 문제 속에서 내 눈은 피로 속에 스르르 감기고 감긴 눈은 다시 뜨기 어려웠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뜰 수 없는 그 때 희미한 한줄기 빛이 보였다. 그것은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 원년의 풋볼>이었다.




** 형제 



미츠사부로는 번역일을 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가장이지만, 그는 아이들의 이유를 알 수 없는 돌팔매질이란 폭력에 오른 눈을 잃는다. 미츠는 함몰되어 버린 그 눈으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 속은 어떠한 의미도 없이 텅 비어있다. 과연 그가 진정한 행복을 누렸던 적이 있었을까? 그는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한 채 그리고 아무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던 중 친구의 기이한 죽음을 마주한다. 빨간 페인트를 얼굴에 뒤집어쓴 채 항@문에 오이를 꽂은 채 목을 맨 기이한 죽음..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미츠의 동생 다카시 역시 학생운동에 전념하다 오히려 운동세력을 패준 경력이 있는 전향자다. 그 역시 미국에서 방황을 거듭한 끝에 귀국하게 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시코쿠에 위치한 산골짜기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며 형의 부부에게 함께 가자고 권유한다. 보호시설에 맡긴 자신의 장애앓는 아이, 친구의 기이한 죽음으로 뒤숭숭한 미츠도 그에 응한다. 뜨거운 감각이 되돌아오기를 ‘기대’라는 것이 다시 한 번 생겨나기를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 폭력의 계보



“업루티드라는 말을 미국에서 종종 들었어. 그래서 나 자신의 뿌리를 확인해보려고 골짜기에 돌아왔는데, 결국 내 뿌리는 이미 오래 전에 완전히 뽑혀 나가 나는 뿌리 없는 풀이라고 느끼기 시작했어. 나야말로 업루티드야. 나는 이제 여기서 새로운 뿌리를 만들어야 하고, 당연히 그에 걸맞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껴. 어떤 행동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저 행동이 필요하다는 예감만이 강해지거든. 아무튼 태어난 장소에 돌아왔다고 해서 그곳에 자신의 뿌리가 온전히 묻혀 있지는 않아. 감상적인 얘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풀의 집은 남아 있지 않았어, 형.”



미츠의 동생 다카는 마을에 들어와 ‘행동’의 필요성을 느끼며 마을에 뿌리내리고자 한다. 그리곤 스스로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골짜기 마을의 무생활성, 무기력을 보고 그들의 방향을 잡아줄 필요성을 느끼며 지도자 역할을 자처한다. 그의 롤모델은 조선인들과의 싸움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며 희생된 S형과 만엔 원년에 봉기를 이끌었던 증조부의 동생이였다. 다카가 가문 내 폭력적 성향을 지닌 선조들의 계보를 이으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도대체 어떤 유효성을 위해서 너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거냐, 다카?”


“어떤 유효성을 위해서냐고? 하하. 형은 친구가 목을 매고 죽었을 때, 그분이 무슨 유효성을 위해 죽었는가 하고 생각했어? 또, 형은 자신이 어떤 유효성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어? 골짜기 마을에서 새로운 형식의 봉기가 달성된다 하더라도 그 어떤 유효성도 없을지 몰라. 하지만 적어도 나는 증조부 동생의 정신을 가장 깊게 실감할 수 있을 거 아니야? 그건 내가 오랫동안 열망해온 일이지.” 



그것은 어떠한 의미도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오직 그것은 다카가 원하는 행위였다는 점이다. 그는 영웅적으로 보였던 두 선조들에게서 자신의 삶을 계속 지속해나갈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들의 삶을 선택한다. 


폭력의 계보는 사실 골짜기 사회를 억누르던 경제적, 사회적 폭력에 맞서야 할 강한 필요성과 당위성에 따라 이어져 내려 오는 것이였다. 바로 골짜기의 생존을 위해서. 그것은 골짜기 사람들이 폭력에 억눌리면서도 살아야만 한다는 삶의 의지의 발산을 위해서 누군가는 떠맡아야 할 중책이였다. 기존 세계의 가치는 허물어져야만 하는 때가 왔다. 그리고 그 때 영웅, 억압에서 해방시켜줄 위대한 가치의 전복자가 등장해야만 한다. 그것은 그들을 삶으로 이끄는 유일한 원동력이였고, 다카는 이 원동력을 자신의 삶의 의미로 삼는다. 


그리하여 다카는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마을의 경제를 파탄시키는 주범이자 모든 물류를 장악하고 있는 조선인 출신의 슈퍼마켓 천황의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약탈한다. 하지만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순 없었고 꽤나 엄격한 규율 속에서도 하나 둘 이탈자가 발생한다. 학생 운동을 하던 시절부터 그를 열렬히 따르던 추종자들마저도. 그의 폭력은 점점 인간성마저 잃어간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에 진상을 알 수 없는 사고가 발생한다. 




** 자살



마을을 하나로 이어줌과 동시에 고장의 지도자들의 혼령을 달래기 위한 염불춤이 끝나고 난 뒤 마을의 글래머 여인이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다카는 자신이 글래머 여인과 관계를 맺으려다 거부하자 화가 나 돌로 여자를 쳐 죽였다고 주장한다. 


다카는 마을 사람들에게 집단 린치 당해 죽을 것을, 죽음이 아니라면 사형을 당할 것을 은근히 기대한다. 하지만 미츠는 폭력을 두려워하는, 폭력에 의한 죽음을 누구보다 두려워하는 다카가 폭력으로 그녀를 살해했을 것이 아님을, 그저 우발적인 사고 끝에 자신을 처벌하고자 하는 광기가 다카를 휩싸고 다카는 오로지 그 욕망에 따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다카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발견해낸 것처럼 보였지만, 근본적으로 삶을 지속할 수 없는 치명적인 균열을 가지고 있었다. 그 균열의 진실은 바로 백치인 여동생을 유혹하여 밝은 미래를 제시하여 성관계를 맺었으나 불의의 임신 끝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외간 남자에게 강간당한 것처럼 위장시켰으며, 마음의 안정을 원하는 동생을 배반했다. 결국 그가 꾸며낸 미래는 거짓된 허황임을 깨달은 여동생은 자살했다. 



다카는 이 ‘진실’을 미츠에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마지막 마음의 구원을, 심적 위안을 얻기를 은근히 바란다. 하지만, 미츠는 그 구원을 거부한다. 미츠는 자신 몰래 가문의 토지와 집을 슈퍼마켓 천황에게 모두 팔아먹고 그 돈을 유용한 동생을, 자신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동생을, 혼자만 삶의 의미를 찾은 동생을,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만엔 원년의 농민 봉기를 일으킨 증조부의 동생과의 동화를 꿈꾸는 동생에 대한 몰이해와 질투심, 그리고 분노 끝에 구원을 거부하는 처벌을 내린다.


어딘가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놓고 연극을 하는 것이라고. 미츠는 증조부의 동생과 다카를 비겁한 도망자로 일치시키며, 동생은 또 다시 회피를 할거라며 자리를 뜬다.


다카는 미츠에게 버림받은 채 홀로 남는다. 그는 선택해야만 했다. 진실에 대한 철저한 책임을 지기로. 그리고 엽총으로 자신을 쏘아 세계에 그의 흔적을 없앤다. (어쩌면 <만엔 원년의 풋볼>의 다카시는 <개인적인 체험>의 책임을 지는 ‘버드’와 달리 평생 수치심을 안고 살아가는 ‘버드’의 다른 버전일지도 모르겠다.) 남은 것은 석류알처럼 흩어진 내장의 파편과 검붉은 피, 그리고 ‘나는 진실을 말했다’는 낙서뿐이였다.




** 우리의 재심은 곧 너의 심판이다!



슈퍼마켓 약탈 봉기 이후 골짜기 마을은 다시 안정을 찾는다. 슈퍼마켓 천황의 경제적 횡포는 이전보다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슈퍼마켓 천황은 매매계약에 따라 집안을 철거한다. 그 도중에 비밀스러운 생활 공간이 드러난다. 미츠는 깨닫는다. 증조부의 동생은 도망가 유신 때 고관을 지낸 것도 아님을, 망명하여 쥐죽은 듯이 고장과 연을 끊고 살아가는게 아니였음을. 증조부의 동생은 이 곳간채의 비밀공간에 거주하면서 마을과 연을 다하며, 형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만엔 원년의 봉기 이후 또 다른 폐번치현에 반대하는 마을의 봉기를 아무런 희생없이 원하는 것을 얻도록 능수능란하게 지도하였음을 깨닫는다. 


미츠는 드디어 증조부의 동생은 무분별한 폭력적 성향을 가진 인물로 봉기 끝에 동료들을 버리고 자신만 목숨을 구하여 허겁지겁 도망간 비겁자란 오해에서 벗어난다. 증조부의 동생은 자신의 소명을 다하였음을, 그리고 그 소명을 토대로 마을 공동체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음을 깨닫고 미츠는 증조부의 동생의 삶의 의미를, 그리고 그것을 따르고자 했던 다카의 삶의 의미를 다시 재심하기에 이른다. 그동안 자신이 잘못 판단해왔던 다카의 인생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동생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다카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었다.




고통의 총량을 내부에 꽉 닫아 넣어 바깥쪽에서 들여다봤을 때에는 조용하고 무표정했던 고양이의 눈. 그 고뇌를 자기만이 소유하고 타자에 대해서는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고 있던 고양이의 눈. 


그와 같은 눈을 하고 자신의 내부에 지옥을 견디고 있는 인간에 대한 상상력을 나는 가지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카시가 그와 같은 인간으로서 새로운 삶의 방도를 탐색하는 노력에도 시종 비판적이자 힘으로 그의 지옥을 극복한 것이다. 어둠 속에서 내가 관조하고 있는 오랜 친구였던 고양이의 눈은 다카시의 눈, 보지 못한 증조부 동생의 눈, 자두처럼 빨간 아내의 눈으로 이어지고, 그 눈들은 명료한 고리를 이뤄 나의 경험 속에서 확실한 것으로 정착하기 시작한다. 이 고리는 나머지 생애의 모든 시간에 걸쳐서 증식되어 이윽고 하나로 이어져 100가지에 이르는 눈이 내 경험 세계의 밤을 장식하는 별이 될 것이다. 그 별빛들에 노출되어 수치스러운 고통을 맛보면서, 나는 그저 한 개의 눈을 가지고 쥐새끼처럼 소심하게 불확실하고 어두컴컴한 외부 세계를 엿보면서 살아나간다......


“우리의 재심은 곧 너의 심판이다!”




** 다카가 남긴 유산



정녕 다카의 삶은 다카 자신의 말대로 의미가 없었던 것인가? 그가 남긴 것은 오직 ‘나는 진실을 말했다’는 낙서 뿐인가? 자신의 ‘진실’이란 자신만의 지옥 속에서도 지옥에 맞서 삶의 의미를 구하기 위해 분투했고, 자신의 삶의 의미에 따라 ‘행동’한 결과로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변화를 이끌어 낸다.


다카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훈련시킨 결과 아무 것도 할 줄 아는게 없었던 골짜기 마을 청년들은 슈퍼마켓 천황의 경제적 노예가 될 처지에서 벗어나 힘을 모으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을 의회의 구성원이 된다. 


아내 미쓰코는 남편 미츠의 말을 따라 미츠 부부가 낳은 장애아를 시설에 버리고 알콜에 몸을 맡긴 수동적 인생을 살며 자기 처벌의 욕구로 연명해왔다. 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아 스스로 선택하는 다카에게 배워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되며 그와의 관계를 스스로 결말지을 수 있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다시 거듭난다. 그리고 다카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낳기로 ‘선택’한다. 


미츠는 그간 세상의 모든 것과 유리되어 자신 외의 존재들을 타자로 두고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자기 자신을 성찰한다. 그리고 미츠는 아내 미쓰코의 권유 끝에 이혼 하는 대신 혼인 생활을 유지하여 다카의 아이를 낳고 보호시설에 맡긴 자신의 아이를 찾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생명이 약동하는 풀의 집을 찾기 위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다카가 염원하던 모든 것이 허물어져버린 동물원에서 코끼리를 기르기 위해 아프리카로 향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다카의 유산인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영원히 그를 둘러쌌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다카는 영원히 살아 숨쉰다. 




** 삶의 의미를 찾아서



<만엔 원년의 풋볼>의 기나긴 여정 후 나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았다. 



‘나의 삶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한 그 불만족은 불평으로 번진다. 


어떤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굳이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분주하게 사는데 나는 왜 겨우 책 따위를 뒤집어가며 삶의 의미를 찾아야만 하는 것일까? 제 아무리 모든 영역에 재능이 필요하다지만 삶의 의미를 찾는 것조차 선조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아야 하는 재능의 영역이란 것인가? 세상이란 더럽게 불공평하기 그지없다.


쌍욕과 탄식 속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나는 또 다시 피로감에 눈을 감는다. 그리고 멀쩡하게 달려 있지만 사실은 비어있는 나의 두 눈 언저리에서 주변인물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만엔 원년의 풋볼>의 미츠가 떠오른다. 


그러나 과연 이런 불만이 정당한 것인가? 아무 노력없이 삶의 의미를 찾은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이 정녕 아무런 고뇌나 처절함, 간절함 없이 어느 날 전지전능한 누군가가 또는 자기 스스로 삶의 의미가 번쩍하고 떠올라 오늘부터 너는 이렇게 살아라 하고 구체적인 지침을 줬단 말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 불만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불합리하다. 



그것은 오해다. 



이런 단상 속에 나는 또 다시 눈을 감고 피곤함에 고통을 호소하며 또 다른 생각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회피다. 나는 맞서야만 한다. 나는 맞서야만 한다. 눈을 뜨고 다시 생각해본다. 


과연 나의 평가는 정당한가? 그들은 삶의 의미를 타고난 것인가? 인정하기 싫지만 그것은 나의 오만하면서도 얄팍한 사고의 결과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폭력이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하나의 폭력을 범하고 있었다. 그 어떤 인생도 삶의 의미를 타고나진 않는다. 타고난다면 그 삶은 운명론적 관점에서 결정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 또는 남의 말에 따라 사는 꼭두각시일게다. 그들도 아무런 의미가 주어지지 않은 세계에 태어나 그들이 타고난, 겪고 있는 환경 속에서 치열한 고뇌의 결과로 자신들만의 삶의 의미를 잉태하고, 잉태 후에도 끊임없이 고뇌하며 신음한다. 그리고 시행착오 끝에 마참내 삶의 의미란 자신들만의 고유한 고뇌의 결과물을 출산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삶의 의미란 인생의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타인과 함께하는 사회 속에서 ‘행위’하고 관찰함으로써 조금씩 진실에 가까워지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행위의 주체인 서로를 알아감으로써 조금 더 조금 더 진실을 깨우친다. 타인을 이해함으로써 타인의 삶을, 그리고 그 삶의 의미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법을 배우고 평가할 수 있는 가치 기준을 만들어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창조해낼 수 있을 것이다. 즉 삶의 의미는 결국 사고를 거친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리고 행위의 공간인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며, 우리는 타인과 타인의 행위를 이해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체득해나갈 수 있다. 


나도 언젠간 반드시 나만의 삶의 의미를 찾고야 말리라. 하지만 그것은 미츠가 뜨거운 감각이 되돌아 오기만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알아야만 한다. 타인을. 그리고 그 삶의 의미를. 알아야만 오해 없이 타인을 이해할 수 있고, 알아야만 타인의 삶의 의미를 볼 수 있고, 알아야만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알아야만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복잡다단한 과정의 반복 속에서 언젠가 나만의 삶의 의미를 발견할 것이다.



말 그대로 알아야만 허무의 시대를 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만엔 원년의 풋볼>이 나에게 던지는 진짜 삶의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