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내가 진정 쓰고자 하는 글의 단순히 데모 버전, 즉 0.5ver에 불과하다는 점을 미리 알아 주었으면 함.
책, 특히 여기서는 "철학 책" 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게 가능할까?
먼저 "완전히 이해한다"는 게 무엇일까? 일단 그것을 "책 속의 모든 문장을 빠짐없이 이해했으며, 그 체계 또한 빠짐없이 이해하다" 라고 정의하자.
이때, 독서의 영역에서 봤을 때 "이해한다"는 것은 뭘까? 만약 우리가 자신이 읽은 내용을 (쉬운 말로 하든 어려운 말로 하든 그것은 상관없고) 말로 잘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글을 이해했다고 하기에는 힘들 것임.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독서에 있어서의) 이해"를 "그 내용을 명료하게 인식해 자신의 것으로 만듦"이라고 정의해보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어 분석 놀이가 아니니 이런 분석은 이쯤 하기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철학 책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가능할까? 여기서 내가 철학 책으로 범위를 한정하는 것은 철학의 학문적 성격 때문인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쓸 진짜 버전에서 써보겠음,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아니다"라고 생각함. 왜냐하면 우리가 읽어낼 그 "텍스트" 자체가 문제시될 수가 있거든.
이 갤의 어느 갤러가 예전에 쓴 댓글이 있었는데, 그 갤러는 이런 예시를 들었음. 어떤 번역자가 스피노자의 <에티카> 를 번역하며 읽다가 아무리 봐도 이상해서 본문 중의 어느 한 단어를 "이것은 스피노자가 잘못 썼다(오타다)"라고 생각하고 수정했는데, 이게 정말 오타인지 아니면 오타가 아닌지 아직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함.
또 조금 더 친근한 사례로는, 백종현 교수의 칸트 번역본들을 보면 백 교수가 주석으로 "이건 칸트가 착각하고 단어를 혼동해서 썼다"고 판단해서 고친 부분이 꽤 많음. 그리고 번역본 뿐만 아니라 많은 철학자들의 원어 전집에서도 단어 사용에서의 실수, 텍스트상의 문제에서 편집자마다 다른 견해들이 많이 보이지.
데카르트, 흄 등 비교적 쉽고 까마득하게 오래된 책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연구가 나오기도 하고.
이러한 것들에 비추어 볼 때, 철학 책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느냐? 나는 아니라고 생각함. 만일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텍스트"를 이해한 거지 그 저자의 사상을 완전히 이해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봄.
얼마 전에 싯다르타라는 소설책을 읽어봤는데 비슷한 말을 하더군요.
그 책은 주인공이 '부처'가 아닌 '싯다르타'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나오는데 그가 결국 '부처'와 서로 '반대되는 말'을 하면서도 그 중심내용은 같았다는 내용이었어요.
인간이 쓴 책에는 모순, 불명확성, 문제점, 보완해야할 점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완전한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없지 그러니까 완전히 이해하는 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은 잘못된 물음이라고 생각함
내가 말하려는 게 그거
환공과 바퀴제조인 아시는구나
에티카 1부 정리12 증명. 황태연(에드윈 컬리의 수정을 그대로 따름) 역. "즉, 그 부분들이 실체의 본성을 유지하지 않는 경우라면, 실체 전체는 동등한 부분들로 분할되어, 실체의 본성을 상실하고, 존재하기를 멈출 것인데, 이것은 (정리 7에 의해) 불합리하다.
실제 에티카에선 정리6을 지시함. 참고로, 정리 6 : 하나의 실체는 다른 실체로부터 산출될 수가 없다. 정리 7 : 실체의 본성에는 존재한다는 것이 속한다.
컬리의 결단은 굉장히 합리적인 판단이지만, 이 논의에 대해 스피노자가 자기-원인 이론을 독자적으로 개발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제시되어 있음.
나는 사실, 좀 이 논의에 많이 동의하지만, 부분적인 곳에 반론을 좀 제기하겠음. 나는 "저자"조차도 텍스트를 전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함. 존 롤스조차도 정의론 20주년 기념 서문에서 지금 나라면 똑같이 쓰진 않았을 거다... 고 했거든.
나는 정말 강한 논변(이라기엔 바르트나 푸코가 이미 주장했지만)을 하고 싶은데, 저자보다 텍스트가 더 앞서있다고 생각함. 저자 입장에서 그의 생각을 남길 수 있는 것은 오직 텍스트밖에 없고, 오직 텍스트로만이 저자의 사상의 기반이 될 수밖에 없다면, 어떤 사람의 뇌에 생각이 있다는 것과 다르게 글이 생각을 한다고, 글이 글을 쓴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는 거임.
하지만 나는 이 상황에서도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함. 이 이유는... 푸코의 "상당한 위험"을 많이 빌리겠음. 푸코는 내가 책을 읽을 때 저자가 외려 살아있다는 점에서 깜짝 놀란다고 함. 다들 죽은 줄 알았는데. 그리곤 이렇게 말함. 어쩌면 죽음의 반대말은 삶이기보다는 텍스트라고 해야 할 거 같다고. 텍스트가 생존을 대체했고, 텍스트가 삶 그 특유의 유한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고 했음...
생각해보면, 이해의 철학을 다루는 해석학의 역사는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2에서 나오는 것처럼, 원래는 낭만주의 역사학에 기초하고 있었기도 했음... 그 뒤에 딜타이가 나와서 정신과학의 유한성을 잘 보여준 해석학의 순환 개념을 꺼내게 되었고...
그렇다면, 텍스트가 사람을 대체한다면, 텍스트가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다시 말해, 텍스트가 어떻게 글을 쓰느냐? 또 다시 말해, 텍스트가 어떻게 다시 사람을 매개로 해서 그들로 하여금 글을 쓰게끔 "조종"하는가? 라는 정말 있을 법한 질문이 남음. 그리고 이건 진짜 엄청나게 형이상학적인 문제지만, 정작 모든 글쓰는 사람이 이 경험을 하고 있음. 다시 푸코의 "상당한 위험"에서 나오는 촌철살인인 명언을 보고 갈게.
"한 가지는 확신합니다. 나는 글쓰기라는 매우 거대한 임무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이런 임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주장이라면 굳이 대상을 철학책으로 한정할 이유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