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살인이 가르키는 것은 명확하다. 내 말은 뉴스에서, 혹은 우리 입에서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그런 상투적이게 일어나는 살인 말이다. 돈, 사고, 복수 등... 우리가 '욕망'이라 흔히 부르는 것들에 잠식되어 그런 짓을 한거라고. 어쩌면 우리는 조소가 섞인 위로나 질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한번 보도록하자, 어느 대학생이 한 노파를 죽였다. 수사는 진행 전이고 우리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에 집중하여 사건의 양상을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그에게 물어본다... 돈때문이었냐, 복수심때문이었냐, 정신질환에 의한 사고였냐. 그럼 그는 답할 것이다.
"나는 그저 '이'를 죽인 것뿐이라고."
그럼 우리는 뭐라할 건인가? 그저 "미친놈"이라고 한마디 던지고 끝낼 것인가? 물론 나도 그럴 것이다. 현실에서면 말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소설에서 발생한 픽션 아니던가? 우리 모두 뒤팽, 홈즈, 푸아로 등에 빙의해서 이 사건을 조사해보도록 하자. 참고로 조수는 베를린 대학에서 인기가 없어 한 학기만에 쫓겨난 인기없는 교수...
쇼펜하우어가 되시겠다.
1. 의지와 표상 그리고 욕망과 고통
의지와 표상은 간단하게 집고 가겠다. 표상은 우리가 인식 가능한 법칙, '시간과 공간' 같은 것으로 관계를 조건 짓는 것이다. 그러니까 '1시', '평야' 같은 것이다. 의지는 인식되지 않으며 앞에 법칙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지는 이 세상 전체며,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인식론의 방식으로 나누며 개별화 시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따지고 보면 하나인 '너'와 '나'는 전체적인 우주의 의지로 보면 하나나 다름없는(나누는 것이 의미없는) 것이 둘로 나눠진다는 것이다. 이 객관화된 의지를 '이념(idee)'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이념이라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우리는 의지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인식되지 않아 앞에서 말한 법칙에 지배당해 '삶에의 의지', 그러니까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로 투쟁하게된다. 그렇게 앞서 말했듯 우리는 인식을 표상적인 세계에 한정시킬 수밖에 없어 전체적인 의지가 아닌 부분적인 의지가 가지는 욕망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혀 끊임없이 괴롭다. 예를 들면 스포츠카를 사고싶은 욕망, 독갤 념글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 같은게 있겠다.
자, 이제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해 대강 알아봤으니,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 이 살인 사건을 분석해보도록하자.
그를 분석해나가며 우리는 어떻게 이 괴로움을 해결해야하는지도 차차 알아가게 될 것이다.
2.라스콜니코프의 실험, 그리고 오류
"나는 그냥 죽였어요. 나 자신, 나 한사람을 위해 죽인거예요."
누군가는 그가 권력, 그러니까 나폴레옹 같은 위풍당당한 이인지 알기 위해 추악한 노파. '이'를 죽였다고 그리고 자신이 '비범인'으로서의 권력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나중에 자백까지 하기에 작가가 이 이론을 비판한다고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 해석을 부정하며, 앞서 말했듯 쇼펜하우어와 함께 그를 분석하기로 했으니 그의 동기를 작품 내에 드러나는 그의 사상만으로 국한시켜 분석하진 않을 것이다.
일단 그의 사상을 보도록하자, 그는 이 세상 사람을 '범인'과 '비범인'으로 나누고 '비범인'은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범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괜찮다고 말한다. 그리고 '범인'은 그저 종의 종속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 말하지만, 이 사상의 모태가 된 책인 <카이사르의 역사>의 구절은 좀 다르다.
'때때로 나타나 환한 횃불처럼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미래를 밝히는 비범한 존재들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그들 뒤를 추종하고자하는 이는 행복하다'
여기서 '범인'이 행복을 누리는 방법은 앞서 말한 나폴레옹같은 '비범인'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고한다. 그럼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인생의 해결책에 대해 들어보자.
쇼펜하우어는 광기를 가진 예술가적 천재의 관심, 의욕, 목적을 배제한 '순수한 직관'이 '이념'을 포착할 수 있다고한다(물론 이게 욕망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그 천재의 예술작품으로 세계가 한 의지임을 깨닫고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한다. 이를 라스콜니코프의 이론에 대입시킨다면 '비범인'은 광기를 가진 예술가적 천재, '범인'은 관중들이 되겠다.
라스콜니코프는 괴롭다. 방세도 밀린 칙칙한 방에 자신을 믿는 여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악한 노파... 생각해보자. 그는 돈, 사람들의 기대 같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를 옥죄는 고통의 근원인 '욕망'에서 해방되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노파의 머리를 쪼갠다. 그것도 두 명이나.
"자유, 자유! 그는 이제야 그 주문, 그 마술과 마력, 그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렇게, 책에 서술에 따라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의지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보자. 그럼에도 그는 실패했다.
"정말로, 참으로 시작된 것일까? 징벌의 시간이 도래한 것일까?"
쇼펜하우어의 이야기는 아직 안끝났다. 그렇다, 결국 그는 '비범인'으로서 '직관'이 아닌 작품을 '관조'한 관중에 불과한 것이었다(만약 그가 본 '작품'이 무엇이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게 현실이 아니라 픽션인 소설에서 일어났으므로 도스토옙스키의 정신이 그가 관조한 '작품'이라 생각된다). 결국 그는 권태에 빠지며 방황하다가 자신의 입으로 그 욕망에 걸맞은 고통의 구렁텅이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바로 제가 그때 고리대금업자 노파와 그의 여동생 리자베타를 도끼로 살해하고 돈을 훔친 사람입니다."
3.성스러운 예술가인 여인
그럼 그의 사상은 틀린 것일까? 아니다. 그의 애인, 소냐가 있다. 그녀는 구제불능 주정뱅이인 아버지에게 헌신했으며, 새어머니의 구박에 그녀는 몸을 팔아 이전에 일해서 얻은 돈보다 더 큰돈을 그녀에게 안겨주었고. 그녀는 감동해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 행동에는 일말의 욕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그녀의 희생뿐이다. 또한 라스콜니코프가 시베리아에서 노역을 할때 꼬박꼬박 그를 찾아가 다른 인부들의 옷을 꿰매는 일도 하고 그의 간병까지 봐주었다. 그녀의 헌신이, 그 순수한 생각이 모두에게 비춰지고 이는 '관조'의 영역으로 그들을 잠시나마 안정에 빠질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녀는 라스콜니코프를 변화시켜. 어쩌면 그또한 욕망을 내려놓고 삶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한 줄기 길을 그에게 비춰주었다.
"그녀의 신념이 이제 나의 신념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적어도 그녀의 감정, 그녀의 갈망은....."
4.에필로그
쇼펜하우어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도 아닌지라. 어쩌면 잘못된 부분이나 제 뇌피셜을 넣어 아리송한 부분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이 부족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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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콜니코프 = 이재명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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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나는 '관조'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욕망을 벗어나 헌신하는 소냐를 보고 자신도 욕망에서의 해방이 삶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느꼈다고 봄(불교의 열반 생각하면 편함).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