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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야 해서 짧게 줄이느라 좀 뭉개짐

나중에 따로 글을 써보고 싶긴 한데 그리 호응 받을 것 같진 않은 내용


요즘 음악을 듣는 게 예전 같지 않다. 물론 음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음악을 접하는 데에 있어 그리 기대감이 생기지 않는다. 아마 이건 최근의 대중음악 트렌드가 내 취향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여기에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지금은 이미 우습게 되어버린 힙스터라는 이름과 그들이 믿던 어떤 우월한 예술이라는 기획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고, 인디락이 그들에게 팔았던 허술한 사기와 그것이 그리 근거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느끼면서도 최대한 이 문법 속에서 그것을 믿어보고자 했던 소비자 사이의 짜고 치는 연극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다. 그러나 거짓 아래에서 분명 무언가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느낌을 받으며, 이것이 과연 우열의 문제일까 궁금해하는 사람의 의문이 해소되지는 않은 시대기도 하다. 그 부분에서 시작해보자.



뉴트럴 밀크 호텔, 아케이드 파이어, 애니멀 콜렉티브, 페이브먼트, 빌트 투 스필. 대략 생각나는 이 명단을 읽으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짐작이 된다면 당신은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일 테다. 이들의 음악이 '좋다'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상정하며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이들의 정서도, 스타일도 그리 비슷하지 않고, 어느 쪽은 '실험적'일 때 어느 쪽은 담담하다. 누군가는 이것이 '락'이라는 장르에 있는 비슷한 음악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과연 그것이 다른 대중음악 장르와 이들 사이의 음악적 차이점보다 이들끼리의 차이점을 더 작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지도 모르겠고, 이 락의 이름에 뭉쳐진 온갖 노력을 생각하면 그 주장은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보다 주장을 지지할 근거가 더 필요한 뒤엎는 주장에 가깝다.



사실, 이 '락'이라는 이름에 묶이는 음악이 그리 다양하고 뛰어나 이런 관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그 전에도 로키즘rockism이라는 이름으로 몇 차례 비판 받거나 도전받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락이 더 좋은 음악을 하고자 하며 대중음악 위에 예술을 세우려고 한다는 태도를 지적하며, 그저 음악으로서의 팝을 대안으로 제시했고, 락이 자신들의 편협한 구성과 전제들을 가리며 실제 이상의 광고를 한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노력은 당시에는 그리 '락'의 예술적 가치를 흔들지 못했던 반면, 2020년대 지금은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더 뛰어나질 음악인 락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팝티미스틱poptimistic한 시대에 대중음악은 다시 그냥 음악으로 돌아갔으며, 예술의 자리는...... 글쎄, 메말라가는 클래식과 재즈에게도 사실 그 자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위해서는 결국 예술이라는 것이 원래도 얼마나 근거가 허술한 기획이었는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기예가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를 드러내는 예술은 우리의 현실 너머를 직시하거나, 현실의 다른 방식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실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형이상학적인 기획이다. 헤겔의 낭만적 예술은 칸트의 예술론을 계승 받아 고치며 이후의 "예술"이라고 할 만한 것을 세우고, 고르며, 숭배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 정전 속에서 영화, 대중음악 등이 자신 역시 그 예술의 정전 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분투하곤 했다. (사실 지금도 게임 업계는 여전히 이 시대착오적인 기획에서 아둥바둥대고 있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근대의 기획들이 현대적인 감수성에서는 철저한 무근거에 가까우며, 예술의 정전 속에 발을 들이미는 것은 동시에 예술의 몰락-시민들의 교양, MD로 판매되는 상품을 위한 희석-과 동일한 과정 속에 들어가는 시도이기도 하다.



대중음악에서 그 시도는 피치포크와 분리할 수 없다. 와이어와 같이 실험 음악으로서의 재즈를 다루던 잡지들이 음악적 구성에서 어떤 진보를-캔터베리 씬이 그렇듯, 정치적이기도 한-찾던 것과는 달리, 피치포크가 주장하던 음악의 우월은 뭐랄까, 무근거에 가깝다. 대중적인 것은 별로고, 비주류인 것은 좋다. 비주류인 것이 전부 좋은 것은 아니고, 대중적인 것도 전부 별로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기준은 평론마다 엇갈리기도 하며, 기실 기준이 없을 때도 종종 있다. 들어보면 안다, 라는 것이 이 무근거의 이유이기도 했지만, 피치포크 차일드라고 불릴 청취자들에게 그것은 정말로 충분한 이유였다. 들으며 취향이 변한 것일지, 취향이 원래부터 그랬던 것일지, 아니면 그 이상의 정말로, 피치포크조차 표현할 수 없었던 아우라라는 것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나는 마지막을 믿고 싶지만 그러기 어렵다)



<익사한>의 시작을 알리는 <힙스터리즘> 비평 연작은 바로 이 시대적 상황과 기대의 좌절을 설명한다. <힙스터리즘>에서는 짐 오루크를 피치포크와 함께 내세우며 이 '사기극'의 주역으로 꼽는데, 다른 유명한 실험 음악가들과 비교해보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존 존이 왜 짐 오루크와 다른가? 존 존은 그 다양한 음악적 실험과 뛰어난 솜씨와는 별개로, 그의 기예는 어디까지나 힙스터리즘 이전의 것, 재즈에서의 비르투오소에 가까운 것에 가깝다. 그가 음악을 대하는 자세에는, <네이키드 시티>와 같은 잡탕 음악들에서조차, 여전히 전통적으로 좋은 음악이라고 할 만한 것의 연장선상에 자신의 음악을 놓는 난폭한 겸허함이 담겨 있다. 짐 오루크는 그렇지 않다. 그는 다른 계보를 따른다. 투박한 인디 음악의 '진실성'이다.



커트 코베인은 자신의 죽음으로 진실성을 증명했다. 유명하고 위대한 것은 결코 진실될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한 진리이며, 메이저의 화장과 스포트라이트에 냉소를 보이며 약간 우스꽝스럽게 보일 정도로 진실된 태도에 집착하며 가식적pretentious이지 않은 다니엘 존스턴, 잔덱 등의 음악가들의 미학을 주장했다. 그 태도는 나름대로 가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진실성'에 대한 이야기는 그러나 인디락이 자신의 음악적 저변을 넓히기 위해 이용해 먹었던 전세계의 음악을 배제한다. 다양한 세계의 음악들에 접근할 수 있게 된 90-00년대 대중음악은 자신의 진정성을 결코 대중적이지 않은 실험성, 다양성에서 찾았되, 그것은 사실 심해에서 끌어 올려진 블로브피쉬의 생경함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A 나라의 음악에 관심도 없고 들어볼 일도 없었을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A국의 전통음악적 터치, 비트 등은 말 그대로 새로운 것이었지만, 이 새로움은 그저 맥락에 의존하는 새로움이었을지도 모른다.



<힙스터리즘>은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의 서두에 던져진 질문, 왜 그런 기대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로키즘에 대한 비판이 힘을 잃은 지금에야 정말로 그런 태도 자체가 우스워졌는지를 설명한다. 더 이상 이 해외의 타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라틴팝과 트랩은 그 전통음악의 계보에서 현대 대중음악과 만나는 그들의 대중음악을 선보이고, 이것은 '우리'에게 전혀 새롭지도 흥미롭지도 않다. 생각해보라, 한 세트에 몇십 만원이 넘어가는 고급 몽블랑에서 바밤바의 맛이 나는 세상을. 대체 누가 그딴 밤 디저트를 먹을까? 짐 오루크가 제시하는 메타팝 앨범 <Insignificance>에서 들리는 가스펠은 챈스 더 래퍼로 이어진다. 후자를 듣는 게 싫지는 않지만, 챈스 더 래퍼의 신보를 찾아듣고 싶지는 않다. 그 정도의 차이일 테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 인디락 사기꾼들이 우리 모두 함께 사기 속에 들어가도록 권유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