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출간년도가 1908년이네..
슈바이처가 60년대까지 살았으니까 뭐 50년대 쯤에 쓴 책일줄 잠작했는데...100년 전은 너무 먼데...
클래식음악은 실전된게 많아서 현대에 굉장히 많은 연구, 복원이 이루어져서 지금 우리가 아는 형태가 된것임...거의 남용에 가까울정도로 사회 이곳저곳에서 사용된 유명한 음악들이, 사실은 그렇게 유명해지거나 걸작으로 인정받은지 얼마 안된 곡인 경우가 꽤 있음. 예를들어 파헬벨의 캐논이 재발견된건 1919년이고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건 1970년부터임...우리는 어릴때부터 다양한 경로로 클래식 음악을 접하고 막연하게(어찌보면 당연하게) 그것이 아주 오래된 전통으로 탄생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끊김 없이 전승되고 연주되었을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것임. 말하자면 만들어진 전통이랄까? 홉스봄의 개념은 의도적으로 창조된 전통을 말하는거니까 이 경우에는 착각된 전통이라 해야할까...사실 이것도 심리학적으로 그리고 미학적으로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라고 봄. 클래식 음악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들을 통해서 그것이 상당한 과거와 역사를 가지고 있을것이라고 휴리스틱 하는것은 비합리적이지 않음. 우리는 적은 정보를 토대로 '그 너머'에 있는 세계의 크기를 짐작하려는 경향이 있음. 이게 예술이나 인문학의 많은 영역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다고 봄....얘기가 샜는데, 그래서 클래식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현재진행중인 예술이란것임. 이건 클래식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수 있다 같은 '지금도 통한다' 식의 가치변론이 아님. 정말 문자 그대로의 현재진행형 예술이란거야. 왜냐면 클래식은 두가지 중요한 차별화된 특성을 가지고 있거든. 첫째는 대량생산된다음 잊혀진단거고, 두번째는 음악이 악보의 형태로 변환되어 창조되기 때문에 다시 음악으로 환원하려면 반드시 연주가 필요하다는점임. 그런데 연주라는건 단지 기계적으로 악보의 지시를 따르는 기술적인 작업이 절대로 아님. 연주는 반드시 해석을 포함함. 이 해석이란것은, 음악을 잘 모르는 이에게는 부수적인것으로 인식될수도 있을것임. 그러니까 정통, 정석, 기본이 존재하고, 해석이란것은 거기다가 약간의 변화를 주는것이란 식으로.
그렇지 않아. 클래식음악은 소리 자체가 아니라 악보의 형태로만 남았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음악으로 구현한다는것은 그 자체가 창조행위임. 어떻게 보면 텍스트의 영상화랑도 관련이 있지. 너무 문학에만 몰두한 사람들은 종종 영상화가 텍스트라는 본질에대한 비루한 복제시도라고(또는 다양하게 해석되고 상상될수 있는 텍스트의 다층성 다의미성 다해석가능성을 무화하고 하나의 형태로 고정해버리는 저차원적인 행위라고) 생각하는듯 한데, 따지고보면 사실 텍스트가 인간의 영상적인 시각경험과 상상에대한 비루한 복제지. 영상화는 그 복제를 다시 '살아있는' 원본으로 되돌린단 점에서 복위와도 같음. (물론 글만의 미학과 장점도 분명 존재한다는건 인정함.)
아무튼 그래서 악보와 연주의 관계는 지시내리는 고고한 정신의 예술가와 그에 순종족으로 따르는 육체적 기술자의 관계로 보아선 절대 안되는것임. 어쩌면 작곡자가 생각한 음악보다 오늘날의 연주자들이 해석하여 내놓은 음악이 더 고차원적일수도 있음. 이게 결코 과대해석이 아닌게..그 시대에 가능했던 연주기법만을 사용해서 최대한 작곡자의 의도를 그대로 구현한다는 목표로 연주하는 사조인 시대연주 스타일의 연주자들이 바로크 음악을 연주하는걸 보면 굉장히 심심하고 재미가 없고 복잡 다층적이지 않은 느낌이다(전부 그렇다는건 아님)...일단 그 시대에는 피아노가 없었기 때문에 각각의 음표가 서로 다른 강도로 연주되는것도 불가능했음..때문에 이 시절 음악은 모든 음표가 같은 강도로 소리를 내는..비유하자면 자페인의 언어와도 같이 강약이나 운율이 결여되어있는 기계적이고 단조로운 것의 느낌을 줌...(다시한번 말하지만 전부 그렇다는건 아님..) 구현할 기술이 제한될때 정신의 창조는 그 제한의 영향을 받을까? 항상은 그리고 절대적은 아니겠지만, 영향이 아예 없다고도 할수 없겠지. 어쩌면 바로크 음악가들이 창조해내고 그들의 내면에서 노래된 음악은 우리가 상상하는것보다 훨씬 심심하고 단조롭고 저차원적일지도 몰라. 그걸 복잡하고 풍부하고 고차원적으로 재창조한것은 후대의 연주자들임. 애초에 그들은 작곡자의 허밍조차 들어본적이 없음. 단지 오래된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고악보를 읽고 그 기호 체계에 소리라는 생명을 불어넣어 음악으로 완성한것뿐임.
결국 내 의문은 이렇다.
바흐의 첼로협주곡은 잊혀졌었고, 파블로 카잘스가 재발견하고 연주한것은 1936년.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글렌 굴드가 피아노로(피아노 연주 자체는 그 전에도 있었지만) 현대적으로 재해석한것은 1955년.
이 현재진행형의 살아있는 예술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을 100년 전의 연구자는 얼마나 잘 포착할수 있었는가?
얼마나 많은 데이터가 있었나? 물론 편지, 일기, 악보, 구전, 수많은 데이터가 있었겠지. 전문 연구자로서 내가 아는것 따위와는 비교할수 없을정도로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었겠지.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작품목록에 첼로협주곡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바흐를 상상할수가 없음. 또 굴드가 재해석한 골드베르크를 듣지 않고는 바흐를 이해하는것 역시도.
정말로 1905년의 슈바이처는 바흐란 거인의 모든 면면을 포착하고 있었는가? 참 바흐를 이해했는가?
물론 뭐..아니라면 아닌대로, 그 시점의 인류가 이해한 바흐와 오늘날의 우리가 이해한 바흐를 비교해 보는것도 재미있는 일이겠지만...역시 1000페이지가 넘어가는 벽돌을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 식으로 시도하는것은 쉬운일이 아니니까..
첼로협주곡이 아니라 첼로모음곡아님?
ㅇㅇ맞음
슈바이처의 바흐 전기가 가지는 업적은 19세기 말~20세기 초 다시금 잊혀져 가는 바흐 음악의 부흥이라고 함. 멘델스존과 포르켈이 바흐를 복권시킨 후에도 여전히 대중에게는 낯설고 희귀한 음악이었는데, 이런 바흐를 대중엑 알리는 데 많은 기여를 했대.
그럼에도 슈바이처의 바흐 전기에서 현재까지 유효한 부분은 바흐의 미학을 다루는 19~23장이라고 하네. 진성 바그네리안 슈바이처가 그간 순수음악에 틀에 갇힌 바흐를 ‘회화적 음악’으로서 조명하는 부분임. 현대 바흐 전기로 가장 유명한 크리스토프 볼프도 이런 기여를 언급하더라.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대해서도 가장 현대 건반양식에 근접하며, 후반부 29, 30 변주곡에 대해서는 모르고 들으면 베토벤의 작품이라고 느낄 수 있다고 평함. 물론 카이저링크 백작 일화를 설명하는 등 시대적 한계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생각보다 앞선 시각을 보여줘서 재믺는 부분도 많음
흠 흠 굿 근데 우리나라에 번역된 바흐 전기/평전은 이게 유일함??
가장 정석은 크리스토프 볼프가 쓴 ‘요한 세바스찬 바흐‘인데 절판이라 도서관에서 찾아봐야 할 거. 최근에 나온 건 존 엘리엇 가디너가 쓴 ‘바흐: 천상의 음악’도 있음. 이건 한 인간으로서의 바흐에 초점을 맞추고, 새롭게 발굴된 바흐의 면모나 일화들을 소개하는 재미가 있음. 다만 번역이 참 아쉬운 편…
전기는 아니지만 흥미로운 책들은 스즈키 히데미가 쓴 ‘J.S.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이건 첼로모음곡 작품론임. 연주 방법에 관심이 많다면 읽을 만함. 가격이 너무 사악하긴 하지만ㅠ 비슷하게 이소야마 타다시의 ‘마태수난곡’도 있음.
와 가디너가 내가아는 그 가디너인가
ㅇㅇ 그 가디너 맞음. 본인 칸타타 사이클 녹음했던 썰도 길게 풀고 지휘자로서의 시각도 보여서 꽤 재밌음. 근데 전기로 봤을 때는 역시 볼프가 가장 적당한 선택일 듯
ㄳㄳ그거부터읽어봐야겟다
나는 굴드로만 들어서 이제 그 스타일이 아니면 너무 어색하고 괜히 낭만주의적으로 해석하는것 처럼 들림
나도 굴드를 거의 제일 좋아해. 아마도...음 하나 하나의 소리가 명료하고 덜 감상적인게 좋음. 그래야만 바흐의 음악에 있는 논리성, 구조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고 봄. 그러나 그렇다고 너무 기계적이어서는 안됨. 간결하고 깔끔하고 명료하면서도 동시에 최소한의 인간적인 따뜻함은 가지고 있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