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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중반 정도까지의 미국 소설을 읽다보면 뭔가 공통점이 느껴지곤 한다. 힙스터 리버럴적인 감수성으로 사회 운동가나 비평가의 이름을 일종의 개념적 고유명사처럼 남발하는 것이라든가 약간 발작적일 정도로 자기가 어떻게 보일지를 신경 쓰며 바로 그런 자세를 글에다 최대한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쓰는 그런 자세. 전자의 스타일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일전에 읽은 <Eeeee 사랑하고 싶다>가 나올 테고, 후자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DFW의 글들이 나올 테다.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00년대의 절판된 미국 소설들을 볼 때면 아마도 이런 스타일이 당시에 한국에서 그리 인기를 끌진 못했을 게 뻔하기도 하다.



여기서 화자와 저자를 어느 정도까지 동일시 하느냐의 문제는 화자가 소설의 화자이느냐 에세이의 화자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에세이의 화자가 저자와 동일시 되는 것과는 달리 소설의 화자는, 대체로 그렇지 않다. 물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나의 투쟁>(히틀러의 글이 아니다) 같은 유명한 반례들이 있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이야기. 만약 소설의 화자가 저자 본인일지라도, 그 화자의 말하기 방식은 소설의 화자가 말하는 방식이지, 에세이의 화자가 말하는 방식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의 화자가 내가 이 글을 쓰고 있으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나'의 관점이 아니라 정말로 저자의 관점에서 쓰고 있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건 이상하니까.



그렇지만 이런 경계는 무너질 때면 댐이 무너지는 것처럼 뭔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불편한 기분과 동시에,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기대감을 준다. <비틀거리는>은 바로 이 00년대 미국 소설의 느낌에서 소설과 에세이를 무너뜨리는 글로, 별 생각 없이 <비틀거리는>의 초반부를 읽어나가던 독자는 중간쯤부터 뭔가 이상해지는 느낌에 당혹스러워 한다. 부모의 불운한 죽음을 딛고 어린 동생과 함께 가정을 꾸려나가는 화자의 억지로 쾌활한 척하는 이야기는, 점차 억지스러운 쾌활조차도 보여주지 않는다. 어린 동생의 입을 빌려서 호출되는 화자의 '보여주기식' 서술과는 따로 노는 화자의 강박성과 선인인 척하고 싶어 하는 도덕적 결벽증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독자를 얼떨떨하게 만들었다가, 그것이 다시 이야기 속으로 쑥, 숨어 버리면 불편함의 원인이 안 보이게 되었음에도 오히려 더 불편해진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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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네이버 웹툰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던 만화, <미쳐 날뛰는 생활툰>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면 좋을 듯하다. <미쳐>는 자신의 일상을 만화로 그리는 '생활툰'을 그리는 만화가에 대한 이야기로, 자신의 소소한 일상사의 재미를 포착해 만화를 그려나가다, 점차 자신이 만화로 그릴 수 있는 자신만의 사생활의 한계와, 애초에 그려낼 가치가 있는 자신의 일상을 찾을 수 없다는 고갈 앞에서 미쳐가기 시작한다. 같은 일이라도 그 일에 연루된 지인에게는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무언가를 담고 있을 수도 있고, 연재일은 가까워져가지만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갈 수도 있다. 어느 정도의 부풀리기는 필수적인 거지, 하고 생각하며 조금씩 일상을 지어내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자신이 그리는 일상의 주체가 대체 누구인지 고민하고, 그 주체와 자신 사이의 불일치가 정작 주체의 일관성을 망치며 생활툰 자체가 어그러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문제는 자신의 일상을 관심 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팔 때 생기는 일이다. 관심을 화폐로 삼는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일상이 그 자체로는 너무나 지루하고 흘깃 볼 만한 가치도 없는 일들의 연속임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창작 활동은 마치 사진처럼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해내, 이를 가공해 새로운 것의 재료로 삼는 데에 만족한다. 롱 테이크로 담아내는 일상은 끔찍하다. <비틀거리는>의 화자는 그것을 잘 알고 있지만, 억지로 이를 부정해야만 한다. 그의 상처 입은 현실과 보상 심리는, 자신의 이 고통스러운 삶이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대가를 받아야만 한다고 느끼면서도, 사실은 결코 그리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비틀거리는>을 쓰며 대사를 조금씩 바꿔나가고, 전체적인 삶을 윤색하고, 통렬한 비판과 선량한 주인공을 덧씌우다가......



"그럼 얘기 좀 해보세요. 여기 실린 내용은 실제 인터뷰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게 아니죠. 그렇죠?


네.



(...)



내 고통에 보상해주세요.



네?


충분히 해줬잖아요. 보상해주세요. 나를 TV에 출연시켜주세요. 이 이야기를 수백만 명과 공유하게 해주세요. (...) 내 이야기가 충분히 슬프지 않았나요?"



그는 자신에게 관심을 줘야만 한다고 믿는 이들을 증오한다. 결코 불운을 겪지 않고 무난하게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소설 속에서 배제하고 최대한 불운한 이들을 일화 속에 연결시키며, 자신은 결코 특수할 정도로 불행한 삶을 산 이가 아니라고 내적으로 주장하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그런 자신이 관심을 받을 만큼 불행하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하는 모순적인 상태에 놓인다. 이런 병적인 반응 앞에서 우리는 과연, 바로 그 관심을 주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딱히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을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미쳐>는 이 문제를 생활툰이라는 것 하나에 한정지음으로서 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녀는 더 이상 생활툰을 그리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비틀거리는>의 문제는 결국, 부모의 상실과 빈곤, 비정상성이라는 별개의 원인에 있다. 이 글은 멈춰질 수 없다. 그리 된다고 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틀거리는>은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사실 난 그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