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인 신, 긍정하는 신인 디오니소스는 우월하고 초-인격적인 쾌락 속에서 고통을 <해소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고통을 긍정하며, 그 고통을 누군가의 쾌락으로 만든다. 그래서 디오니소스 자신은 원초적 존재로 귀착되거나 원초적 기초 속에서 다수를 소멸시키기보다 다수의 긍정으로 스스로 변신한다. (39)
디오니소스에게서 삶은 정당화될 필요가 없다. 그에게서 삶은 본질적으로 정의로운 그런 신이다.
그것이 고통을 내재화할 때, 그것을 해소하지는 않으며, 자신의 외재성의 요소 속애서 그것을 긍정한다. (44)
디오니소스의 관점에서, <현존은 더욱이 엄청난 고통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할 만큼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45)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화해보다 더 고귀한 어떤 것>, 즉 긍정을 소리친다. (46)
디오니소스와 예수 혹은 차라투스트라와 예수 사이의대립은 변증법적 대립이 아니라, 변증법 그 자체와의 대립이다. 즉 변증법적 부정에 반대하고, 모든 허무주의에 반대하며, 또 허무주의의 그 특별한 형태에 반대하는 미분적인 긍정인 것이다. (46)
다수의 긍정이나 복수의 긍정은 바로 비극의 본질이다. (...) 비극을 정의하자면 비극은 다수의 기쁨이며, 복수적 기쁨이다. 이런 기쁨은 승화, 정화, 보상, 체념, 화해의 결과가 아니다. (46-7)
[현존을 책임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반대해서] 무책임성에 그것의 긍정적인 의미를 제공하는 것 (55)
모든 것은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힘과 관계되고, 모든 힘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즉 그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관계된다. 바로 서로 관련되고, 긍정하고 긍정되는 방식이야말로 특히 결백하다. (57)
우리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힘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사물 속에서는 그것을 <유죄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힘과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분리시킨다. (57)
결백은 현존, 힘, 의지의 놀이이다. 긍정되고, 높이 평가된 현존, 분리되지 않은 힘, 둘로 나뉘지 않은 의지가 바로 결백의 최초의 근사치이다. (58)
생성 너머에 존재는 없으며, 다수 너머에 하나는 없고 다수도 생성도 외관이나 허상이 아니다. (59)
다수는 하나의 긍정이고 생성이며 존재의 긍정이다, 생성의 긍정 그 자체는 존재이고 다수의 긍정 그 자체는 하나이며, 다수적 긍정은 하나가 긍정되는 방식이다. <하나는 다수이다>.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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