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오기는 생성되는 것의 존재이다. 되돌아오기는 생성 그 자체의 존재이고 생성 속에서 긍정되는 존재이다. 생성의 법칙, 정의, 그리고 존재로서의 영원회귀인 것이다. 그로부터 현존은 책임질 것도 유죄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다.(59-60)
다수와 하나의, 생성과 존재의 상관 관계는 하나의 놀이를 형성한다. (60)
그것들의 수 때문에 동일한 종합을 재생산할 수 있는 여러 번의 주사위 던지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생산된 조합의 수 때문에 있는 그대로 재생산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가 문제다. 어떤 조합의 반복을 낳는 것은 무수한 주사위 던지기가 아니고, 바로 조합의 수가 주사위 던지기의 반복을 낳는다. 사람들이 한 번 던지는 주사위들은 우연의 긍정이고, 그것들이 떨어지면서 형성하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다. 존재가 생성에 의해서 긍정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로, 필연은 우연에 의해서 긍정되며, 하나는 다수에 의해서 긍정된다. (...) 니체는 우연을 긍정으로 만든다. (...) 차라투스트라의 군림은 <위대한 우연>이라고 불린다. (...) <내 말은 내게 우연이 오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이며, 그것은 어린애처럼 순결하다>. 따라서 니체가 필연(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파괴가 아니며 우연 그 자체의 조합이다. 필연은 우연이 그 자체로 긍정되는 한에서 우연에 의해서 긍정된다. 그 이유는 우연 그 자체의 유일한 조합, 우연의 모든 부분들을 조합하는 유일한 방식, 다수 중의 하나, 즉 수나 필연과 같은 방식만이 존재한다는 데 있다. (...) 정오가 자정의 모든 분산된 부분들을 집합시키듯이 우연의 모든 조각들을 결합시키는 것은 운명적인 유일한 수, 우연 그 자체의 유일한 수이다. 그래서 놀이꾼이 주사위 던지기를 한 번 더 하게 하는 수를 낳기 위해서는 일단 우연을 긍정하는 것으로 족하다. (62~63)
우주는 목적이 없다는 것, 즉 인식할 원인이 없듯이 소원할 목적도 없다는 것이 바로 제대로 놀이를 하기 위한 확신이다. (65)
니체는 인과성과 목적성, 확률성과 목적성의 쌍, 이 항들의 대립과 종합,`이 항들의 거미줄을 우연과 필연의 디오니소스적 상관 관계, 우연과 운명의 디오니소스적 쌍으로 대체한다. (65)
여러 번 되풀이하는 확률이 아니라 단 한 번의 모든 우연이며, 욕망되고, 의욕되고, 소망된 최종 조하이 아니라 운명적인 조합, 즉 가장 사랑하는 운명적인 조합, 다시 말하자면 아모르 파티amor fati고, 주사위 던지기 횟수에 의한 어떤 조합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운명적으로 획득된 수의 본성에 의한 주사위 던지기의 반복이다. (65~6)
영원회귀는 두번째 시간, 필연의 긍정, 우연의 모든 부분들을 다시 모으는 수이지만, 또한 최초의 시간의 회귀, 주사위 던지기의 반복, 우연 자체의 재생산이자 재긍정이다. 영원회귀 속에서의 운명은 또한 우연의 <환영>이다. (66)
모든 생성은 순환과 힘의 덩어리[=혼돈]의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68)
(제2장. 적극적인 것과 반응적인 것)
현실적 양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현실은 이미 힘의 양이다. (87)
모든 힘은 복종하거나 명령하기 위해서 다른 힘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신체corps를 정의하는 것은 지배하는 힘들과 지배받는 힘들 간의 관계이다. 힘의 모는 관계가 하나의 (화학적, 생물학적, 사회적, 정치적) 신체를 구성한다. (87)
신체는 항상 니체적 의미에서 우연의 산물이다 (...) 그러나 힘과 힘의 관계인 우연은 마찬가지로 힘의 본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의 생물체가 탄생하는지 자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신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힘들의 <자의적인> 산물로서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체는 환원될 수 없는 다수의 힘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다수적 현상이다. (87~8)
의식은 본질적으로 반응적이다. (89)
변화의 권력, 디오니소스적 권력은 활동성의 최초의 정의이다. (91)
만약 힘들이 양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면, 그것은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다른 힘들과도 더더욱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양 그 자처는 양적 차이와 분리될 수 없다. 양적 차이는 힘의 본질이며, 힘과 힘의 관계이다. (93)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양은 항상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것을 구성하는 단위와의 동일화, 균등화, 그 단위 속에서의 차이의 무화를 지향한다. 그래서 니체가 힘들의 순수하게 양적인 모든 규정에 있어 비판하는 바는 양적 차이들이 거기서 무화되고, 균등화되거나 균형을 이루게 된다는 점이다. (93)
질들은 적어도 관계 속에 있다고 가정되는 두 힘들 속에서 그것들이 상응하는 양적 차이를 제외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93)
양적 차이는 균등성으로 환원할 수 없음이다. (...) 양적 차이는 어떤 의미에서 양의 환원 불가능한 요소이고, 또 다른 의미애서 양 그 자체로의 환원 불가능한 요소이다. (93~4)
우연과 더불어 우리는 모든 힘의 관계를 긍정한다. (94)
논리적 동일성에 반대해서, 수학적 균등성에 반대해서, 물리적 균형에 반대해서 (96)
차이를 부정하는 노력은 삶을 부정하고, 현존을 비하하고, 우주가 미분화된 것 속에서 파멸하는 (칼로리적 차원에서 혹은 다른) 죽음을 그것에게 약속하는 데 있는 보다 일반적인 시도에 속한다. (96)
니체가 질료, 무게, 열의 물리학적 개념들에 대해 비판하는 바는 마찬가지로 양들의 균등화의 요소들이고, 하나의 <아디아포리adiaphorie>의 원리들이라는 점이다. (96)
니체에 따르면, 영원회귀는 전혀 동일자의 사유가 아니라, 종합적 사유, 과학 밖에서 새로운 원리를 요구하는 절대적인 차별자의 사유이다. 그 원리는 다른 것 그 자체의 재생산의 원리, 차이의 반복의 원리, 즉 <아디아포리>의 반대이다. (...) 영원회귀는 같은 것의 영속성도, 균형 상태도, 동일자의 머무름도 아니다. 영원회귀 속에서 되돌아오는 것은 동일자도, 하나도 아니고, 회귀 자체는 차별자로 그리고 차이나는 것으로만 일컬어지는 하나이다.(97~8)
생성되고 있는 것의 존재, 생성을 시작하지도 끝내지도 않는 것의 존재란 무엇인가? 되돌아오는 것, 즉 생성되고 있는 것의 존재이다. (100)
되돌아오는 것은 존재가 아니지만, 되돌아옴 그 자체는 그것이 자신을 생성으로, 지나가는 것으로 긍정하는 한에서 존재를 구성한다. 되돌아오는 것은 하나가 아니지만, 되돌아옴 그 자체는 자신을 차별자로, 다수로 긍정하는 하나이다. 달리 말하자면, 영원회귀 속의 동일성은 되돌아오는 것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차이나는 것을 위해 되돌아오는 상태이다. (101)
영원회귀[는] (...) 차별자와 그것의 재생산의 이유인 어떤 원리, 차이와 그것의 반복의 이유인 어떤 원리 (...) 권력의지volonté de puissance의 표현 (...) (102)
권력의지는 [힘의 보완으로서] 힘에 결부된다. (102)
만약 우리가 <누가> 라는 의문을 던진다면, 우리는 힘이 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권력의지만이 원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이 설사 힘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주체 속으로 추방되고 소외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102)
권력의지는 미분적인 동시에 발생적인 힘의 계보학적 요소이다. (103)
영원회귀는 권력의지가 원리인 종합이다. (103)
권력의지는 (...) 조형적인 원리이다. (...) 항상 조형적이고, 변신하는 중인 권력의지 (...) (103~4)
힘은 할 수 있는 것이고, 권력의지는 원하는 것이다. (104)
힘의 승리의 개념은 하나의 보완이 필요하고 그 보완은 내적인 어떤 것이며, 내적인 의욕이다. (104)
그러므로 항상 권력의지에 의해서 하나의 힘이 다른 힘들보다 우세하고, 그것들을 지배하거나, 그것들에게 명령한다. (105)
권력의지는 힘의 생성적 요소임과 동시에 힘들의 종합의 원리이다. (105)
우연은 힘들을 관계짓는 것이다. (107)
권력의지는 필연적으로 힘들에 부가되지만 우연에 의해서 관계맺어지는 힘들에만 부가된다. 권력의지는 자신의 중심에서 우연을 이해하고, 그것만이 모든 우연을 긍정할 수 있다. (107~8)
이번 주 안에 제2장 끝내야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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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아 스마트폰 노트에는 모아두니다
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