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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원래 성장 대회에 내려고 한 글인데 시험기간도 겹치고 해서 메모장에 써넣기만 하고 바탕화면 한구석에 처박아두다가 컴 정리하면서 발견해서 조금 다듬어서 다시 올리는 글임. 성장이라는 키워드가 잘 보이진 않는 거 같긴 한데 암튼 그거 감안하고 보면 좋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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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 때문에 항우울제 먹어"


갈등이 끝이 보이지 않던 전 연애의 끝자락에서, 서로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만큼 좁혀지지 않는 서로 간의 차이에 대한 원망도 커져 있었다. 우리의 관계가 더 이상 애정이라는 방식으로 덮을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커진 순간, 결국 전 여자친구의 입에서 저 말이 나왔다.

이건 우리의 연애가 여기서 끝이라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물론 이 후에도 얼마간 연애 자체는 유지했지만, 그저 형식적인 마음 정리의 시간이자, 서로의 마음을 덜 다치게 하기 위한 마지막 배려였을 뿐이다. 서로를 반드시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야심찬 계획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고, 그렇게 우리의 드라마가 끝났다.


여기 두 남녀가 있었다. 둘은 살아온 환경도 주변 사람들도 다 달랐지만, 서로가 비슷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둘 다 집의 가격같은 차가운 숫자보다는 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더욱 관심이 많았고, 지리와 수학과 역사를 공부하라는 어른들의 말보다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에 더욱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둘 다 어른을 좋아하지도 않고, 어른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은 길들여지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던 두 남녀는 작은 자취방 속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사랑을 나누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과, 행성을 먹어치우는 바오밥나무, 말하는 여우와 장미꽃와 함께 거닐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 닮아갔다. 밴드 음악을 좋아하지 않던 나는 어느 새 하루종일 J-POP을 들었고, 해리포터를 잘 모르던 여자친구는 어느 새 나랑 같이 해리 포터 잠옷을 사기까지 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길들여져 갔다. 여우와 어린왕자처럼, 우리는 서로를 길들이고 길들여져 갔고, 서로가 서로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슬프게도, 이 관계는 오래갈 수 없었다. 나는 여자친구를 사랑했지만, 그녀의 단점까지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다정하고 따뜻했지만, 상처가 많고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여자친구의 매력은 사랑했지만, 여자친구의 상처마저 끌어안을 정도로 성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여자친구의 단점을 외면하거나 회피했고, 여자친구는 언제나 진지한 얘기를 피하는 나에게 점점 지쳐갔다. 그리고 더 이상 외면하거나 회피할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나는 결국 책임지기보다는 도망가는 것을 선택했다.


헤어지고 나서 며칠 뒤, 그녀가 좋아했던 어린왕자를 다시 읽었다, 그러나 더 이상 어린왕자를 읽는 나는 순수했던 그 시절의 내가 아니었다. 그 때는 잘 보이지 않던 사막 여우의 말들이 비수에 꽂히기 시작했다. 어린 왕자를 처음 읽었을 때는 "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다"라는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 괴로운 것인지 차마 알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눈물을 흘릴 일이 생긴다는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말이 얼마나 잔혹한 예언인지도 몰랐다. 사막여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순수함을 간직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겁고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다.



2.


순수함은 무엇일까? 순수함은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볼 수 있는 능력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 겉으로 보이는 이상의 것을 보는 것이다. 숫자로는 분석할 수도 없고 측정할 수도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그러한 순수함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터키 전통 옷을 입은 과학자의 발견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그리고 장및빛 벽돌로 지은 집이 얼마나 예쁜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라는 타락한 어른은 이런 아름다운 말에 불경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는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 다행스럽게도, 어린왕자에서는 이런 미욱한 어른조차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설명을 해주었다. 지구상에는 무수히 많은 장미꽃 중에서 유독 한 장미꽃이 특별한 이유는 어린왕자가 직접 설명해주었다.


"내 장미도 멋모르는 행인은 너희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나 그 꽃 하나만으로도 너희들 전부보다 더 소중해. 내가 물을 준 꽃이기 때문이야. 내가 바람막이로 바람을 막아준 꽃이기 때문이야. 내가 벌레를 잡아 준 꽃이기 때문이야. 내가 불평을 들어주고, 허풍을 들어주고, 때론 침묵까지 들어준 꽃이기 때문이야. 그것이 내 장미이기 때문이야"


"어른"들 눈에는 그저 똑같은 장미꽃이지만, 어린왕자한테는 아니었다. 어린왕자에게 자신의 장미꽃은 숫자로 환원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장미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장미꽃에게 물을 주고, 관심을 쏟고, 애정을 쏟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그 그 장미꽃을 길들였기 때문이다. 어떤 특별한 조건 때문에 사랑한 게 아니라, 내가 사랑했기 때문에 특별해진 것이다. 내게 이득이 되어서 사랑한 게 아니라, 내가 사랑했기 때문에 장미꽃은 소중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순수하다는 것은, 아무런 조건이나 이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그렇다. 어린이들과 협상을 하는 건 정말로 어렵다. 자기의 애착인형이든 공놀이든 놀이터든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건 정말로 쉽지 않다. 겁을 주거나 보상으로 회유하는 것도 일시적일 뿐,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러 몰래 도망을 가는 게 어린이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부니 돈이니 하는 것들은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일일뿐, 그들은 순전히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시간과 애정을 쏟는다. 그것이 어른들 눈에 아무런 이득이 되는 것 같지 않아보여도, 그 시간에 그저 지리니 수학이니 같은 걸 공부하는 게 더 나아 보여도, 어린이들은 결코 설득되지 않는다. 그게 어린이니까. 그게 순수함이니까.


그러나 어린이들은 그래도 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고 살아도 어린이일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직 어리니까. 그렇게 살아도 주변의 어른들이 자기 삶을 책임져주니까. 어린이들은 자기 삶에 책임을 지지 않으니까. 그렇게 어린이들은 자기가 길들인 인형에, 놀이에, 사람과 함께 있는다.그러나 언제까지고 어린이들은 책임없이 살 순 없다. 한평생 책임 없이 자유롭게 방랑하던 어린왕자에게 여우가 잔혹한 진실을 하나 알려주기 때문이다.


"네가 길들인 것에 너는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어. 너는 네 장미에게 책임이 있어"


여우의 이 말은 순수함은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순수함을 가지는 것 자체는 너무나 쉽다. 우리 모두 한 때는 순수했으니까. 그러나 순수함을 유지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선 우리의 재산, 시간, 더 나아가 인생 전부를 다 투자해서라도 자기가 길들인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며, 길들임의 대가이며, 순수함의 가격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쫓지 않는단다." 전철수가 말했다. " 그 안에서 잠을 자지 않으면 하품이나 잔뜩 하는 거지. 어린애들만이 유리창에 코를 박고 있어"

"어린애들만 자기가 뭘 찾는지 알고 있구나. 어린애들은 헝겊인형에 시간을 바치고, 그래서 인형은 아주 중요한 것이 되지. 그걸 빼앗기면 소리내어 울고..." 어린왕자가 말했다.


그리고 어린 왕자는 그러한 책임을 외면한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을 보았다. 길을 잃은 채 기차에 타는 탑승객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들도 한 때는 어린이였을 것이다. 한 때는 순수하게 무언가를 사랑했을 테고, 무언가를 길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길들인 것에 책임을 지는 대신, 길들인 것을 풀어주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들은 "어른"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는 지도 모른채, 한평생 차가운 숫자와 보이는 것들에만 집착하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아무 것도 쫓지 않으며, 그저 멍하게 있거나 잠을 잘 뿐이다. 더 이상 기차 바깥을 구경하는 어린이들의 설렘과 기쁨이라는 감정을 잃어버린 채, 그들은 숫자와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서 평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어린 왕자는 책임의 대가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대가를 회피하고 도망간 사람들의 결말이 어떠한지도 보았다. 그는 책임을 지는 성숙한 어른이 될지, 아니면 그 무엇도 쫓지 않는 "어른"이 될지 결정해야 하는 성장의 기로 한 가운데에 섰다. 결국 결단의 때에, 어린왕자는 독사에게 몸을 맡기고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완수하러 떠났다. 그것이 목마르고 괴롭고 아픈 길일지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그렇게 어린 왕자는 성장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린 왕자가 이제는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숫자에 집착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린 왕자는 자기가 키운 장미를 버리고 다른 장미를 사는 "어른"이 되는 대신, 자기가 진정으로 아끼는 장미꽃을 책임지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3.


모든 어른들은 한 때 어린이었다. 그러나 다들 그 사실을 잊는다. 모든 어른들에게는 한 때 장미꽃이 있었고, 여우가 있었다. 누구나 다 자기 인생을 걸고 길들이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을 테니까.그러나 모든 어린이들이 자신들이 길들인 것들에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었다. 책임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장미꽃의 불평과 허풍과 침묵까지 들어주는 것보다는, 그저 새로운 장미꽃을 구하는 게 더 쉬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린이들은 자신의 장미꽃을 이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고 그렇게 자신의 순수함을 지키기보단, 책임을 회피하거나 거부했다. 그리고 그 결과, 어린이들은 "어른"이 되었다. 순수함과 책임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도 같다. 책임 없는 순수함이란 그저 일그러진 집착과 몽상에 불과하다.


돌이켜보면 나의 관계는 언제나 그랬다. 나는 어린 왕자의 순수함만 동경했을 뿐, 어린 왕자의 책임은 동경하지 않았다. 나는 어린 왕자에서 나오는 "어른"들을 비난하기만 했을 뿐,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성장해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나는 장미꽃을 길들이고 싶었지만, 책임지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이는 나의 삶의 방식에서 그대로 나왔다.


고등학교 때 언제나 나를 도와주던 좋은 친구들은 나의 오만함과 자기중심적 모습으로 인해 내가 상처를 주었고, 다정하고 섬세한 모습에 반했던 새내기 시절 연애는 나의 비겁함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비극으로 끝났다. 그러나 나는 이런 내 어리고 비겁한 모습을 순수함이라는 단어로 포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이 빠진 순수함은, 내가 진심으로 길들이고 싶었던 장미꽃마저 내 손으로 상처입히는 비극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순수함을 지키는 어른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건 쉽지만, 사랑을 유지하는 건 그보다 몇 배의 노력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순수한 어른은 성장하지 않은 어른이 아니었다. 순수한 어른은 자신이 길들인 것에 책임을 지는 어른이다.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들을 길들이고, 대상을 길들인 대가로 아무리 고통스러운 책임을 가져야 할지라도 그 책무를 다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어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길들인 것들에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에겐 가장 끔찍한 벌이 주어진다. 자기가 길들인 것을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은, 이제 그 누구도 길들일 수 없게 되어버리는 사람이 되버리는 것이다. 길들이는 대신, 그들은 왕처럼 지배하려 하고, 사업가처럼 소유하려 하며, 허영심 많은 사람처럼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치는 "어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벌을 받고 있다. 나를 좋아해준 사람들, 나에게 길들여진 사람들을 외면하고 책임지기 싫다는 이유로 도망친 대가로 난 이제 다시는 그러한 관계를 만들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나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한 때는 나도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모자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제 나도 어린 왕자가 본 별의 "어른"들 처럼 그 무엇도 길들일 수 없는 채 허상만 집착하며 살게 될 것이다. 모든 "어른"들은 한 때 어린이였으나, 그들은 자기의 책임을 회피한 대가로 어린이들의 땅에서 추방당하고 어린이들의 특권인 순수함과 사랑을 잃어버렸다. 나 역시 "어른"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