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새해 아침, 인공위성을 통해 온 세상 TV에 한 방송이 재생되었다. 백남준의 [Good Morning, Mr. Orwell]이란 비디오 아트 작품이다. 이대로 세상이 흘러가다간 1984년엔 이런 세상이 도래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지 오웰의 작품 [1984]에 대한 화려한 대답이었다. 발자크의 말, “소설은 풍속의 변천이 가져온 참담한 파탄을 보여 주어야 한다”에 가장 잘 대응하는 두 권을 꼽으라면 [1984]와 함께 이 책,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를 꼽고 싶다. 두 권은 모두 그 당시 시대의 변화를 소름 돋게 콕 집어내며, 그로 인해 가능한 미래의 참사를 반어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니 말이다.
1960대에서 시작해 미국 대중문화의 우세로부터 점차 강해진 외설성의 표준화는 소설 [소립자]의 시작인 70년대에 빛을 발하고 그 뒤로 점차 강해지기만 했다. 지금에 와선 이를 걱정하는 것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사회를 잠식했고, 더 젊고 잘생기거나 아름답고 성적으로 유혹적인 육체를 선호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변한 것은 물론, 그것이 노골적이라 지적하는 것조차 무례하고 불필요하게 불편해하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물이 종아리까지 차오르던 시기에 태어난 이는 물을 불편해하지만, 이미 물속에서 태어나 물속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물이 무엇이냐 물어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 경박하고 외설적인 대중문화의 조류는 연이은 세계대전 이후 상당한 실망을 안겨준 모더니즘을 빠르게 대체하기 시작했다. “Modernity has failed us” 하는 가사가 인기 있는 팝 밴드의 히트송에서 나올 정도로 동네북이 되어버린 이념과 문화는 지금까지도 반쯤 경원시되고 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조차 점차 열이 식어가고, 푸코와 데리다의 입을 빌린 강력한 정치적 올바름/페미니즘의 조류가 그 역풍과 부딪히며 강렬한 증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지금 [소립자]를 다시 읽는 것은 뭔가 기묘한 감흥을 전달하리라 생각한다.
[소립자]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해체를 보여준다. 가부장제와 나이의 권위가 사라지며, 극단적인 젊음에 대한 추구는 곧 결혼과 가정의 해체를 야기한다. 요즘 뜨거운 인물인 조던 피터슨의 말을 빌리자. “9.11 테러가 터진 뒤 사람들은 ‘무엇이 무너졌지?’라고 물었지만 그보다는 ‘아직 안 무너지고 남은 것은 무엇이지?’라고 물어야 했다.” 일자의 모든 것들이 하나씩 해체되고 의미를 상실하기 시작한 것이다. 형이상학은 쓸모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된다. 우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어쩌면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류가 신과 종교를 만들어낸 것을 보고 왜 구태여 자신을 누군가의 노예로 만드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의미를 붙잡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본능을 무시한 이야기다.
자연과학적 탐구는 사람들이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만들어낸 의미들의 토대를 하나씩 파헤쳐 무너뜨렸다. 지구가 온 세계의 중심이고 천상계는 아무런 흠 없는 천체라던 종교적인 세계관은 천문 관측으로 인해 무너졌다. 인간이 여타 동물들의 주인이자 그들과는 완전히 독립적인 부류라던 종교적인 인식관은 생물학적 관찰로 인해 무너졌다. 그리고 무너뜨린 기존의 체계 대신 과학적 탐구를 통해 새롭게 추측한 체계를 그 위에 세웠다. 우리는 그 체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고 있고, 지구는 둥글고 태양 주위를 스스로 돌며 돌고 있단 사실을 무비판적으로 참으로 받아들이고, 인류가 원숭이와 가까운 유연관계라는 것을 화내지 않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대안의 제시조차 없이, 그저 기존의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것만을 밝힌다면 어떻게 될까. 니체가 도덕의 작위성을 지적하였듯, 양자역학이 물질의 실체에 대한 직관의 어긋남을 지적하였듯 말이다. 전자의 경우 공백은 파시즘이 만들어낸 권위로 가득 찼다. 후자의 경우는 어떨까. [소립자]는 우리에게 소름 돋게 다가올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독교와 유물론적 실증주의가 둘 다 패퇴한 뒤 찾아올 제3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와 그 세대에 대해서 말이다. 랭보의 구절 [시인은 (...) 거대한 비약의 과정에서 파멸해도 좋다. 왜냐하면 다른 무시무시한 일꾼들이 나타나서 그 자신이 좌초해 버린 저 지평에서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결론이다.
확고한 의미와 진리, 실체, 이러한 것들이 모습을 감추고 나면 그 뒤에는 자연스레 웃음이 남는다. 무언가를 진지하게 고집하고 주장하는 사람은 당연히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없다. 단지 몇 가지의 전제 하에 ‘그럴 수도 있다’ 하는 수준 정도 밖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에 왜 그리 목을 매는가? 데이빗 포스터 월러스의 글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이 시대의 진지한 작가들은 아무도 검열당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비웃음을 통해 경멸당할 뿐이다.” 진실된 관계나 가치는 모두 일시적인 헛된 것으로 취급받고, 그렇게 취급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시대에 뒤떨어진 작자일 뿐이다.
소설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브뤼노는 섹스 외에는 아무런 것에서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주인공인 미셸의 이복형제이며, 철저하게 그와 대립되는 인물이다. 미셸은 능력 있고, 잘생겼으며, 예쁜 여자 친구까지 사귄 성공적인 남성이다. 하지만 그에겐 성욕이 없다. 브뤼노는 전자의 모든 것들이 없다. 그는 무능하고, 뚱뚱하고, 어린 시절부터 철저히 소외당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는 무한한 성욕의 겁화이다.
두 인물은 기묘한 대위법을 이루며 소설에서 서로 다르게 진행하다 이따금씩 만나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두 사람의 사상은 어느 쪽이든 정상적이라 보기 힘들다. 그리고 두 사람의 운명 역시 그리 좋은 꼴로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은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다른 한 사람은 연구를 마친 뒤 실종된다. 염상섭의 [두 파산]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어째서 두 극단이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철저히 파탄날 수밖에 없는가?
단순히 보면 이것은 극단에 대한 우려이다. 그러나 이리 간단히 결론내리는 것이야말로 글에 대한 낭비가 아닐까 생각된다. 조금 더 나아가면, 이것은 파탄에 이른 사회에 대한 폭로이다. 디킨스가 빅토리아 시대에 대해 그러하였듯, 포크너가 남부 미국에 대해 그러하였듯, 우엘벡 역시 당시 프랑스와 서구 사회에 대해 폭로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고, 우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만 거기에서 그칠 순 없다.
보르헤스는 “풍요로운 오독”에 대해 이야기했고, 바르트 역시 “읽는 글, 그리고 쓰는 글”에 대해 이야기했다. 글에 대한 해석은 글을 읽는 사람과 그 사람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고, 글은 그저 무한한 다의성을 제공할 뿐이다. [소립자]에 대한 해석 역시, 이와 같은 파편들만을 제공하고 마지막 결론은 독자에게 맡기며 감상문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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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의 어설픈 감상문입니다. 틀린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굿. 평소 어떤 책 주로 읽으시나요
요즘은 소설 주로 보고 있어용
공돌이 지랄한다. 이게 공대생 글이냐? 나따위랑 비교도 안돼 흑흑
지나친 인용구들이 글을 죽이는 느낌이 든다.
소립자는 어느 섬의 가능성과 묶어 읽어야 의미가 더 풍부해지는 거 같다.
인용구가 조금 과하게 많은 느낌이군요. 어느 섬의 가능성도 우엘벡 책인가요?
굳이 지적을 하자면 '새로운 대안의 제시조차 없이... ~우리에게 소름 돋게 다가올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부분에 전개된 논리에대해서, 각각 예시로 든 니체와 양자역학의 부정적인 면 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연결짓는 것이 아닌가하는 지적이 들어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글자체의 테마가 그런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것을 감안해야겠지만, 문장에 표현된 인과관계가 부정적인 쪽으로 너무 확정적이라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그리고 위의 분이 지적하는 것처럼, 인용구들이 많은 것도 좀 그렇습니다.. 뭐랄까, 독자입장에서는 '잘 모르는 인용이니깐 그냥 입닫고 있어야지.'하고 글을 감상할 수도 있거든요.
1문단 1인용...
이런...
소립자가 이런 내용이었군여. 구미가 당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