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정지돈…
정지돈은 <눈먼 부엉이>로 2013년 등단했다. 등단작을 비롯해 8편 정도가 실린 단편집 <내가 싸우듯이>를 보았을 때의 느낌을 기억한다. 생소한 인용 투성이였다. 소설이라기보다는 나무위키 문서를 15개 정도 섞어서 가루로 빻은 다음에 코로 킁하고 들이마시는 느낌이었다. 좋게 말하면 아주 흥미로운 박물관이라고 하겠다.
그의 소설 중에 최근 가장 재미있게 읽은 것은 <지금은 영웅이 행동해야 할 시간이다>. 제목이 맘에 들었다. 나는 소년만화와 히어로 만화를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제목을 보자마자 아 이거 예사롭지 않군, 했다. 줄거리는 어느 블로그에서 잘 요약해놨고 나는그걸 옮긴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행자는 두 명이다. 런던을 여행 중인 나, 파리를 여행 중인 엠이다. 둘은 화상 통화를 하며 각자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겪은 일에 대해 공유한다.
엠은 파리에서 공산당원 간호사와 국제 서커스 그룹에서 목마를 타는 노동자를 만나 코뮤니즘 페스티벌에 함께 간다. 그곳에서 불문학 전공자로 10년 전 파리에 왔지만 석사만 수료한 채 한국으로 돌아갈 타이밍을 놓친 유학생 엔씨를 만난다. 20세기 초 활동했던 초현실주의 시인의 작품을 번역 중인 엔씨는 거리의 노숙자 생활 끝에 파리의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에 자리를 잡는다. 엠은 엔씨를 따라 그곳에서 이틀간 머물며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는다. 어디서? 파리 지하의 비밀 카타콤에서.
그런가 하면, 나는 밤늦은 시각 런던 숙소 인근 KFC에서 밥을 먹다가 팔뚝이 내 몸통만 한 백인 남성으로부터 위협을 당한다. ‘웨얼 아유 프롬?’이라 묻고 ‘노스? 사우스?’라고 되물은 그는 “남의 나라 와서 떠들어도 되냐고?” 나를 겁박한다. 가까스로 KFC를 빠져나온 나는 숙소에 돌아와 조지 오웰이 영국의 국민성과 정치 성향에 대해 쓴 에세이를 펼쳐읽는다. “애국심만큼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잘 먹히는 발명품은 없다”
뭐 이런 이야기다. 아니 애초에 이야기가 맞기는 한가… 자전거 도둑과 공산주의 페스티벌, 지하 예배당과 kfc가 등장하는 소설이? 아무튼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화자가 kfc에서 백인 남자에게 위협당한 후 숙소에서 하는 생각이다.
들어오자마자 자물쇠란 자물쇠는 다 잠갔다. 사내의 덩치라면 에어비앤비의 허약한 문 따위 한 방에 박살 낼 것 같았지만그래도 심리적인 안정이 필요하긴 했다. 나는 잠시 침대에 앉아 문 쪽을 바라봤다. 침착하자. 덩치가 크긴 해도 나이가 많으니까 막상 싸움이 벌어지면 해볼 만하다…… 뭐가 해볼 만하지……
뭐가 해볼 만하지… 이 대사가 너무 좋다. 웃기고, 파리에서 인종차별을 당한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르고 말이다. 정지돈작가는 파리에서 좀 체류했고 그를 기반으로 에세이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을 썼다. 거기서 산책은, 정확히 말해 플랑뇌르와 그걸 예찬하는 일은 백인 남자의 전유물이라는 투로 말한다. 여기서 백인 남자라 함은 외국이나 세계를 자기 앞마당처럼 여기는 사람을 말한다. 실제로 내가 터키 여행에서 만난 가브리엘은 남미 백인에다가 라이트 헤비급 정도의 체격이었는데, 아프리카나 브라질 곳곳을 돌아다닌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나도 살을 20 키로 정도 더 불리면 해볼 만하려나… 뭐가 해볼 만하지…
마음 같아서는 <지금은…행동할 시간이다> 외에 다른 소설들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은데 책을 관사에 두고 와서 어쩔도리가 없다. <내가 싸우듯이> 와 <인생 연구> 는 상당히 결이 다르다는 말은 할 수 있겠다. 작가는 <내가 싸우듯이> 이후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비인간적이다, 이런 비판을 많이 받은 것 같다. 그래서일까? <인생 연구>가 좀 더 사소설적이고 개인적인 느낌이 드는 게? 그런데 또, <내가 싸우듯이> 수록작인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보면 누구보다 개인적인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고… 잘 모르겠다.
하여간에 정지돈이 계속해서 싸워나가면 좋겠다. 자기가 아는 것만 쓰고 혼자서 낄낄거릴 유머를 적고 한 없이 기뻐했으면 좋겠다. 나는 기꺼의 그의 독자가 될 것이고 그게 좀 기대된다.
'그게 좀 기대된다' 이 말 좋다
지금은 영웅이 저건 어디 수록된거냐
<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이랑 현대문학상 2022!
지돈이는 글 참많이써서 매번 따라가기가 벅차 고맙긴한데ㅋㅋ
그게 또 매력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