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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시선으로부터,
예술가 ‘심시선’의 타계 십 주기를 기리기 위해 심시선이 젊은 시절 잠시 머물렀던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러 온 가족이 다녀오는 이야기. 여기서 온 가족이란 딸 셋, 아들 하나, 손주 다섯이나 되는 그야말로 대가족이고 여기에 며느리와 사위를 더 하면 그 수는 열셋이나 됨. 제사는 전통적 차례가 아닌 하와이를 여행하며 가장 즐거웠던 경험이나 기억에 남는 기념품 등을 공유하는 것으로 대체. 즉 열세 명이나 되는 인물들이 여행과 기억을 통해 자신의 어머니, 장모, 할머니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추억하고 애도하는 이야기임. 군상극에 가까움. 한 인간 심시선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이자 여성들을 향한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음.
전작 ‘피프티 피플’이 정세랑 정신세계의 정수였다면 ‘시선으로부터,’는 정세랑이 작가로서 견지하고 싶은 자세, 이루고 싶은 결과 등 야망의 정수로 느껴짐.
챕터 시작마다 심시선의 인터뷰, 수필, 강연, 일기 등이 짧게 나오는데 이를 통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심시선의 삶과 가치관에 대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음. 이름은 작가 할머니에게서 따왔다고 하는데 캐릭터성은 아마 박완서를 모티브로 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봄. 시대착오적인(하지만 그 당시에는 당연한) 질문에 일침 하는 모습을 보면 가끔 회자되는 박완서의 일화(한 TV 프로에서 소설 속 남성들을 왜 그렇게 게으르고 무책임하게 표현하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그건 의도가 아닌 리얼리즘이다,라고 일언하던 짤)가 생각남.
저 짧은 소개로 파악되듯 심시선은 ‘보통’ 옛날 사람이 아님. 진취적이고 담대하고 거침없는 여성임. 근데 문제는 작가가 너무 작정하고 그린 게 너무 티가 남. (물론 저런 사람이 실제로 있었을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21세기 사람이, 한참을 늦게 태어나서 보고 듣고 느끼고 배웠기에 가능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그런 시절임에도 굴하지 않는 진취적임’을 20세기 인물에 때려 넣으니 오히려 위화감이 느껴지고 작위적으로 보임. 작가보다 뛰어난 인물은 창조될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고 해야 하나, 고고하게 보이려 하는 ‘그 시절 진취적임’이 작가의 표현적 한계에 부딪히다 보니 결국엔 비슷한 말만 반복하게 되고 과한 비장미만 바싹 마른 채 넘실거림. 작가 능력에 비해 주인공 보정이 너무 과함.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심시선이 예술가로서 대체 어떻게 그렇게까지 유명해졌는지 의문임. 그런데 작가는 그 모든 게 굉장히 매력적일 거라고 생각하며 쓴 것이 눈에 선해서 왠지 모르게 짠함이 느껴질 정도임.
챕터들의 길이가 짧음. 짧다 보니 심시선의 글이 너무 자주 나와서 솔직히 좀 질림. 어느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각들의 나열이라 더 질림. 차라리 챕터마다 길이가 길어서 대여섯 번만 나왔다면 괜찮은 연출로 보였을 텐데 스무 번 서른 번 나오니 이 할매 글도 많이 썼고 인터뷰도 많이 했고 여기저기 참 많이도 나왔다 싶음.
챕터 길이가 짧은 이유는 아래에서 자세히 말해보기로 하고, 열세 명이나 되는 인물들에게 각각 에피소드를 부여하려다 보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보이는 게 우선적인 문제로 보임. ‘피프티’처럼 대놓고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하는 초단편 연작인 경우엔 짧은 챕터의 속도감이 장점이었지만 이야기를 어느 정도 지탱하는 줄기가 있는 장편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등장은 어지간히 노련하지 않은 이상 독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줌. 정신없는 복닥거림을 작가가 무방비하게 방치함.
그렇다면 대체 왜 그렇게 많은 인물들이 필요했던 걸까? 그건 정말 순전히 작가의 취향 같음. 일단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작가임. 그리고 그걸 매 다른 인물의 입을 빌려 말하고 싶어 함. 그리고 그 인물로 하여금 한 주제를 말하기 위해 꼭 어떤 독립적인 사연을 부여하고 싶어 함. 여기서 피프티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던 ‘먹다 체할 지경인 주제 파티’가 또 나옴. 출산과 육아 등으로 인한 여성들의 경력 단절, 성희롱 등 여성 혐오가 만연한 기업 문화, 약자(특히 여성)를 중심으로 행해지는 보복 범죄 등 사회에 진출한 여성들을 향한 편견과 시선과 그들의 고충뿐 아니라 노동 착취적인 한국의 기업 문화, 해외에서 살아가는 아시아인이 겪는 차별, 진로에 대한 변경과 결정, 초혼과 이혼과 재혼, 사랑과 결별,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방관 역시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이나 편협적인 교육 사회에서 벗어나고 싶은 학생들의 고민, 거기에 예술계 젠더 권력과 6.25 전쟁 중 일어난 민간인 학살까지! 환경 문제나 퀴어 이슈는 빠지면 섭섭하지! 이 모든 게 300쪽 남짓한 책에 모두 담겨있습니다...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흘러넘치는 욕심이 주체가 안 되는 것으로 보임. 간단히 말하면 등장인물들 모두 각자의 사연과 상처가 있고 그걸 하나하나 전부 작가가 얘기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나있다고 보면 됨. 얘는 이런 애야, 저기 쟤는 저런 애야, 얘 까먹었지? 그럴 줄 알고 에피소드 하나 준비했어, 이런 느낌.
그럼 차라리 분량을 더 확 늘릴 순 없었을까? 아예 대가족의 대하소설이 될 순 없었을까? 이 작가의 책을 세 권째 읽은 독자의 의견으로선, 그럴 수 없었을 것 같음. 그리고 이게 정세랑의 근본적 한계라고 생각함.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퍼뜨리듯 표현하는 것에는 능하지만 그 외에 인물 활용력이 떨어지고 주제에 대해 조금만 깊게 들어가려 하면 얼른 전지적 명언 일침으로 갈무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기 바쁨. 하나의 책에 하나의 거대한 서사를 담으려 하는 것보다 캐릭터들의 설정을 짜는 데에만 집중함. 책이 줄거리를 따라 흘러가는 게 아니라 웹툰을 보면 얘 키랑 몸무게가 어떻고 생일이 언제고 별자리에 mbti에 좋아하는 음식이나 노래는 뭐고... 하면서 나오는 소개 장면의 연속을 보는 것 같음. 그러니 매 챕터가 짧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모든 캐릭터 소개가 끝나면 책도 끝나버림. 서사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인물에 서사가 가려지는 게 무조건적인 단점일 수는 없겠지만, 작가가 우선순위를 못 잡는 것이 독자 눈에 보이는 건 단점임. 아니 그렇게 열심히 만들었으면 활용이라도 잘 하던가, 캐릭터를 겨우 이슈 스피커로만 쓰고 버림. 그저 논쟁이 될 만한 것들을 언급하며 나 이만큼 알고 있어 나 이만큼 냉철하고 날카로워 자랑하기에 급급함. 그리고 하나같이 ‘먹힐 만한’ 이슈들만 속속 골라 쓰는 그 의도가 너무 눈에 뻔히 보임(여기서 천선란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는데 천선란은 인간 외 존재도 포함하여 소수자에 대한 발문에 좀 더 집중한다는 점에서 정세랑과 묘한 차이가 있다). 격하게 말하면 적당히 줄거리 정해놓고 막 생각나는 대로 글을 덧붙이는 것처럼 보임. 다양하다고 포장했던 점이 사실은 그저 즉흥적인 메시지 투척에 그치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뜻임. 즉, 한 책을 뒷받침할 튼튼한 기반이 부족한 채로 넣고 싶은 주제들을 꾸역꾸역 넣는 데만 집중하고 본인 할 말이 다 끝났다 싶으면 가차 없이 책을 끝내버림. 장편이면서 곁가지만 풍성한 척하고 책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는 너무도 얄팍하니 독자가 사유할 틈이 없음. 모든 주제가 피상적인 현상 나열에만 그치니 독자는 이런 주제도 다루네? 에서 그냥 생각이 멈춤. 그게 전부니까.
이 책 발간(2020) 4년 전에 나온 피프티(2016)의 단점들을 그대로 답습하는 게 가장 큰 단점임. 우선, 다양한 척하지만 그렇게 다양하지 않음. 성별 얘기부터 하자면, 성별별로 캐릭터성이 다 엇비슷함. 여캐들은 대장부 스타일에 남캐들은 조신함. 작은 변주야 있지만 그마저도 없으면 인물 관계도가 그려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넣은 요소들에 불과해 보임. 이런 동일한 성향이 인물들이 가족이기에 노린 보편성인지 개개인의 특수성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작가의 한계인지 고민했는데, 피프티와 ‘안은영’을 떠올리니 그냥 작가의 한계라고 하기로 했음. 또한 ‘선한 상식’의 테두리가 여전히 존재함. 이는 유행하는 키워드인 ‘무해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그런 것 같은데 결국엔 그냥 지루함만 낳을 뿐임. 인물들의 모든 행동과 생각에 작가가 우선적으로 나서서 방어막을 쳐주니 읽을수록 다양함이 답답함으로 느껴짐. 인물의 자율성에 작가 스스로 한계를 만드는 것 같은 느낌. 게다가 심시선 외에 극을 이끌어가는 중점적인 주인공 없이 모두가 주연이자 조연인 점도 여기서는 단점으로 느껴짐. 구심점이 되는 인물은 있으나 그 역시도 제사의 주도자 역할만 할 뿐이라 존재감이 다른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 모든 인물들을 심시선하고 엮는 것만을 최우선 과제로 하니 전체적인 힘이 부족하고 작위적인 잔가지만 많아짐. 특히 고등학생 초등학생 애들에 대한 에피소드는 겉돎 그 자체.
지루하다는 말이 나와서 덧붙이면, 극의 진행이 사건보다는 인물에 중점을 맞추고 있음. 이 책의 중심적 사건은 심시선 제사를 지내러 가족들이 하와이에 간다는 것이 다임. 그 외 모든 부분은 인물들의 상황과 행위에 달려있음. 그런데? 사연과 캐릭터성 들이 다채로운 척하면서 사실은 다 엇비슷하니? 지루하게 느껴진다고! 기승전결에 맞춰 흘러가는 게 아니라 얘 얘기 끝났으니 이제 다른 애 얘기 나오겠지... 심시선 잠깐 떠올리다 본인만의 아픔이 나오겠지... 그리고 그 아픔은 왠지 모르게 벌써부터 다 예상이 감... 진행 방식마저 다 거기서 거기니 뒤 내용이 기대가 안 됨. 그리고 정작 하이라이트인 제사는 심심하기 그지없고 종장에서는 끝까지 이슈 때려 넣기 욕심 못 버리다가 뚝 끝남. 흥미로운 중점 인물과 곱씹어 볼 만한 내용들이 순간적인 요소들로 인해 다 발화됨.
시점이 3인칭과 1인칭이 혼재되어 심시선 혹은 다른 누군가가 가족들을 바라보며 쓰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는 점... 뭐 이런 자잘한 건 이제 쓰기도 귀찮고... 요는, 있어 보이려고 하니 오히려 거북함이 생긴다... 정도로 정리.
그래서 이 책이(혹은 정세랑의 모든 책들이) 그렇게 별로냐? 그런 건 아님. 나름 재미있음. 젊은 국문학 중 가볍게 읽고 즐기기에는 정세랑만 한 작가가 없다는 게 현재까지의 개인적인 평임. 장류진도 가볍고 재밌지만 ‘회사’라는 독점적 영역이 있으니 카테고리가 살짝 다름. 장류진이 회사 대리님이 위트 있게 썰을 푸는 느낌이면 정세랑은 아는 누나가 본인 흥에 취해 얘기를 막 늘여놓는 느낌임.
장점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보자면, 의도가 눈에 선하다, 얘기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다, 욕심이 주체가 안 된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 바꿔 말하면 작가 자신은 굉장히 즐겁게 구상하며 썼을 것 같고 그 즐거움이 글에도 배어 있는 게 보임. 글 자체에 숨길 수 없는 즐거움과 경쾌함이 있음. 어찌됐든 여러 사람을 그려내는 데는 능숙하니 보는 맛이 아주 없지는 않고 그 관계들 속에서 순간순간 따뜻함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도 장점임. 그리고 전지적 명언 일침이라고 폄훼하긴 했지만 통, 하고 울리는 문장이 종종 있는 것도 사실임. 일인칭 묘사보다 전지적 문장에 더 능함. 장점... 끝.
마지막으로 제목에 반점은 무슨 의미일까? 시선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가족이라는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끝나지 않을 연대와 이어지는 유지...를 뜻하는 게 아닐까 싶음.
아무튼 밑천은 훤히 보이나 필력이 아주 없는 작가는 아니라는 것. 빠도 많고 까도 많은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은 작가임. 자, 이제 정세랑은 한동안 그만.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한평생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전직 빨치산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셔서 치르는 장례 중 문상객이나 가족들에게 아버지의 인생을 들으며 내가 알고 있던 것들과 이제야 알게 된 것들을 종합하여 그를 이해하게 되어가는 이야기. 빨치산이었던 아버지를 이해하는 과정이자 아버지라는 인간 자체를 이해하는 과정을 담은 한편의 진한 촌극이자 코미디.
일단 이야기가 냅다 시작함. 전주 재끼고 바로 가사 때려 박는 노래 같음. 사투리가 생생하고 인물들의 나이가 좀 있다 보니 아이돌 노래보다는 트로트에 가까움. 근데 옛날보다는 요즘 나온 트로트 같음. 적당히 트렌디하고 적당히 세련됐는데 기반은 뽕끼고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들썩거리게 됨.
주인공이 냉소적인 편인데다 한 발짝 떨어져서 집구석을 관망하며 조소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 모든 것에 스며들고 있었다는 점이 양귀자의 ‘모순’과 비슷함. 또한 한 인물을 추념하며 그와 관련된 인물들이 각각의 에피소드를 풀어놓는다는 점에서는 앞서 리뷰한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와 비슷함. 하지만 분위기가 가볍고 문장마다 위트가 넘친다는 점에서 양귀자보다 읽기 편하고, 시대상 반영이 전문적인 편이고 책 전체의 균형이 보다 더 잘 잡혀있다는 점에서 정세랑에 비해 거북함이 없음.
빨치산이라는 단어에서 유추 가능하듯 근현대사 사건들이 많이 언급됨. 많이 알수록 많이 보임. 그중에서 특히 이념 투쟁사를 잘 알수록 더 재밌을 듯함. 하지만 몰라도 지장 없을 만큼 극 진행이 매끄러움.
사투리가 너무 찰진 것도 위와 비슷한 특징임. 나는 지역을 막론하고 사투리 자체를 좋아하는 편이라 구수한 대사들이 오히려 반가웠고 또 흥미롭게 읽었지만 잘 모른다면 두 번 세 번 다시 읽을 대사들도 많음. 근데 모르더라도 워낙 리듬감이 뛰어나고 생생해서 방해보다는 재미로 느껴질 거임. 어쨌든 역사든 사투리든 알면 플러스되는 정도지 모른다고 마이너스가 되지 않는다는 뜻.
대사를 제외한 문장들의 호흡은 대체적으로 긴 편임. 만연체랑은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데, 일단 읽기에 어려움은 전혀 없음. 미사여구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거나 표현이 화려한 것도 아님. 그냥 문장 자체가 좀 긺. 위트와 해학으로 넘어갈 수 있는 정도지만 느끼기에 따라 장황하다고 볼 수는 있을 듯.
다른 단점으로는, 등장인물도 많은 편이고 회상이 잦기 때문에 시대 파악에 혼동이 오기도 함. 이 내용이 시대적으로 저번 회상 전인가? 후인가? 이 양반은 언급됐던 사람이었나? 누구였지? 하며 살짝 헷갈림. 게다가 페이드아웃과 페이드인이 순식간에 일어나서 의외로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따라가기 힘들 수도 있음(이러한 시점 혼동은 천선란의 ‘노랜드’에서도 비슷하게 겪었는데, 작가 역량의 차이로 천선란은 특징을 덮는 단점으로, 정지아는 특징 자체로만 느껴짐). 뒤집어 말하면 순간적인 연출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음. 영상을 보는 것 같은 글솜씨임.
에피소드의 흐름이 다 비슷한 것도 단점임. 조문객 찾아옴 – 그(들)를 보자 떠오르는 아버지와의 일화 혹은 그에게서 듣는 아버지의 새로운 일면 – 영정사진 한번 슥 쳐다봄 - 아버지가 말을 거는 것 같음. 이게 기본 골자임. 크게 벗어나지 않음. 거기에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는 표현이 너무 자주 나음. 이해의 과정 속에서 주인공의 마음 변화가 일직선일 뿐이니 읽을수록 뻔하다는 생각이 들게 됨. 하나 다행인 건 그때는 가지 않았을 짐작이 이제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마지막에 나름 괜찮게 풀어짐.
그리고 모든 인물들을 아버지와 엮으려다 보니 끝에 가서는 조금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음. 어라, 이거... 심시선...? 여기서만큼은 비슷한 단점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추가적으로 앞에서 책 전체의 균형이 잘 잡혀있다고 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정세랑과 비교했을 때 그런 거지 아주 완벽하게 잘 잡혀있다고는 보기 힘듦.
이런 단점들에 굳이 작가 대신 변을 해보자면, 자전적 소설이기에 오는 한계가 아닐까 싶음. 작가의 말까지 보면 플롯뿐 아니라 꽤나 세세한 부분들까지 작가의 경험을 반영한 것 같은데 그렇기에 욕심이 나지 않았을까 싶음. 아버지와의 일화를 추억하다 보니 이 일도 넣고 싶고 저 일도 넣고 싶고 이건 꼭 추가하고 싶고 하지 않았을까.
근데 가장 큰 문제는 그렇게 겪었던 실제와 소설 속 창작이 만나 시너지... 까지는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는 거임. 책의 주제가 이념과 시간을 넘어 아버지라는 인간 자체를 이해하는 건지, 내가 겪은 고난 때문에 일부러 마주하지 않았을 뿐 우리 아버지 인간성이 사실은 이랬다고 띄워주려는 건지, 아버지가 행한 부모 자식으로서의 한계는 시대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이라며 옹호하려는 건지 아니면 셋 다인지... 미화가 조금 과함.
하지만 모녀나 부자가 아닌 부녀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오랜만이라 신선했고 무엇보다 ‘현대사의 비극이 어떤 지점을 비틀어, 뒤엉킨 사람들의 인연이 총출동한 흔하디흔한 자리’를 진정 맛깔나게 표현했다는 건 인정하고 또 인정함. 무겁지 않으면서 발랄함까지도 느껴지고 깊고 진하면서 가벼운 면도 있는 게, 여러모로 장점이 단점을 상쇄하는 책임.
황정은
백의 그림자
엷은 김애란, 비문 없는 박솔뫼. 이 책에 대한(혹은 황정은에 대한) 첫인상임. 분위기 자체가 낮은 편이지만 침울하지는 않고 이야기가 비극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게 김애란과 다르고, 문장 안에 대사가 섞여있다던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한 글들을 읽고 있자면 박솔뫼가 떠오르는데 비문이 없고 단번에 이해 가지 않는 문장이 없다는 면에서 또 다름. 저 둘의 적당한 장점만 섞어 순한 맛으로 우려낸 느낌임(누가 먼저 등단했는지는 차치하도록 하자). 그러다 보니 왠지 모르게 정갈하다는 느낌이 듦. 차분하고 조용함.
오래된 전자상가에서 일하는 ‘은교’와 ‘무재’의 이야기. 철거와 재개발을 목전에 두고 있는 전자상가가 배경임. 은교는 고등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다 자퇴를 하고 아버지가 연결해 준 수리실에 다니고 있고 무재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빚을 갚으며 공방의 견습공으로 일하고 있음.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그림자’가 등장함. 이곳에선 사람들이 종종 ‘그림자가 일어나는’ 현상을 겪는데 그림자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현상을 뜻함. 근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음. 그저 그림자를 따라가지 마라, 조심해라, 큰일이 난다 등 주의만 줄 뿐임. 은교와 무재의 아는 사이인 듯 친구인 듯 묘한 분위기를 기본으로 상가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담는 동시에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를 빈틈 사이에 채워 넣고 있음. 그냥 적당히 한 줄로 요약하면 재개발을 앞둔, 철거가 진행되고 있는 전자상가에서 일하며 먹고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음.
한 줄 요약에 가장 중요하다던 그림자에 대한 언급은 빠져있는데? 그림자라는 소재를 굳이 인물과 따로 떼어서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그럼. 책에서, 사람마다 가마의 모양이 전부 다른데 왜 그냥 가마라는 단어 하나로 엮어버리는지, 같은 구역에 있더라도 사람마다 생계나 생활이 다른데 어째서 슬럼이라는 이름 하나로 묶어버리는지 등 내적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은 외적 기준으로, 구구절절 살펴보기엔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진다는 이유로, 간단하고 편리하게 하나의 이름을 붙여버리는 것에 불만을 갖는 이야기가 많이 나옴. 그렇다면 즉 그림자란 사람들 각자의 사정과 아픔을 뜻하고 이 책은 상대적 약자들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고려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실태를 향해 고요히 분노를 드러내는 책이라고 생각함.
실제로 작가의 말을 보면 이 책은 2009년 용산참사가 집필 배경인 듯한데, 나는 다 읽을 때까지 몰랐음. 솔직히는 부끄럽지만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음. 여기서 그 사건에 대해 자세히 말하는 건 좀 그렇고, 그러한 참사를 염두에 두고 작가가 이 글을 썼다는 것만 알면 될 듯함.
어째 감상이 기술 분석보다는 의미 파악에 중점을 더 맞췄는데, 그만큼 딱히 편중된 장단점 없이 무난해서 그럼. 그래도 몇 가지 꼽아보자면, 일단 차분함. 그리고 차분한 만큼 맹숭맹숭함. 잔잔한 책이야 그동안 꽤 읽었지만 이렇게 슴슴한 건 처음임. 문체 자체가 노곤한 편이라 더욱 그럼. 다행인 건 분량이 짧다 보니 졸기 전에 책이 끝남. 근데 어차피 이야기 자체가 일상과 환상이 적절히 결합되어 있는데다 주인공들의 서사가 신경 쓰일 때마다 타이밍 좋게 조금씩 진행돼서 크게 졸리거나 지루하지 않음. 지루하다기보단 잔잔하다는 말이 더 어울림. 시작과 중간과 끝을 잔잔함 하나로 잘 엮음.
잔잔하고 심심한 데다 여러 상징을 압축해 놓아서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천천히 생각하며 읽어야 하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음. 그 외에, 분량이 짧은 만큼 마무리가 살짝 아쉽긴 한데 이 이야기를 이 이상 끌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음. 정말 적절하기 그지없는 엔딩.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왜 그림자를 따라가지 말라고 하는 걸까. 그건 아마도 바뀌지 않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아픔에 너무 깊게 매몰되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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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7월보다 더 많이 읽으려 했는데... 이제 젊은 국문학이 슬슬 질리기도 하고 여러모로 일이 겹쳐서 진도가 잘 안 나갔네
그래도 어쨌든 궁금한 것들은 아직 많이 남았고 대출해놓은 것들 반납 기한도 얼마 안 남아서 9월은 이보단 많이 읽을 듯 역시 독태기 치료엔 산더미 대출이 답
지금 읽고 있는 건 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 단편 하나 남아서 이것까지 다 읽고 올릴까 하다 걍 9월로 토스하고 이쯤에서 마무리함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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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솔한 감상평 굿.. 글 올릴때마다 잘 보고 있음
백의그림자는 개인적으로 그닥이었음 황정은은 역시 아무도 아닌이 제일 좋았던듯
감사합니다... 아무도... 아닌... 메모 완
평가가 재밌네요 근데 이렇게 자세히 읽기 어렵지 않나요?
젊은 국문학의 진가가 여기서 나옵니다 읽기 쉬운 만큼 평할 거리도 술술 나오거든요
독서력이 대단하시네요
백의 그림자 담담한 맛이 좋았어..
Gosu
최고입니다 - dc App
1930년대 국문학이 좋다는 데 혹시 읽어보셨나요?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자전적 소설이라 좀 욕심을 낸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ㅎㅎ 그래도 재밌죠
그 시절 국문학은 중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배운 것 외에 따로 찾아 읽은 게 없네요ㅎㅎ; 언젠가는 차근차근 읽어볼 생각이긴 합니다
굿굿굿 전에 님글보고 몇권 읽어보고 있음 ㅋㅋㅋㅋ
개추
후기 너무 좋네 ++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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