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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양」



  실버들 늘어진 네 갈림길에서

  이뿐 암여우가 둔갑하여

  "아이갸나!" 튀어나오는

  아지랭이랄까? 그 허리의 사향주머니랄까?

  그때 성황당에 걸어논 비단 헝겊이랄까?

  나는 선잠에서 깬 어느때부턴지

  바람 불 때마다 싸아한

  여기 말리어 헤매다니고 있었다.

  여러 달밤이 이울 때까지

  전신주처럼 서서 울며

  또

  양말 뒤축이 다 빵꾸나도록

  이 도량(道場) 안을 헤매다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풀려나기 비롯한 것은

  내 빵꾸난 양말의 발꼬린내에

  그네가 드디어 못견디어서

  양말 안 빵꾸나는 사내에게로

  살짝 그 몸을 돌려버린 그때부터다.



- 『안 잊히는 일들』(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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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잊히는 일들』에는 유년기에서 장년기에 이르는 시기의 연정 또는 성애를 다룬 시들이 몇 편 실려 있다. 「만십세」나 「첫 질투」는 유년기에 겪게 되는 막연한 사랑의 감정을 그린 시들이다. 반대로 「중국인 우동집 갈보 금순이」나 「동정상실」의 경우 소년기를 넘어가면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성애에 대한 기억들을 다루고 있다. 위에서 적은 「ㅎ양」은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넘어가는 시절의 짝사랑을 주제로 다룬 시이다. 서정주의 문학적 자서전인 『천지유정』에 이 시의 모티프로 보이는 일화가 이야기되고 있다.


첫머리에 언급되는 '이뿐 암여우'에 대해서는 시인의 말년에 씌어진 「일곱살때 할머니에게서 드른 흰 암여우 이얘기」라는 시에서 알기 쉽게 이야기된 바 있다. 짝사랑에 취하는 것을 암여우에게 홀리는 것에 빗댄 것은 흔한 비유라 하겠으나, 기발한 감탄사의 사용을 비롯해 세련되게 처리되고 있어 읽을 맛이 난다. 시인은 짝사랑에 빠진 상태란 일종의 도량에 드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 도량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은 짝사랑의 상대가 자신의 '빵꾸난 양말'에 질린 것을 보고 그 도량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천지유정』의 내용을 참조하면 '빵꾸난 양말'은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구질구질했던 화자의 상태를 의미한다. 많은 사람에게 그렇듯이 짝사랑의 극복이란 정신적 성숙의 한 계기가 된다는 것을 이 시는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