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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은 아버지의 도시 지역 동업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으로 돈을 빌려 달라고 요구했다. […] 상당한 액수를 받은 후. 덩은 그 돈을 당에 주었고 곧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거주지를 바꿔 버렸다. 그는 집안에 돈이 넘쳐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렇게 했다." (p.96)


"나는 공산주의자이고, 그래서 낙관주의자다."(p.147)


"마오가 덩으로 하여금 타이항을 관리하고 산시-허베이-산둥-허난지역에서의 정풍운동을 지휘하도록 한 것은 덩에 대한 마오 주석의 막대한 신뢰를 증명한다." (p.179)


"우리는 천주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p.192)


"[덩샤오핑은] 능숙한 군사 전략가이기도 했다. 화이하이 작전에서 거둔 승리는 국민당 정권의 붕괴를 미리 운명지었다." (p.199)


"덩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 만년필을 잃게 된 것을 후회했고, 상하이를 방문할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상하이의 소매치기는 끔찍했다." (p.220)


"덩의 입장에서, 마오는 고양이가 쥐를 갖고 놀 듯 자신을 갖고 놀았다. 처음에는 희망을 주고, 그 후에는 괴롭혔다. 죽이려고도 하지 않았고, 당에서 축출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p.371)


1. 마오쩌둥 평전을 썼던 판초프와 레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마오쩌둥 평전은 민음사에서 『마오쩌둥 평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됐고, 이 책은 알마에서 『설계자 덩샤오핑』이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됐습니다. 덩샤오핑 평전이라는 제목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이미 그 이름으로 두 권의 책이 나와 있기 때문에 다소 메리트가 떨어졌기 때문 아닐까 생각해봅니다(벤저민 양의 『덩샤오핑 평전』은 2006년에 황금가지에서, 에즈라 보걸의 『덩샤오핑 평전』은 민음사에서 2017년에 나왔습니다)


2. 마오쩌둥 평전에서 드러났지만 저자들은 구 소련의 관련 자료들을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데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덩의 전기 작가로서 이 모든 자료를 처음으로 이용한 것은 우리다"(p.27)


물론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자료들을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는 건 설레고,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덩샤오핑은 소련이 아닌 중국 정치인이고 중국인이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될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러시아 문서보관소에 있는 내용들을 "처음으로 이용한" 이 책이 그에 걸맞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특별히 더 알려주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요.


그래도 (저는) 몰랐던 흥미로운 이야기나 새로운 관점들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3. 많은 사람들이 덩샤오핑의 과오하면 1989년 천안문에서의 학살을 떠올리고, 조금 더 나아간다면 1950년대 반우파투쟁을 진두지휘하며 수 많은 피해자를 낳은 것, 그리고 마오 시기의 정책 실패에 동조한 것 정도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건국 초기부터 덩샤오핑의 손은 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단지 군인으로서 전투를 겪으면서 많은 부하들이 다치거나 죽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덩샤오핑은 서남 지역을 다스릴 때 반혁명적 범죄를 엄히 다스리라는 중앙의 지시에 따라 "미친 듯이 처형을 해댔다"(p.215) 또, 마오에게 "모든 반혁명주의자들의 반에서 3분의 2를 처형하는 것이 좋을 것"(p.215)이라고 주장할 정도였습니다. 단적으로 1950년 11월부터 6개월 동안 쓰촨 서부에서는 8,389명이 처형됐는데 같은 기간 베이징에서는 불과 700명만이 처형됐습니다. 물론 당시 공산당 중앙 정부가 들어서 안정된 베이징과 그렇지 못한 쓰촨 서부를 일률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러한 엄청난 차이는 지역적 차이를 넘어선 것이죠.


그 마오조차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할 정도였고, 이후 그 지역에서 처형되는 인원은 4분의 3 이상이 줄었습니다.


4. 덩샤오핑의 흑묘백묘-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 이야기는 유명하죠. 좀 아는 사람이라면 사실 그건 쓰촨에서 자주 쓰는 말인데, 덩샤오핑의 동료였던 류보청이 자주 하던 말이고 원래는 노란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 정도까지 알고 있을거고요.


그런데 더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오가 자신과 달리 도급제를 비판하자 겁을 먹고 "속기록 보고에서 노란색과 검은색 고양이에 관한 문장을 빨리 삭제하라고 요구"(p.325)했다는 것입니다.


5. 저자는 문혁 초기 마오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고양이가 쥐를 갖고 놀 듯"(p.371) 했다고 표현합니다. 덩의 흑묘백묘론을 떠올리면 참 묘한 비유가 아닐 수 없네요.


6. 저자들은 중월전쟁은 중국의 국가적 안보뿐만 아니라 덩샤오핑 개인의 정치적 목적도 작용했다고 봅니다. "중국 내 일부 전문가들은 당시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이던 덩이 무한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군에 대한 자신만의 완전한 통제권을 수립 할 수 있도록 전쟁을 주장하고 전체 작전을 지휘해야 했다고 생각"(p.483)했고,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자신을 당과 국가의 진정한, 권위 있는 지도자로 내세"(p.484)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중소분쟁에 대해서는 "마오는 너무나도 충격을"(p.380) 받았다고 한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우연한 사건이었다는 것이죠. 반면, 필립 쇼트는 『마오쩌둥』에서 마오가 대내외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유도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완전히 엇갈리는 해석이죠.


7. 덩샤오핑은 상하이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적이 있었다네요..


8. 중앙서기처 서기와 베이징시 서기 등을 지낸 펑전은 문혁 초기 실각한 주요 간부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구체적 일화를 보니 목숨이 몇 개 더 있는 듯 행동했으니 마오의 성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몇 년 더 놔둔게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모두를 비난할 수 있지만 마오 주석은 안 된다는 생각[…] 이 생각은 잘못된 것"(p.318)이라거나, "마오쩌둥 사상이 '원칙'인가? 이는 논의해봐야 하는 것이다"(p.318), "누가 1인자인가? 우리 후손이 평가하도록 해야 한다"(p.318)라고 말했네요.


9. 오역과 관련해서는 눈에 띄는 점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석"이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런 직책은 없죠. 또, "덩샤오핑을 중앙위원회 서기처 서기장으로 두어"(p.235)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런 직책은 중국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아마 당 중앙비서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왕둥싱에 대해 "왕둥싱 원수"(p.368)라고 적고 있는데 사실 왕둥싱은 원수 계급을 받지 않았다. 그의 최종 계급은 소장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왕둥싱 "장군"(p.441)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건 맞는 표현입니다.


제일 심각한 건 해서에 관한 부분인데 346페이지에서 "마오쩌둥은 해서라는 인물을 좋아했는데, 그는 하이루이에게서"라는 구절입니다. 해서와 하이루이는 다른 사람이냐고요? 아뇨 모두 같은 사람이고, 그래서 문제입니다. 한 문장 내에서 한국식 한자음인 해서와 중국식 발음인 하이루이를 섞어 놓고 있는거죠. 아쉬운 지점입니다.


10. 동의하기 어려운 관점도 몇 있습니다.


저자는 마오가 저우의 암 수술을 막은 것에 대해 "그가 없는 상태를 우려한 마오가 의사들에게 입원과 수술은 생각지도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저우가 수술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p.398)고 평가하지만 사실 저우가 마오 자신보다 오래 살 것을 걱정해서 또는 현대 의학을 불신했던 마오의 선입견 때문이지 저런 이유 때문에 수술을 막은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또, 마오의 조카인 마오위안신에 대해 "그를 키운 것은 쟝칭이었기에 위안신이 그녀에게 애착을 가졌다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다"(p.453)고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 마오위안신은 자라면서 장칭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냉랭한 거리를 유지했지만 문혁 시기에 접어들면서 화해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건 좀...


특히 예젠잉과 화궈펑의 관계에 대해


"마오는 사망하기 전 아마도 예곈잉에게 자신의 후계자를 “지지"해 달라는 부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그는 진짜 의도를 숨기고 있었고, 마오는 전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마오가 예졘잉을 마지막으로 만날 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마오위안신은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했다. 예졘잉 원수는 자신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책략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화궈펑을 유지시키면서 덩을 강화시킴으로써, 그는 화궈펑과 덩 모두 빚을 지게 될 중재자이자 당과 국가 내에서보다 상위의 권위자로서 스스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p.466)"


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당시 마오가 건강 문제로 그런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예젠잉은 마오가 자신에게 그런 부탁을 한다고 느꼈고 그래서 최대한 화궈펑을 보호하려고 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는 일화와는 반대되는 해석입니다. 예젠잉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러했다는 건 지나친 해석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그랬다면 화궈펑이 본인이 아닌 예젠잉을 당 주석으로 추천했을 때 거부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화궈펑 시대 예젠잉의 태도는 일관되게 화궈펑 체제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저자들은 "덩은 예졘잉에게 의존할 수 있던 반면 화궈펑은 왕둥싱에게 기댈 것이었다"(p.453)라고 하는데 이 평가에도 동의하기 어려워요. 확실히 왕둥싱은 화궈펑의 지지자였던 건 맞지만 예젠잉 역시 최대한 화궈펑 체제의 붕괴를 막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영명한 영수'라는 표현을 고안해 낸 것도 예젠잉이었고요. 예젠잉은 화궈펑의 주요 조력자이자 지지자였습니다.


무엇보다 저자는 사인방 숙청에 예젠잉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마오 사망 직후인, 9월 12일 예젠잉이 왕둥싱과 4인방 문제에 대해 얘기했고, "이삼일 후에 화궈펑과 직접 이야기를 나눴"(p.441)는데 이때 화궈펑은 "심사숙고할 시간을 좀 가졌고 […] 일주일 후"(p.441) 다시 만나 본격적으로 구체적 계획을 논의했다는거죠.


즉, 이 책에서 사인방 숙청은 예젠잉이 주도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인방 숙청은 화궈펑이 주도적이고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예전에는 화궈펑의 공을 줄이기 위해 예젠잉을 부각하는 견해도 있었는데 화궈펑 실각을 주도했던 천윈 역시 사인방 숙청은 화궈펑의 위대한 공헌이라고 평가할 정도였고, 덩샤오핑 시대도 끝난 최근에는 중국 공산당에서조차 사인방 숙청은 화궈펑이 주도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화궈펑은 9월 12일로부터 2~3일 후에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9월 12일 단계에서 화궈펑이 이 문제를 논하기 시작했고, 사인방 제거를 결정했습니다.


게다가 사인방 제거에는 중앙판공청 주임이자 8341부대 사령관인 왕둥싱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왕둥싱은 오랫 동안 마오의 경호 담당을 맡아왔고 마오가 왕둥싱이 없으면 불안하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왕둥싱은 다른 간부들은 높게 보지 않았습니다. 특히 저우언라이에 대해서는 아주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런 왕둥싱이 마오 사후 마오 대하듯 했던 게 바로 화궈펑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존경하던 마오 주석이 직접 점지한 후계자이기 때문이죠. 8341부대의 동원은 화궈펑의 지시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11. 저자들은 덩샤오핑이 힘에 충성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마오 말년에 문화대혁명의 성과를 정리하라는 마오의 지시를 무시하고 정면으로 들이받은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죠. 흥미롭고 설득력 있는 견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