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강화>라는 제목의 오해에 대해 풀고 넘어가야겠다. 잘 쓰지 않는 동음이의어가 제목으로 등장한다. 그 뜻은 아래와 같다. 작가는 후자의 뜻으로 제목을 지었으나 이 책을 읽고 나면 전자의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독후감을 읽고 전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순전히 개인적 능력 차이니 오해는 하지 않길 바람.)

강화(強化) : 수준이나 정도를 더 높임.

강화(講話) : 강의하듯이 쉽게 풀어서 이야기함. 또는 그런 이야기.

책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 초판이 발간되었다. 머지않아 한 세기 전의 글로 치부될 정도로 시대착오적 실용서적이라고 볼 수 있으나, 일부 표현을 제외하고 여전히 현대적이다. 이 말은 이 책이 지식인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실로 엄청나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작가는 서두에 언문일치의 현대적인 글쓰기를 강조한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당시로서 한자 영향권에 크게 노출되었음을 감안하면 혁신이 아닐 수 없다.

"하나는 소설, 하나는 수필, 하나는 논문, 하나는 시(詩)이되, 모두 말을 문자로 적은 것들이다. 한자어가 적기도 하고많기도 할 뿐, 성향(聲響)이 고운 말을 모으기도 하고 안 모으기도 했을 뿐, 결국 말 이상의 것이나 말 이하의 것을 적은 것은 하나도 없다. 문장은 어떤 것이든 언어의 기록이다. 그러기에 말하듯 쓰면 된다.

  글이란 문자로 하는 말이다.

  하는 것이다.

  글은 곧 말이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언문일치에 빠진 좌익소아병에 걸린 것도 아니다. 북한처럼 순우리말로도 부적절하고 외국어도 적절히 써야 하며, 한문을 배척하는 건 영미권에서 라틴어를 버리는 것 같다고 비유한다. 아울러 방언이 왜 예외적이어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특히 표현할 수 없는 영역(표현 불가능성)이 언어마다 다르니 우열을 가릴 순 없다고 말한다. 흡사 비트겐슈타인이 생각나는 세련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언어가 이 표현 불가능의 암흑면을 더 광대한 채 가지고 있나 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연구재료의 하나거니와 우선 어느 언어든 표현 가능성의 일면과 표현불가능성의 일면도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이 표현불가능성은 언어마다 달라서 완전한 번역이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쯤은 알아야겠다. 이것을 의식하기 전엔 무엇을 번역하다가 자기가 필요로 하는 번역어가 없다고 해서 이 언어는 저 언어보다 표현력이 부족하다느니, 저 언어는 이 언어보다 우수하다느니 하고 부당하게 단정하기 쉬운 것이다."

저자는 소설, 수필, 여행기, 편지, 논설문 등 글의 목적에 맞게 적절히 문체를 갖출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소설 속 등장인물을 묘사할 때 일정한 톤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대화로도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평양 사람이 표준어를 쓴다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내가 왜 감정 없이(로봇처럼) 글을 썼는지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문체에 치우쳐 글의 초심을 잃지 말길 당부한다. 형식주의로 글의 뜻을 잃지 마라는 경고이다.

서간문(편지)의 예시

"무슨 편지든 저편을 움직여놓아야 한다. 문안편지라도 저쪽에서 받고 무슨 자극이 있어야지, 그냥 왔나 보다 하고 접어놓게 되면 헛한 편지다. 더구나 무슨 청(請)이 있어 한 편지인데 저쪽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편지는 완전히 실패다. 써가지고 그 사연이 넉넉히 자기가 필요한 만치 저쪽을 움직일 힘이 있나 없나 읽어보고, 없으면 얼마든지 그런 힘이 생기도록 고쳐 써야 한다."

식사문(式辭文)*의 예시

* 식사(式辭) : 사회생활을 유지하고 공동생활에 필요한 “인사의 말”을 뜻한다.

"네가 가는 것을 보고 나는 내 지금까지의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고작 높은 바른 길을 찾기를 결심하였다. 나는 천만 번 나고 죽어 지옥 아귀의 고생을 하더라도 고작 높은 바른 길을 찾아 잘못 사는 무리들을 건지리라는 큰 원을 세웠다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너를 만날 것을 믿는다. 너와 함께 고작 높은 길을 닦아 괴로움에 허덕이는 모든 잔 무리를 건지리라는 일을 함께할 날이 있을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내 슬픔을 죽인다. 악아. 너도 네 슬픔을 죽여라.

  네 마음에 박힌 모든 번뇌를 다 불살라 버리고 고작 높은 길을 닦기를 힘써라. 네 태어날 곳을 찾거든 돈 많은 집이나 세력 많은 집을 찾지 말고 어진 마음을 가지고 어진 일을 하기를 힘쓰는 집을 찾아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봉근아. 네가 일곱 해 동안 아비라고 부르던 좋지 못한 아비 나는 오늘 네가 생전에 좋아하던 미루꾸와 과자와 사이다와 포도주를 가지고 네 무덤 앞에 와서 너를 부르니 아아 봉근아, 아비의 정성을 받아라."

봉아제문(鳳兒祭文), 이광수

수필문의 예시

"십 분 만이면 권태가 온다. 풀도 싱겁고, 돌도 싱겁다. 그러면 그 외에 무엇이 있나? 없다.

그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질서도 없고, 충동의 재료도 없다. 다만 그저 앉았기 싫으니까 이번에는 일어서 보았을 뿐이다.

일어서서 두 팔을 높이 하늘을 향하여 쳐든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 본다. 그러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들 겅중겅중 뛴다. 그러면서 그 비명을 겸한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그만 눈물이 났다. 여북하면 저렇게 놀까? 이들은 놀 줄조차 모른다. 어버이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들 귀여운 애기들에게 장난감을 사다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뻗치고,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는 그들의 유희가 내 눈에는 암만해도 유희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하늘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 산은, 벌판은 왜 저렇게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는 조물주에게 대한 저주의 비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권태, 이상

https://ko.wikisource.org/wiki/%EA%B6%8C%ED%83%9C

사족을 덧붙이면 식사문은 이광수의 재발견이었고, 이상의 수필은 재독이었지만 G.O.A.T로 불리는 이유를 새삼 깨닫게 했다(이게 20대의 글!). 이태준은 작가로도 유명했으나 이 책의 유명세에 비해 월북으로 인해 정작 작품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훗날 그의 작품 역시 재평가를 받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