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다섯 달 정도 전에 내가 사는 필리핀 마닐라이 있는 서점 포스팅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이게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어서 어쩌다버니 실베까지 가는 영예를 얻었었어. 실베 고로시는 차치하더라도 독붕이들 사이에서도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언젠가 괜찮은 서점을 발견하면 사진이나 좀 찍어보겠다고 마음 먹었지. 근데 올들어 작지만 정말 좋은 서점 하나를 보게 되서 간단히 썰이라도 풀어볼까 해. 이번에 필리핀 정부기관에서 서류를 때야할 일이 있었는데, 내가 여기선 외국인이다 보니까 근처에 있는 지부에서는 못 떼고 구 도심에 있는 본원까지 갔어야 됐어. 이 동네에서는 행정처리에 얼마나 걸릴지 모르다보니까 넉넉하게 하루 정도 휴가내서 적잖은 시간을 들여서 갔는데 의외로 처리가 빨리 끝나버러셔 시간이 좀 붕떠버리고 말았어. 그래서 시간이나 좀 죽일 겸 근처 거리를 구경 좀 하다가 우연히 고즈넉해 보이는 서점을 하나 발견했어.

7599f372bd8a6cf523ed83ed479c701f792c6c93e7eeda73f17e6035f850a2a233a4096297f15b950c7644e17c158b2f207522c8

749cf673bd801bf2239af7e0429c701f55695bb94a2af067718ac11df4241eca6d3e4c0ab6dca6beeedb0e312f795d063ae5bbae

74ed8405b2806c8423eaf0e0409c701f02f9209aed708c368294bf6012d8ce22dc47fac330032484186efb2696b2dd0aec2548fe

이번이 들른 곳은 ‘솔리다리다드 (Solidaridad)’라는 아담한 서점이야. 이름이 스페인어로 연대라는 뜻인데 무려 1965년부터 58년간 성업해 온 곳이더라구. 처음 봤을 땐 그냥 동네 서점이려니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필리핀 내에서는 저명한 문학가인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가 설립하고 운영해오던 서점이라더라. 예전부터 현대 필리핀 지식인들의 소통창구로도 쓰여왔던 장소래. 점포 바로 앞에 가보니 입구 양 옆에 있는 통유리창에 매대를 놓고 책을 진열해놨었어. 이것 때문에 내 볼품없는 몸뚱아리가 그대로 비춰 보였는데 독붕이들 너른 마음으로 이해 좀 해주길 바라.

 

089f8976b5871bf2239b80ed449c706b0f5a0b212643cd2be9c1e29e453ffe9a167335206aaec4b1eeb237260a40a49014bb72

7f9ff277b7856cf6239d80e1419c701c2d14b111416da7863e2e33c158b70fc167d98004a8a073bb6ff0f93a3b680b44a0cd6d8d

서점 내부 전경은 대강 이렇게 생겼어. 참고로 위 두 사진은 내가 찍은 건 아니고 구글링해서 긁어온 건데 내가 사진 찍는데 영 소질이 없고 안이 좀 협소해서 서점 안을 한눈에 담기 힘들어들더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남의 것 좀 빌려왔음.

0c988671b38160f223e981e64f9c701e46a9ff2ed6ba0881def7bd48075d482cb536bf52e088df8cecaad3477c2557d8565c1597

789c867ec78a60fe23998693429c701b0411e61e6d5cda3853ae6ab85c8e9265dda7bc83954af4799433201f9023326822bddf71

08e98572b4851c8723eff0e0479c706a00b80f100e797ce6d14813575cfd3eabb176d11a9dc4e72a5b1693a9f22d00093ce6e925

거게 왼쪽 책꽂이에서 볼 수 있었던 책들은 바로 필리핀 관련 서적이었어. 이 나라 국어인 타갈로그어로 적힌 책들도 있고 영어로 된 책들도 있었음. 가장 눈에 밟혔던 건 필리핀 정치 관련 서적들이었는데 40년 전까지만 해도 필리핀을 철권 통치했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지금 필리핀 대통령이 이 양반 아들임.) 의 계엄령 시기부터 해서 강경한 마약 방지 대책이랑 정신나간 망언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로드리도 두테르테 전 대통령 비평 서적도 있었어.

7eecf673b2f41e87239d87e1339c70183006dee697a50354a3273881dcacd208af1d37e60247d259762a8a8784703c81e193d94d

78e8f17fc7f06ff72399f093379c706883cebe4ff469b45cf9f2f4d9aa5d85b8950b31e410f0d732f7f5457247c4017d7e31f46a

789ef405b5f11e87239e8196439c7018f62b103e2d2ee092f9f4cb8d189e06ff6d6e20d3599ca7eca31032e744f7931de1ce90e4

가운데 책꽂이에는 아시아 국가 관련 서적이 있었는데 단연 내 눈을 사로잡은 건 한국어가 적힌 책이었어. 현대 시조의 거목인 정완영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분의 시조를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번역한 책이었는데, 중국어로 번역하신 분이 중문학 좋아하는 독붕이라면 익숙할 만한 분이신 김태성 교수님이시더라.


79e4887fbd8369832399f7e3349c7018d00eb70b8d67b397cfb25b888e2de82f2e1959f1a52600a909d76dc7e75e8a824a7f7d06

75ee8702c7806ff023e7f797349c7065203c5dc12f1b9bce2b1da0da2e1cf8d28aa0da81fc5d3f332b5e374e9f31f2edb14ee89e


오른쪽 책꽂이에 꽃힌 책들은 세계문학이었는데 장서량 자체는 많진 않아도 대부분 독붕이들 취향에도 알맞을 정도로 구성이 알찬 편이었어. 영문학만 하더라도 셰익스피어 같은 고전문학부터 D. H. 로렌스 같은 근대문학은 물론이고 치누아 아체베, J. M. 쿳시, 조너선 프랜즌 같은 현대문학까지 웬만한 작가들의 작품은 하나씩 다 있더라구. 그외에도 희랍어 문학, 불문학, 라틴어 문학, 노문학, 남미 문학까지 분포도 꽤 고른 편이었어. 여기서 한 권 살까 했는데 최근에 이사를 갈 예정이라 짐 더 늘리는 것 같기도 하고 다들 가격대가 쎈 편이라서 포기함 ㅠㅠ

089e8375c3f1618323eaf2e6429c706a0b0d18ef73a5738c16f26ebfba0e49fab77df2b084aa27aa694fcb4f275909a4dba5e3b7

마지막으로 이건 헌책들만 모아놓은 책장인데 무려 75%나 할인해 주더라. 근데 딱히 끌리는 책은 없어서 사진 않았어.


간단히 감상을 남기자면 엄청 많진 않지만 밀도 있는 장서량 덕분에 굉장히 만족스러웠어. 이렇게 좋은 곳을 왜 이제야 알았나 싶을 정도였음. 왠만한 대형 프랜차이즈보다도 들여놓은 책들의 구성이 좋은 편이였고, 훨씬 학구적인 느낌도 들더러라. 혹시라도 필리핀 마닐라로 관광이나 출장가게 되는 독붕이가 있다면 이 서점은 짬 내서라도 꼭 가봐. 책 좋아한다면 후회는 안 할거야. 혹시라도 제법 괜찮은 서점을 발견하게 된다면 조금이나마 알려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할게.

- dc official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