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섬 라이브 하우스에서 진행된 [서울국제작가축제] 개막식 강연을 다녀왔습니다.
일전에 한번 오긴 했었지만 노을 지는 노들섬 정취가 제법 좋더군요.
<강연 요약>
위화 : 올해 서울국제작가축제는 언어의 다리를 건너라는 것이죠. 언어의 다리를 건너려고 한다면 번역이 중요할 것입니다. 번역은 문학의 관점에서 정말 중요합니다.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차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공감과 차이는 둘 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번 강연에선 "공감만큼 아름다운 차이"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예전부터 서양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가사를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사가 없는 서곡과 전주곡만 들었습니다.
오페라도 그랬습니다. 제가 처음 오페라를 관람한 것은 이탈리아 토리노였는데요.
당시 4명의 중국작가와 2명의 한국작가, 2명의 일본 작가가 동행했습니다. 바로 거기서 한국의 이문열 작가를 알게 되었죠. 그는 제가 알게 된 첫 번째 한국 작가입니다.
우리는 세계 축구경기 대회를 보고 오페라를 보았습니다. 오페라에 찾아온 남자들은 우아한 양복, 여자들은 우아한 드레스를 입었죠. 중국에서 온 4명의 작가들만이 후줄근한 차림이었습니다.
첫 오페라는 즐거움이 아니었습니다. 줄거리도 이해하지 못했죠. 청중 눈치를 보며 박수만 칠뿐이었습니다.
붉은색 의자는 편했지만, 음악에도 오페라에도 빠져들지 못했습니다. 시차 문제도 있어서 눈꺼풀이 자꾸 감겼고요.
음악에도 잠에도 빠지지 못해서 자세를 계속 바꾸었는데, 제 옆자리 앉아있던 이탈리아 신사께서 눈살을 찌푸리더군요. 뒤에 있던 숙녀는 제 등 뒤를 치더니 진정하라는 손짓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저희 4명은 후반부는 듣지 말고 뒤로 돌아가자고 합의했습니다.
10년이 지나 2번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이때는 실패라기 보단 제가 도망 갔다, 회피했다 라 해야겠습니다.
그즈음, 저는 다시 한번 오페라를 도전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나흘 내내 <니벨룽겐의 반지>를 보겠다고 계획을 세웠죠.
티켓을 구하기 여간 힘든 게 아니었고, 서양의 아는 지인(업체였던 것도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 안남. - 글쓴이 주)
이듬해 봄, 지인이 티켓을 구했다는 뉴스를 보냈습니다. 그때부터 검색을 많이 해서 <니벨룽겐의 반지>를 많이 알아보았죠. 모든 아리아의 가사를 베껴 쓰고 외웠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저를 완전히 무너지게 만드는 글을 보았습니다. 관람 후기였는데, 나흘 내내 니벨룽겐의 반지를 보는 것은 마음과 몸을 고문하는 것이라는 글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의자도 삐걱거린다고 했습니다.
저를 포기하게 만든 건 의자였습니다. 첫 번째 오페라에선 그렇게 안락한 의자였는데도 시끄럽다고 주의를 받았는데, 삐걱거리는 의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불 보듯 뻔했습니다.
저는 표를 구해준 지인에게 집에 일이 있어서 갈 수 없다고 썼습니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죠. 집안일은 늘 일어나니까.
세 번째로, 지난 13일에 라트라비아타 공연을 들었던 게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 오페라에서 '마음과 손을 얻었다'고 표현한 게 맘에 들었습니다. 손은 행동이니까. 손을 얻었다는 것은 곧 행동을 얻었다는 것이거든요.
저는 서울에 13일에 중국으로 돌아가서 15일에 울란바토르로 가는데, 그 하루사이에 또 뮤지컬을 들으러 갈 생각입니다.
이후 저는 미국인 편집자를 만나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습니다. 원래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었는데, 그 다음날 점심으로 미루더군요. 그 편집자와 저희는 레스토랑에서 만났는데, 왜 늦었는지 말해주었습니다.
연주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중국에선 당연히 통용되지 못할 얘기였습니다. 연주회 때문에 친구와의 약속을 빼먹는다니. 그 반대는 있을 법도 한 일이지만요.
그래서 제가 니벨룽겐의 반지를 취소했던 얘기를 들려주니까 굉장히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는데도 그런 표정은 처음 봤어요.
결국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한바탕 웃었습니다.
결국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겁니다. 공감, 물론 나쁘지 않지만, 가끔은 차이도 나쁘지 않다. 감사합니다.
사회자 : 서로의 얘기를 듣고 뭔 생각을 했는지 말씀해주시죠.
위화 : 곧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중국에 번역된다고 했는데 한달 정도 뒤에 나올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번역원에 요청을 했더니 워드로 된 파일을 보내주셨습니다. 첫번째 빨치산의 딸부터 아버지의 해방일지까지 소개가 되어 있더군요.
이 소설이 다음달이면 곧 나올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방금 정지아 작가님의 발표를 들으면서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솔직하고 심도 있고, 솔직함. 이건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지아 작가님의 솔직한 마음에 감동 받았습니다.
정지아 : 위화 작가님의 얘기를 들은 제가 죄송해졌어요. 언어의 다리도 이무나 건너는 게 아닙니다. 아직 번역이 안 돼서 ㅎㅎ 언어의 다리도 유명해져야 건널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전부터 만에 하나라도 위화 작가님은 본다면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싫은 것을 10가지만 말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저는 싫어하는 게 정말 많아요. 지금 당장 100가지라도 댈 수 있습니다.
위화 : 좀 생각해봐야 될 텐데요. 대체적으로 싫어하는 건 별로 없습니다. 싫어하면 피할 수 있구요. 좋아하면 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젊지도 않고, (제가 정지아 작가님보다 나이는 몇 살 더 많습니다만), 젊은이들은 싫어도 해야되는 일이 있지만,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만나야겠지만, 이 나이가 되면 하지 않아도 되고 보지 않아도 됩니다.
사회자 : 두분 다 최근에 하신 작업을 말씀해주시지요.
정지아 : 저는 원래 싫어하는 건 많고 하는 건 없어요. 고양이 4마리 쓰다듬고, 이런 게 제 일상인데요. 뜻밖에 제 책이 뜨는 바람에, 강연을 하느라 많이 바쁩니다.
강연을 하다보면 가식과 위선이 많이 늡니다. 가식과 위선을 털어내는 데 소주가 필요합니다. 어젯밤 마지막 한 일이 소주를 마신 일이었습니다.
위화 : 정지아 작가님께서 어제 저녁에 소주를 마셨다는데요. 저는 밤에 잠을 못자는 사람입니다. 밤마다 두시간밖에 못 잡니다. 낮에는 한 대여섯시간 잘 수 있습니다. (웃음) 그래서 유럽에 가면 잘 잡니다. 근데 어제 저녁에 잘 잤습니다. 그 덕에 오늘 행사를 힘을 내서 참여할 수 있는 거 같습니다.
제가 요즘 몸이 별로 안 좋았습니다. 얼마 전 코로나에 걸린 이후로 창작하기가 힘들더군요. 그래서 9월달이 유독 바빴습니다. 10월부터는 제가 좀 진지하게 집안에 완전히 틀어박혀 책을 쓰려 합니다. 그런데 10월에 또 코로나에 걸릴 지도 모르죠. 그래서 제 건강이 어떨지, 예측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잘 모릅니다.
정지아 : 코로나에 걸리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웃음)
위화 : 이미 두 차례 걸렸습니다.
사회자 : 정지아 작가님께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 대해 질문하고 싶습니다. 집 앞에 지리산, 집 뒤에 백운산, 그 사이에 섬진강을 끼고 있다는데, 작가님에게 이런 공간은 글쓰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요.
정지아 : 저희 집에서 아름답지 않은 건 저밖에 없습니다. (웃음) 예전엔 작은 동네가 굉장히 싫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익명의 도시로 나가는 게 꿈이었는데,
요즘은 구례가 편해요. 그냥 꾸미지 않아도 ‘나’일 수 있는 곳. 자기 모습을 정면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그런 점이 제 작가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회자 : 위화 작가님은 혹시 세계적인 독자들의 사랑을 실감하는지, 기억에 남는 독자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위화 : 한국출판사 사장님께서 <원청>이 제 작품 중에 가장 잘 쓴 글이라고 얘기를 하더군요. 저도 동의합니다. 새 책은 다 좋습니다. 그러나 모든 나라에서 환영받는 건 아닙니다. 일본에선 환영받지 못해요.
제가 일본에서 10권 정도 출판했는데, 6개 출판사에서요.
다시 말해 한 출판사에서 반응이 안 좋으니까 다시 출판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성공하지 않은 작가라는 것입니다.
모든 작가가 전세계에서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의 모국어권에서 성공하면 성공한 거라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에서의 성공은 그냥 팁이라 생각합니다. 모국어권에서 성공하는 것은 월급이라 할 수 있죠. (웃음)
사회자 : 작가님들의 향후 계획에 대해서 말해주세요.
정지아 :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썼더니 어머니의 해방일지도 쓰라는 말이 많았습니다. 엄마 관련해서 쓸 말이 더 많아요. 근데 엄마는 아직 살아계셔서... (웃음)
연애얘기, 섹스얘기도 쓸 수 있겠다 싶었는데, 친구들이 "네가?"라고 말하더군요. 원래 로맨스는 연애를 잘하는 애들이 쓰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필드에 있어요. 저 같은 사람들이 로맨스를 쓰는 겁니다.
위화 : 저도 비슷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인생 출판하고, 또다른 작품을 쓸 수 없느냐. 이젠 죽음을 써라... 형제를 썼으니 자매를 써라. 뭐 이런...
사랑소설은 참 쓰기가 힘듭니다. 저는 제가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평론가들이 저의 사랑소설은 별로라고 말하더군요.
이참에 제가 한번도 공개석상에서 말하지 않았던 얘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일본 소설가가 있는데, 매번 이분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마다 발음이 별로 좋지 않다고 주변에서 뭐라 하더군요.
가와바타 선생님은 저에게 가장 최초로 영향을 끼쳤던 문학가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사랑소설을 많이 쓰셨고 특히 여성 피부의 광택에 관련된 표현을 하는 데 아주 달통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여성을 접촉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소설을 읽으며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에 여성을 접촉했을 때 속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학은 때로 이렇습니다. 우리를 속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경제적으로 사기를 당하면 인생이 끝나지만 문학은 속았다고 느낀 다음에도 아주 큰 행복을 느끼니까요.
질문코너 - 시간 부족으로 한 명만 받음 - 한국인 대학원생이 중국어로 질문.
위화 선생님 안녕하세요.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현재 한국에서도 굉장히 많은 젊은이들이 경쟁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중국 젊은이들의 탕핑족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위화 : 저는 78~83년까지 5년동안 치과의사를 했었는데, 일하는 게 굉장히 싫었습니다. 치과의사는 매일 8시간동안 이빨을 뽑아야 했습니다. 문화관에 가서 근무를 하고 싶었죠. 거기는 출근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문화관에 가려고 소설을 썼던 겁니다.
문화관에 간 첫달에는 매일 오후에 출근을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6개월에 한번, 2주에 한번씩 출근을 했습니다. 그 이후엔 월급날에 월급만 받으러 갔습니다. 그때 이미 제가 탕핑족이었어요.
요즘 젊은 사람은 과거와는 아주 다르긴 하더군요. 연애하는 것도 싫어하고 다른 사람하고 싸우는 것도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장거리연애를 선호하고, 1년에 두번 만나는 것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사회자 : 이제 마지막으로 두분의 소감 한 말씀씩 해주시죠.
정지아 : 우리가 80억 중에 한명이잖아요. 서로가 다 다르고, 완전히 이해할 수 없구. 그렇더라도 늘 소통을 꿈꾸어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짧은 시간에 한마디라도 상대의 마음에 가닿는다면 아름다운 일이지 않은가.
위화 : 사실 여기 오기 전에 건강이 정말 좋지 않았습니다. 밤마다 잘 못 자기도 하고, 지병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편했습니다. 소파가 편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의자가 좋지 않으면 작가가 제대로 좋은 얘기를 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소파가 편안한 것이 큰 요인입니다. 소파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웃음)
- dc official App
위화가 가와바타 좋아한다는건 신기하네
가와바타한테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서 예전에 소설 집필할 때 가와바타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꽤 노력하기도 했던 듯
개추 혹시 이거 어케적음? 녹음 후에 따로 적은건가 ㄷㄷ
스마트폰으로 대충 받아적고 나중에 기억 떠올리면서 재구성함. - dc App
!!!!!!!!!!!!!!!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