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는 추리, 로맨스, 판타지 등과 함께 장르 중 한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SF가 유독 다른 장르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SF는 기본적으로 자멸적인 속성을 담보하고 있는 장르라는 점이다. 자연주의적인 분과들이 경험에 근거한 과학과 발을 맞추기 위해 늘 스스로를 부정하는 피학적 태세를 취하는 것처럼, SF는 과학의 신비에서 시작해 과학의 무감각함에서 멈춘다. 우주를 개척해 외계인들과 만나거나 신비로운 도구를 갖고 노는 고대의 SF는 과학이 냉정하게도 우리는 태양계조차 살아서 벗어날 수 없다고 단언한 순간 우스꽝스러워진다. 과학의 발전에서 최대한 눈을 돌리는 SF는 과연 이것을 굳이 S라고 불러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며, 반대로 과학의 발전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옮기고자 하는 SF는 애초에 F가 붙는 것이 맞는지 의문스럽다. SF의 두 다리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간다.



다만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볼 만한 점은 우리가 SF라는 데에 오히려 불필요한 규범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다. 하드 SF와 '외삽법'은 결코 SF의 근본은 아니며, 이 기준이 대부분의 SF를 부정한다면 사실 그것은 기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뜻할 확률이 더 높다. 그렇다고 이 기획을 폐지해야 하냐고 다시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우리가 새롭게 정의한 이 SF스러움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SF는 오히려 훨씬 더 냉대를 받으며, <스타워즈>나 <블레이드러너> 후속작의 애매한 흥행은 우리가 더 이상 이런 것을 그리 즐기지도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물론, <듄> 영화나 <사이버펑크 2077> 같은 게임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싶지만, 사실 두 작품은 모두 판타지적인 배경을 짙게 깔고 있기도 하다는 점을 염두할 만하다.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은 개개인에게 맡긴다.)



이런 문제의식이 과연 한국 밖에서 얼마나 대두되느냐는 둘째치더라도, 한국 SF 독자로서 한 가지를 생각해볼만하다. SF는 이 모든 장르들 중에서 가장 '현대'를 반영하는 장르다. 현대는 단순히 지금 이 순간만을 의미하지만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에서 생각되는 미래로의 연장선상, 미래에 대한 희망 혹은 절망, 그리고 그 밖의 최첨단스러운 현대성을 포함한다. 이러한 진보성은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론과 맞닿아 J.G.밸러드의 퇴폐로 이르기도 하였고, 정치적 진보성과 맞닿아 페미니즘, 아프로센트리즘, 트랜스휴머니즘 등으로 이르기도 하였다. (이쪽을 선호하지는 않아 굳이 이름을 열거하지는 않겠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는 SF를 사변 소설Speculative Fiction으로 재정의하기도 하였는데, 나는 이것이 당시가 사회에 대한 사변을 최첨단의 현대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며, 확장되는 세계와 외계인과의 조우 등의 자원적 공상을 꿈꾸던 시대의 SF가 딱히 사변적이지는 않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SF는 무엇을 다뤄야 하는가? 이 '과학적'인 소설은 슬슬 그 어느 것보다도 과학적인 주제를 다룰 때가 되었다. 칼 포퍼는 과학의 연역성을 수호하기 위해 과학은 기본적으로 반증가능한 가설과 이를 반증하기 위한 실험으로 구성되는, 죽기 위해 태어나는 가설들을 만드는 과학자들의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SF라는 테마는 이를 체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많은 옛 SF는 20년 전에 봐도 낡았고, 지금 보면 형편 없을 정도로 고리타분해보이곤 한다. (프리츠 랑의 영화 <M>을 볼 때와 <메트로폴리스>를 볼 때를 비교해보라.) SF는 미래에 비웃음을 사기 위해 태어나고, 실제로도 비웃음을 산다. 누구나 컴퓨터를 몸에 차고 돌아다닐 수 있다고 광고하는 옛 SF와 지금의 스마트폰을 보라. 이 멍청한 공상들은 비웃을 가치조차 없다. 그런 의미에서, SF는 기본적으로 과학이 그러하듯 자살을 담보하고 있는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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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단요의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를 주목할 만하다. 테드 창의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다큐멘터리>나 켄 리우의 <추모와 기도>를 연상시키는 페이크 르포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글은, 그럼에도 훨씬 더 근본적이고 파격적인 의미에서 현대를 다룬다. 흥미롭게도 그의 다른 SF 소설보다도 훨씬 SF 문법에 가까운 이 글은 우리가 SF를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며, 아직 우리가 현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현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기도 하다. 왜냐면 우리는 지금 우리의 끝을 진심으로 권고하는 현대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현대의 새로운 종교라고 할 만한 환경 보호, 자유주의,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가치관은 수많은 대안들 속에서 아무도 결코 선택하진 않겠지만 가장 빠른 지름길을 늘 옆에 두고 있다. 우리는 줄어들어야 한다. 분석적 실존주의로서 반출생주의가 우후죽순 등장하는 것은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세계는>은 지금 이 순간 현대의 도덕적 가치관을 가장 절묘하게 드러내는 수레바퀴라는 요소를 도입하고, 흡사 가속주의자들이 주장할 것처럼 이 가치관이 의도하는 변화를 최대한 밀어붙였을 때 우리에게 어떤 현대가 도래할지를 관찰한다. 이 세계는 대심문관이 예수에게 물러나는 세계이며, 세상을 이롭게 만들기 위한 넛지를 사방에서 몰아붙이는 시대이며, 모두가 모두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어하는 세계이며, 자신의 삶이 남들에게 악한 영향력을 주지 않기를 비는 세계이며, 그러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가장 선할 때 남에게 죽고 싶어 하는, 빠르게 세상에서 물러나 천국으로 가고 싶어하는, 애초에 지옥에 떨어질 사람을 만들지 않고 싶어 하는...... "이런 세계에서 살고 싶으십니까?" 뭔가 이상하다, 멈추자. 이것이 현대인가? 그러나 <세계는>은 멈출 생각이 없다. 이것은 이미 소설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를 집어넣고 우리 안의 현대성이 끓어올라 우리를 녹일 때까지 멈추지 않을 오븐에 가깝다.



SF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순간이다. 우리가 저 드넓은 우주가 등장하는 SF를 싫어하듯, 새로운 도구가 하나 나오는 SF를 싫어하듯, 이 모든 것이, 그럼에도, 있는 그대로인 SF를 싫어한다면, 사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새로움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이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꿀 SF를 원하는 것이다. 피터 와츠의 <블라인드 사이트>가 흔하디 흔한 우주 전쟁과 다양한 개조인간들을 소재로 다룸에도 극찬받는 것은 그것이 렘의 <솔라리스>보다도 더 효과적이고 현대적으로 우리 의식의 저주를, 냉담한 우주를 선사했다는 점에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전제로부터 뻗어나가며 우리를 폐기시키는 이 자학적인 장르를 우리는 사랑한다. 혹자는 그것이 창조적인 파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앞의 수식어가 필수적이지는 않다. 대안적인 현실은 현실의 가치를 그저 가능할 수 있는 수많은 세계 중 운이 좋아서 우리 앞에 있는 세계로 떨어뜨리기 때문에 매혹적이다.



그러니 우리는 SF가 Science Fiction에서 Speculative Fiction이 되었던 것처럼, 다시 한 번 현대의 용어로 재정의할 수 있다. 신비스럽고 만능에 가깝던 Science 대신 비판적이고 가상적인 Speculative로, 그리고, 자학적이며 파괴적인 Suicidal로. SF의 새로운 가능성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