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15f1caa180a76ac7eb8f68b12d21a1d361bc2c529d4ca


 

 

1

 

허삼관매혈기, 인생의 리커버 되기만 기다리던 찰나, 드디어 리커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봤다. 이게 웬걸, 이전의 인생, 허삼관매혈기의 밋밋함과 옛스러움에서 벗어난 뭔가뭔가인 현대적인 감각, 빨강과 초록을 대비한 감각, 비록 독봉이들은 싫어했지만 나는 모든게 마음에 들었다. 뭐라고? 위화 선생이 싸인까지 해준다고? 비록 늦게 일어나서 갈까말까 밍기적거렸지만 이 밍기적거림도 잠시 내 마음은 확고해졌다. 광화문으로 향했다.

 

 

2

 

예상에는 정문에 인생, 허삼관매혈기 쫙 깔아놓고 어서옵쇼 여기서 사서 저기로 가시면 됩니다 할 줄 알았는데 염병, 아무 것도 없었다. 벌써 다 치워버렸나? 예비표 나눠주는거 끝났나? 당황스러웠다. 어디보자, 저기보니 인생과 허삼관매혈기 리커버판이 진열되어 있긴한데 구매해도 번호표 받을 수 있는겨? 끝났나 싶어 걍 집에 가서 밥이나 먹을까 하다 이대로 물러서고 싶진 않았다. 물어봤더니 책을 구매해 이쪽으로 다시 오면 번호표를 준단다. 예비라 안해줄 수 있다는 안내와 함께, 상관없어요 감사합니다 번호표를 받았다.

 


3

 

343

 

343번인데 진짜 받을 수 있는겨? 걍 집에 가서 밥먹고 잠이나 자는게 안낫나? 계속해서 집에 가자는 유혹이 속삭였지만 나는 유혹들을 물리치고 사인회장으로 향했다.

 

사인회장을 보니 이미 계단엔 사람들로 가득찼다. 아니? 우리나라에 위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단 말인가? 내 주변엔 위화 아무도 모르던데? 위화 goat 맞나보네, 그럼 집에 더더욱 가지말고 기다려서 싸인받고 가야지. 근데 뭔가 이상하다. 우리나라 사람들 맞나? 스타일들이.. 뭔가.. .. 다른데..?

 

 

4

 

다들 기다리기 지루했는지 서서히 입을 연다. 아뿔싸 이것은 조선말이 아니라 듕귁말이다. 그렇다 이 자들은 모두 중국인이였다. 아니, 근데 그럼 위화 싸인 받으려고 중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황금같은 토요일 오후를 위화 사인회장에서 죽치기로 한다는 것은 중국인들의 문학에 대한 사랑이 도대체 얼마나 큰걸까? 역시 대국인가? 우리나라는 앞으로도 영원히 중국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건가? 국노(매국노란 뜻ㅎ)가 아닌 국자(애국자란 뜻ㅎ)로서 자괴감이 들었다.

 


5

 

드디어 위화가 등장했다. 환호가 터진다. 근데 싸인 빠지는 속도는 왤케 느리지? 나는 아무것도 준비안했는데 다들 문구에, 책에, 사진에, 악수에 별의 별걸 다 한다. 내 번호는 343. 이제 30번까지 들어갔는데.. 아침은 물론 점심도 안먹고 나와서 시선은 흐리멍텅하고 의식은 점차 희미해져간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내가 위화 사인회에서 사인을 받아야 하는 의미는 뭘까? 삶에 있어서 도대체 위화 사인있는 책이 왜 필요한걸까? 나는 얼마 전에 책의 물성에 따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었잖아? 그럼 굳이 기다릴 필요 없는거 아녀? 내 의식은 분열되기 시작한다.

 


6

 

사인이 주는 인생의 의미와 더불어 중국인 속에 혼자 남은 최후의 한국인이라는 인식이 더욱 나를 고독하게 했다. 주변에 한국인이라도 찾아볼까? 어째 한국인이 하나도 없지? 한국인이 있다면 무슨 말이라도 걸고 싶은 심정이였지만, 중국인들은 심지어 한국말을 섞어가며 중국말을 하고 있다. 고르고 골라 아 저 사람은 한국인이 분명해 하며 말을 걸려 하면 휴대폰엔 형체를 알 수 없는 간자체의 한자가 둥둥 떠다녔다. 내리쬐는 태양 속에 나는 뫼르소와 같은 이방인이였다.

 


7

 

나는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야 했다. 안에 들어가 다른 책들을 둘러볼 수도 있고, 스타벅스 가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거나 주변 음식점에 가서 요기를 하며 정신을 다 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뭐라도 떠올려야만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여기에 뭔 의미가 있어 ㅋㅋ 걍 바닥에 주저앉아서 오랜만에 서울 한복판에 나와서 사람 구경한단 셈 치고 사람들 구경하기로 했다.

 

대기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다보니 특이점이 있었다.

 

중국인인데 한국말도 섞어서 얘기한다. (근데 한국어 고수다. 한국말만 쓸땐 중국사람인걸 전혀 눈치 못채겠다)

관광 겸해서 온 애들이라면 캐리어가 있을 법도 한데 캐리어 든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숙소에 두고 왔을 수도 있겠지만)

얘네 어디 단체로 왔나? 먼저 사인받은 애들이 같은 무리들과 얘기 좀 하다 먼저 간다고 바바이 하고 가버린다.

다들 굉장히 어려보인다. 아무리 많이 쳐봐야 겉늙어보이는거 감안해도 다들 20대 초반처럼 보인다.

 

아 그럼 얘네 다들 위화 때문에 중국에서 들어와 사인받는 애들이 아니라 서울 소재 대학에 유학 중인 중국인들이구나? 어쩐지 위화사인받으러 여기까지 오는게 이상하더라니..

 

 

8

 

내가 가지고 있던 중국남성들의 스타일에 대한 인식은 두 분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한국에 들어와 살면서 한국화 되어 머리도 가꾸고 옷도 한국인스럽게 입고 다니고 한국에 동화된 중국인들과, 다른 한 부류는 스포츠 머리에 옷도 그냥 기본차림(가령 메이플스토리 기본복장)으로 남의 눈 신경 안쓰고 다니는 상남자 부류 스타일이였다. 오늘 보니 내 분류체계가 옳았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오늘은 상남자 전성시대였다. 옷을 뒤집어 입어 로고가 보이는 친구부터 해서, 유니클로에서 옷사입고 사이즈스티커 안 뗀 친구, 상남자식 스포츠머리를 한 친구까지.. 그들의 도가 부럽다. 자신의 길을 위해서라면 남의 시선따윈 신경쓰지 않는.

 

반면 중국여자들은 팔다리가 길쭉길쭉한게 이것도 국가 특성인가 싶었다. 나는 특별히 외모를 따지진 않지만 키크거나 팔다리가 길쭉한 사람을 좋아한다. 다음 주부터 중국어 배워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9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내 차례가 왔다. 지옥의 5시간 드디어 나는 5시간이란 혈투 끝에 위화의 싸인을 받는다. 아니 근데 출판사 누나도 나를 중국인으로 봤나? 간단한 영어로 뭔가 묻는다. 띠용, 저는 한국인인데요. 나는 상남자의 길을 추구하는 중국남성들의 길을 걷고싶다고 선언한지 1시간도 안돼 마음의 상처만을 남긴 채 눈이 풀린 사인기계 위화 선생에게 사인을 받았다. 셰셰. 그리고 회전문을 통과하며 유리에 비친 땀에 쩐 내 모습을 본다. 완전 중국인이잖아??

 


10

 

사인회의 의미 :

 

사인의 의미를 찾으려는 순간 사인회장은 지옥변으로 돌변했다. 도대체 왜? 나는 의미의 강박에 빠져버리고 만걸까?

 

내가 좋아하는 중국인 작가 위화 선생의 대작 인생과 허삼관매혈기의 이야기 자체가 내가 아름답다 여기는 로 하나의 의미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매사 의미를 찾으려는게 진짜 의미가 있는걸까? 나는 한국인과 중국인의 차이’(위화선생의 어제 대담 참고 ㅎ)를 인식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현재를 웃고 즐기는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으로써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가벼운 감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