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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쯤에, 딱히 한국에 번역은 없지만 나보코프를 처음으로 읽어보기에 <프닌>이 괜찮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게 딱히 사실은 아니겠지만 무슨 느낌인지는 알 것 같다. <프닌>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나보코프라는 작가의 특성을 한 데 모아 축약해놓은 것 같은 가벼운 글이다. 사실 <프닌>의 중심인물인 "프닌"은 오히려 나보코프의 글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가장 이질적인 인물이기에 더 그렇다. 나보코프의 글쓰기는 바로 이런 프닌 같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그렇기에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그런 글쓰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작중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시적 복수"라고나 할까.
프닌은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오십대 후반의 늙은 교수라, 사람들의 냉담함 속에서 학생이 거의 없는 러시아어 수업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의 영어는 너무나 서툴어 사람들에게 비웃음의 대상이 되며, 사람들은 실수투성이인 그를 보며 웃지만 그를 좋아하기도 한다. <프닌>은 거의 만화에 나올 법한 슬랩스틱과 서툰 영어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그것을 나는 구입하겠소." 하는 왈도체 번역-여러 우여곡절 속에서 프닌의 고통은 소극적으로 반복되다가 기어이 교수로서의 자리를 잃는 수준까지 다다른다.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서 점점 <프닌>의 어조는 묘해진다. 과장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서술자의 해이한 도덕관이나 <프닌> 속 다른 사람들과 슬슬 거리를 두고 싶어지는 기분과 함께 프닌을 더 이상 비웃을 수 없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실제로 그래서는 안 된다.
<프닌>의 서술자는 이제는 어느 정도 예상되듯 나보코프 자신이며, 나보코프는 프닌의 여자를 빼앗아 거의 죽일 뻔했으며, 그보다 능력도 뛰어나 그의 자리까지 빼앗곤 그를 자기 아래에 두려고 하다가 실패한다. 우리는 더 이상 <프닌>의 서술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순 없는데, <프닌>의 마지막은 프닌의 퇴임 이후 프닌의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흉내내는 연극으로 이 주제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이 흉내내며 비웃고 있는 이에게 가해져야 하는 모욕이 그 흉내 과정에서 관객이 느끼는 불쾌감과 함께 어느새 흉내내는 그 사람 자체에게 이전되는, 괴상한 시적 복수. 이는 사실 <프닌>의 서술자 자신을 일컫는 이야기다. 나보코프는 작중에서나 글 밖에서나 이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장치는 사실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이나 <말해라, 기억이여> 같은 자전적 글보다도 더 또렷한 진실성을 담고 있는 듯하다. 자조적인 자기 혐오.
문학적으로 <프닌>은 <롤리타>, <창백한 불꽃>, <아다> 등과 상당히 맞닿아 있으며 사실 우리는 실제로 이 작품들의 편린을 엿보곤 한다. <프닌> 속 프닌은 <롤리타> 속 롤리타가 왜곡되어 표현된 만큼 왜곡되었을 것이며, <프닌> 속 나보코프는 <창백한 불꽃> 속의 킨보트만큼이나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하며, <아다> 속의 반 빈만큼이나 능숙하게 자신의 부도덕함을 감춘다. 또한 <프닌>의 다른 인물들이 너무나 무의미하고 빈번하게 등장했다가 순식간에 메인 플롯에서 사라지고, 서사적으론 아무런 가치도 주어지지 않으면서 이따금 배경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광경들은 나보코프가 니콜라이 고골에 대해 쓴 분석을 연상시킨다. 물론, 가장 영향력이 강한 것은 그의 <돈키호테>에 대한 분석일 것이다. 프닌은 현대적으로 부활한, 옛 유럽에 대한 낭만이 가득한 러시아의 기사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키호테를 비웃는 잔인한 공작 부부다.
하지만 나는 <프닌>을 좋아하지만 이 기획이 다소 어긋나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돈키호테>의 그로테스크함과 <프닌>의 개그는 사실 좀 다르다. <프닌>의 개그는 오히려 굳이 따지자면 우드하우스 같은 작가들에서 느껴지는, 훨씬 만화적으로 추상화된 그런 차원에서의 개그에 가깝다. 아무리 <프닌>이 프닌의 과거 회상이나 고뇌를 넌지시 드러냄으로서 나보코프가 생각하는 더욱 더 해상도가 높아지는 실재를 드러내보이려고 해도, 이 차원에는 애초에 그러한 정보가 없다. 프닌은 <프닌> 속에 포착된 순간 이미 만화적으로 표상되었고, 그 표상과 실재 사이의 괴리는 우리에게 불편함보다는 외려 어색한 즐거움을 준다. 이것은 <프닌>을 쓰던 나보코프의 시기와 지금의 유머가 너무 달라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는 현대-물론 어쩌면 미국만의?-유머의 근본에 자리잡고 있다. <사인필드>, <커브 유어 엔수지애즘> 같은 시트콤이나 음악, 영화, 게임 등의 많은 매체에서 <프닌>과는 정반대의 의도로 <프닌>과 유사한 일을 한다. 버나큘라Vernacular스러움은 나보코프가 프닌을 그려내 우리가 비웃도록 하는 것과 비슷한,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약간 불쾌하고 불편해지는 선을 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그것에 진심으로 즐겁게 참여하기를 권유한다. <프닌>이 우리가 그 사실을 인지하도록 만든다면, 애초에 현대는 그것이 딱히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데에서 이 괴리가 드러난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이 물건을 광고하고 있기에 좋은 말만 하고 있다는 걸 그 자체에서 인정하는 반어적인 광고처럼, 내용물의 의미를 무시해 괄호 속에 밀어넣은 다음, 내용물의 형식을 통째로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프닌>은 이 경우 프닌을 비웃는 나보코프를 비웃는 우리를 비웃는... 우리 자신?
애석하게도 여기에는 어떤 긍정적인 요소도 없다. 라블레를 토대로 르네상스 시절의 웃음의 카니발을 분석하던 바흐찐의 다성적 웃음은 현대에 하나의 조성으로 그저 하울링만을 일으키며 웅장하고 거대하게 증폭되는 두터운 하나의 웃음으로 변한다. 일종의 크레센도코어crescendo-core라고 할 수 있을 테다. 그런 의미에서 <프닌>은 다소 짧은 시기 사이에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게 된 유물이나 다름 없다.
P. S. 번역본이 나올 줄 모르고 원서로 읽은 적이 있는데, 당시에도 힘들었던 엉터리 영어와 어색한 문장들을 번역본에서도 왈도체와 직역투로 만나게 되어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끔찍했다.
굿
<푸틴> - 블라디미르로 봤네 ㄷㄷ - dc App
아 프닌 도서관에 신청해야겠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