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75e48576bc8b6af33a87e9a1479f2e2d6880275f3743d252692dd413


인기가 엄청나던데 나는 개인적으로 좀 노잼이었던 책이다. 관심 없는 내용(예술과 윤리의 관계)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 읽는 데 한참 걸린 듯... 그래도 제4부만큼은 상당히 재밌었다. '공포의 역설' 혹은 '비극의 역설'을 다루는 파트인데, 내가 요즘 관심 있는 공포문학과 관련 깊은 내용이라 쫌 재밌었음. 그래서 이 부분만 조금 정리해 보려고 한다. 



공포의 역설 혹은 비극의 역설은 공포나 슬픔 같이 불쾌한 감정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쾌를 느끼는 기묘한 현상을 가리킨다. 일상 생활에서 아빠를 살해하고 유산을 가로챈 숙부에게 복수하다가 자기까지 죽어버리는 일을 겪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초월적인 존재를 만나 정신이 나가버리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 작품에서는 이런 비극과 공포를 적극적으로 탐닉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이야기가 덜 비극적이라고, 덜 공포스럽다고 불평하기까지 한다. 이런 기묘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비극의 역설은 매우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주제여서 무려 데이비드 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흄은 슬픔을 주는 대상(슬픔의 원천)과 쾌를 주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역설이 아니라고 답한다. 다시 말해, 비극의 스토리가 슬픈 건 맞지만, 우리가 즐거움을 느끼는 대상은 비극의 플롯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을 공포영화에 응용해 보자면, 우리가 즐거움을 느끼는 대상은 스토리의 플롯이나 화려한 카메라 기법, 음향효과 등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흄의 답변 여전히 불만족스럽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인지는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흄과 동시대의 에나 바볼드라는 사람은 서사에서 비롯되는 긴장감이 점차 해소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쾌감을 느끼기 위해 잠깐 불편함을 감수한다고 주장한다. 긴장감의 불쾌함보다 해소를 통해나 쾌감이 더 크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하지만 흄과 마찬가지로 도대체 왜 그런 것인지는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한다.



노엘 캐럴은 이렇게 서사와 플롯에서 해답을 찾는 입장을 이어받아 역설을 해결하려고 한다. 캐럴의 경우에는 괴물의 정체와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발견'하는 플롯에서 즐거움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공포물에는 항상 상식을 벗어난 괴물이 등장하고, 괴물의 등장과 동시에 감상자에게는 '알고 싶은 욕구'를 발동시킨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공포물들이 괴물의 정체와 사건을 전말을 밝혀나가는 플롯을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캐럴의 '공포물의 즐거움'이란 미지의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발견의 즐거움이 공포의 불쾌함을 압도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공포물을 즐긴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하지만 캐럴의 답변에도 비판이 있다고 한다. 베리스 거트는 플롯의 즐거움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공포물의 플롯이 다 고만고만해서 거의 대부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캐럴의 주장대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플롯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면, 대부분 예측 가능한 플롯은 공포의 불쾌감을 압도할 만한 즐거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또 플롯이 아닌 공포 자체에 의미를 두는 감상자들이 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발견의 플롯은 뒷전이고 충분한 공포감을 느껴야 만족하는 감상자가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러한 비판이 굉장히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거트의 비판과 비슷한 이유로 어느 정도 실망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같은 경우, 솔직히 읽다보면 플롯이 조금 반복적인 느낌을 많이 받곤 했다. 특히나 앞세대 작가의 작품에서 차용한 듯한 이야기를 읽을 때에는 얼추 스토리의 얼개가 예상되기도 했다. 다른 사례로는 네이버 블로그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에드거 앨런 포 독후감들이 있겠다. 포 독후감들을 찾아보면 별로 무섭지 않아서 실망이라는 감상이 꽤 많은 편이다. 거트의 비판처럼 플롯이 아닌 '공포'자체가 즐거움의 대상인 감상자들이 있다는 뜻이다. 또 발견의 즐거움이라는 해결법에는 내 나름대로 불만이 있기도 하다. 흔히 코스믹 호러라고 부르는 공포물에서는 뭐 하나 제대로 발견하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견에 의미를 두고 아서 매켄이나 럽크, 리고티의 글을 읽다보면 오히려 허망하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장르에 환장하는 사람을 널려있고,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이다. 이런 경험을 되돌아 보면 플롯은 공포물에서 찾을 수 있는 한 가지 즐거움일 뿐이지 역설 충분히 해결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불온한>에서 소개하는 해결법 중에는 통제주의가 꽤나 괜찮아 보인다. 통제주의자들은 우리가 느끼는 공포나 불쾌함이 선을 넘지 않도록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낀다고 설명한다. 번지점프를 할 때 로프를 달고 뛰어 내리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로프라는 통제가 없었다면 자유낙하는 그냥 공포 그 자체일 뿐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리고티의 <네테스큐리얼>에서도 통제주의와 유사한 구절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미스터 그레이가 섬을 묘사하는 순간부터 그의 이야기에 갑자기 어떠한 매력이 깃들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심오한 악에서 비롯된 불길한 마법이었지만, 우리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랑과 공포를 한 순간에 모두 경험할 수 있었죠.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면 우리는 세상에 편재한 악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파멸을 향한 두려움이 다시 깨어나 활력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을 거예요. 반대로 그 거리가 너무 멀었다면 우리는 평소보다 더 무관심하고 무감각해졌을 거예요."



리고티에 따르면 우리가 공포물을 즐길 수 있는 이유는 공포물과 우리의 거리가 적절하게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거리감을 평가하는 것을 보면, 이런 거리감도 작가가 나름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뉘앙스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여기서 말하는 거리감이라는 게 통제와 유사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보면 통제주의가 꽤나 매력적인 것 같다. 번지점프 같은 예시도 그럴싸 하고, 뛰어난 예술가의 직관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통제주의를 단 두 페이지만 설명하고 넘어가 버린다... 다행히도 참고문헌을 보면 다양한 논문과 서적을 추천해 주고 있으니 이쪽으로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런 비극의 역설과 관련된 논문으로는 최도빈, 조선우, 최근홍 같은 한국인 미학자들의 논문을 소개하고 있는데, 너무 어렵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불평불만으로 감상문을 시작했지만, 꽤나 재밌는 생각거리를 찾게 되어서 나름 유익했다고 할 수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