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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펙토르는 참 알기 어렵게 매력적인 작가다. 분명 그 야성적인 이미지 속에서 무언가가 느껴지는데, 무엇을 느꼈는지를 설명하려면 제대로 말이 나오질 않는다. 문제는 그녀의 글쓰기 속에서 어떤 신비적인 체험이 언어 바깥의 배경을 경유해서 전달되어야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삶 그 자체 속에 있는 약동하는 힘이 현재 우리가 삶을 살고 있는 방식이 아닌 방식에서도 목격될 수 있으며, 그 체험은 당연하게도 인간의 언어만으로는 전달될 수 없다. <G. H.에 따른 수난>은 어떤 인외의 아동의 형태 속에서 삶의 경험을 재조립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계속 오지만 그 느낌을 다른 어떤 인간적 감각으로도 표현하기 힘들다.
이 점을 감안하여 <별의 시간>을 읽어보면 이 글이 무엇에 대한 글인지 이해할 수 있다. <별의 시간>은 한 남성 서술자가 가진 것 하나 없지만 자신의 신세에 만족하는 여성 주인공에 대한 글을 쓰는 내용으로, 그는 그녀를 가능한 한 삶 그 자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그러나 그 삶 자체에 행복을 느끼는 인물로 그려내고자 노력한다. 그녀의 반응은 늘 스스로가 스스로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딱히 될 수 없다는 체념 아닌 체념으로 일관되고, 동일한 음식과 업무 속에서 그녀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간다. 외려 그녀의 행복이 깨지는 순간은 그녀가 이 이상의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예언을 들었을 때이며, 그 이후 급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폭발한다.
그는 그녀를 묘사하거나 그녀의 사건에 대한 평가를 하는 데에 인색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바깥에서 그가 달성하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는 탓이다. 어떠한 경제적, 사회적 규약에도 얽매여 있지 않은 삶, 그리고 인간종이라는 생물적 한계에서도 벗어나는 어떤 근원적인 삶에 대한 경험. 그는 이 삶을 그녀 속에 포착한 다음, 그녀에게 반응을 주었다가 바로 그 순간 깨뜨린다. 자동차에 치인 순간 새어나오는 피 속에서 태아와 같은 자세를 취한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이 한 평생 가졌던 삶에 대한 태도와 동일한 방식으로, 생물적인 삶 이상의 한 세계 속의 삶을 경험한다. 탈인간적인 삶의 태도로만, 그럼에도 지금의 삶이 아닌 형태에서만 이를 진정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세계와의 일치감 같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이 과정 속에서 그는 자신이 고갈되는 것을 느끼고,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들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폭발을 쓰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저 긍정하며 글을 멈춘다. 이 이상 그가 말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을 아는 탓이다. 이 이상의 글은 글 밖의 배경을 빼곡히 채운 체험을 조금씩 갉아먹으며, 그것이 가질 수 있었을 가능성을 계속해서 소거해나갈 것이다. 이것은 합일인가? 아니다. 이것은 초월인가? 아니다. 그 경험이 무엇이 아니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는 목록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A가 아닌 B, C, D 등등을 나열하는 부정적 정의만으로는 도저히 A를 전달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가 글을 쓰며 느끼는 회의감과 불안함, 망설임과 부족한 자신감은 당연한 일이다.
기실, <별의 시간>을 쓰고 있는 리스펙토르 본인과 함께 생각해보면 이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별의 시간>의 서술자가 자신과 최대한 다른 것의 삶을 통하여 이 체험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처럼, 리스펙토르의 글 속에 등장하는 이들 역시 그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체험을 통해 그녀를 포함한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거듭났다. 그녀는 그런 전혀 다른 삶을, 그 속에서도 강렬하게 타오르는 어떤 추상적인 삶을, 그녀가 글쓰기를 통해서 저 밖에다 그림자를 드리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마 <별의 시간>은 그녀의 글 중 가장 직설적이고 쉬운 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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