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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쯤에 지나가는 말로 <k-펑크>를 어딘가에서 출간할 계획이라고 들었긴 했지만, 솔직히 엎어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상당한 분량의 글이기도 하고 수요가 그리 많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그러나 그 몇 년 사이에 한국은 정말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진지하게 읽어볼 만한 분위기가 되었으며, 다양한 비평가들의 레퍼토리에는 어느새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 마니아> 대신 마크 피셔의 훨씬 더 독기 넘치는 '대안 없음' 상태에 대한 진단이 들어섰다. (흥미롭게도 이런 상태는 한국이 그렇게나 내세웠지만 그리 효과를 보지 못하던 K-문화가 세계에서 정말로 먹히기 시작한 것과 발을 맞춘다. 외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마 실제로는 어떻든, 가장 화려한 관심 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국가의 아이러니를 느끼고 있지 않나 싶다.) 아마도 그런 점에서 <k-펑크>의 발간은 시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으로 <k-펑크> 1권은 책, 영화, 텔레비전에 대한 비평을 모아서 낸 책인데, <자본주의>에서 내세우는 '대안 없음'의 서사는 여기에서 서서히 자라난다. 밸러드에 대한 비평에서 그 점은 특기할 만한데, 그는 밸러드가 <잔혹 행위 전시회Atrocity Exhibition>에서 메시지 없이 그저 현대적으로 보여주는 현대의 병리학에 감탄하다가 점점, 그것이 주류 문화에 독기 없이 흡수되는 것을 목격한다. 아마도 이 점에서 마크 피셔는 점차 후기 자본주의가 반자본주의적인 것을 아이러니하게 자신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것으로 성립된다는 데에 강한 확신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월E>나 <아바타> 같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여주는 유치하기까지 한 '악한 자본가 및 자본주의 문화' 대 순수한 회귀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왜 나는 로널드 레이건과 섹스하길 원하는가>나 <크래시>, <콘크리트의 섬>, <하이 라이즈>를 보면 할 말을 잃게 되는 걸 생각해보면.



물론 이것은 '대안 없음'이 전체 시스템에서 기인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피셔의 접근법을 보여주는 예시는 <브레이킹 배드>로, <브레이킹>은 뛰어난 인기와 함께 시청자들에게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악의 평범성을 아주 완벽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피셔가 보기에 애초에 <브레이킹>이 성립되는 이유는 <브레이킹>의 악이 미국 서부식 야만성으로 인해 건설되는 탓이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가 정의하는 '선한' 남편으로 남고자 하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나쁜' 짓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빌붙거나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돈을 버는 것이 더 낫다는 태도"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유능해지고자 하는 필사적인 동기는 결국 그를 그 동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삶을 사는 데에 기여했다. 이 시점에서 피셔가 그의 "아버지"스러움을 언급하면서도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쪽으로 틀지 않은 것은 감탄스럽다. 문제는 그 밖에 있다.



기본적으로 피셔는 현재 좌파를 대표하는 정체성 정치에 대해 비판적이며, 이 "뱀파이어 성"이 전체의 문제를 매우 국소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데에만 만족한다는 데에 경종을 울린다. 무엇보다 그것이 우리에게 윤리적인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데에 더더욱. '대안 없음' 상태와 합쳐지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보다 나은 것을 꿈꿀 수 없도록 하는 대신, 우리 중 누구라도 남들보다 낮아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문화적 빈곤을 요구하며 아이러니하게도 진정으로 획일화된 대중을 우리 스스로가 요구하도록 만든다. (이쯤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안다: 취향을 주입하지 말라' 라는 반론에 대해서는 솔직히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우리는 베토벤을 듣기 전까지 베토벤을 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비판 대상이 되는 싸구려 매체들조차도 그것들을 보기 전까지 그것을 원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취향은 늘 형성된다.)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고 우리가 뭔가 좋은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상태에 기생하는 이 정체성 정치와는 별개로, 우리의 그 윤리적 결여에 대한 부채 의식은 우리를 여러 측면에서 좀먹는다. 존 버거가 신문의 해외 잔혹극 사진 보도가 우리가 그 충격적인 이미지에 대해 본능적으로 부채 의식을 갖게 만들다가, 결국 우리가 당연하게도 거기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점차 느끼게 만들면서 우리를 윤리적으로 소격시킨다고 말한 것과 흡사한 점이 있다. <더 박스>에 대한 피셔의 분석은 이를 보여주는 예시로, 이는 아마 우리에게도 꽤나 익숙할 '버튼을 누르면 큰 돈을 받지만 당신이 모르는 누군가가 죽는다'에 대한 매시슨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버튼을 누르는 행위는 당연하게도 직접 사람을 죽이는 것과는 전혀 다르며, 아마도 이 버튼을 누르는 행위에서 시작되는 수많은 인과의 사슬 끝에 그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을 알 뿐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풍요로운 일상이 저 바깥의 수많은 후진국 사람들의 착취-당연히, 죽음까지 포함하는-위에서 성립한다는 말을 듣는 것과 흡사하다.



우리는 물론 대안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이 커피 한 잔을 마시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것은 스타벅스를 위시한 수많은 대규모 커피 회사들이 당신 이외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커피에 대한 욕구를 강요하는 것에 거의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며, 그렇다고 당신이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할 수도 없다. (콜롬비아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 모두 혁명을 일으켜요-와우!) 여기에서 우리는 현대 "세계와 세계성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며 커피를 주문하고, 최대한 그 모든 것을 없던 것처럼 취급한다. 어차피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물신주의적 부인"을 하는, "'믿는다고 가정된 주체'가, 즉 대타자"가 커피를 주문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저 "부정적 선택", "즉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어차피 "우리 모두 글로벌 자본주의의 매트릭스에 너무나 복잡하게 파묻혀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단순히 빠져나오기란 불가능"한 탓이다.



애석하게도 이 모든 이야기는 설득력 있지만, 여전히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 다시 한 번,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하나의 이론화된 우울증이나 다름 없다는 지인의 단언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우리는 <k-펑크>를 읽을 만한 상황에 도달했지만, 이미 알고 있었듯 그것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그저 "출구 없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