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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2차 세계대전 중 집필되어 1945년에 초판이 출간되었다. 따라서 저자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편견이 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조국의 온라인상 말잔치가 조만 대장경으로 자신을 공격하듯이, 이 책의 본문을 가지고 러셀을 평하고 싶다.


철학자들은 사생활 속에서 빚어지는 우연한 사건들을 대체로 도외시함으로써 마음의 여유를 찾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철학자들조차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문제가 되는 훨씬 큰 선이나 악에 무심할 수 없는 법이다. 철학자들은 난세에는 위안을 찾고, 태평 시대에는 훨씬 순수하고 지적인 연구에 관심을 쏟는다.


어쨌든 이 책은 위안을 위해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위안은 저자 특유의 공격적 문체에 따른 모두 까기에 따른 카타르시스로 표현된다.



본문으로 들어가면 철학이 가진 위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대와 중세에는 신학이, 그리고 근현대에는 신학을 대체한 과학이 철학을 공격한다. 따라서 서양철학사를 따라가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철학은 발전하는 학문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저자에 따르면 자기 진영인 분석철학으로 발전하는 뉘앙스이다. 물론 이러한 결론은 당연히 이후의 철학에 비판을 받게 된다. (러셀은 19세기 중반과 20세기 중반에 속한 인물이었다.)


신학과 과학 사이에 자리 잡고 양측의 공격에 노출된 채,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 이 무인지대No Man’s Land가 바로 철학의 세계다.


저자에 따르면 철학은 기계론적 계보와 목적론적 계보가 이어진다. 이를 다시 한번 후에 수학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미국 힙합의 이스트 코스트, 웨스트 코스트처럼 각기 진영에 속한 이들은 자신의 지적인 선조들을 대변한다. 아래의 글에 따라 표로 도식화해 보았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볼 때, 기계론적 설명이 과학적 지식의 진보를 주도한 반면에 목적론적 설명은 그렇지 못했다. 원자론자들은 기계론적 질문을 했고, 기계론적 설명을 시도했다. 그들의 뒤를 이은 철학자들은 르네상스기가 도래할 때까지 목적론적 설명에 더욱 관심을 갖고 활동했기 때문에 과학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피타고라스 시대 이후 철학사에는 주로 수학에서 영감을 받아 사유를 펼친 철학자와 경험 과학에서 영향을 더 많이 받은 철학자가 있었다. 플라톤과 토마스 아퀴나스, 스피노자와 칸트는 수학에서 영감을 받은 수학파에 속하고, 데모크리토스와 아리스토텔레스, 로크부터 현대까지 이어진 경험주의자들은 수학 반대파에 속한다. 우리 시대에 수학의 원리에서 피타고라스주의를 제거하고, 인간 지식의 연역적 부분에 대한 관심과 경험주의를 결합시키는 일에 착수한 철학 학파가 등장했다.


러셀은 서양철학사를 강해하며 분석철학을 대놓고 옹호하였다. 위의 글은 논리분석의 기술로 모든 철학을 아우를 수 있다고 선언한 셈이다. F.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에서 내린 자유주의의 승리처럼 성급한 결론 아니었을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자. 저자는 우상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바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이다.


플라톤에 대한 칭찬은 언제나 옳다고 받아들여졌으나 그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는 위대한 인물들이 공통으로 놓이게 되는 운명이다. 나의 목적은 정반대다. 나는 플라톤을 이해하고자 하는데, 거의 숭배하지 않고 플라톤이 현대 영국이나 미국에서 전체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인 것처럼 다룰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인물이 된 러셀 역시 후기 자본주의에 적합한 철학자일 뿐이다. 어쩌면 플라톤에 대한 인신공격은 자기 객관화가 조금 부족해 보인다.


대체로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철학은 도시국가에 적합한 사고방식을 표현했다고 말해도 좋다. 스토아 철학은 세계적 전제정치에 알맞고, 스콜라 철학은 교회 조직의 지배를 지성의 힘으로 표현한 산물이며, 데카르트 이후나 적어도 로크 이후 철학은 상업에 종사하는 중산 계급의 편견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경향이 짙었다. 마르크스주의와 파시즘은 현대 산업국가에 적합한 철학인 셈이다.


특히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비난이 좀 심한 편이다. 러셀은 지나치게 귀족적이고, 문화적 절대주의자 입장을 취했다. 모두가 그와 같이 고결하진 않으리라. 헴록(독미나리)을 원샷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머니를 찾는 게 무슨 대수인가?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앞두고 보여 준 용기는 신들의 회합에 합류하여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리리라고 믿지 않았더라면 더욱 비범해 보였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선대 철학자들과 달리 사고가 과학적이지 않고 우주가 자신의 윤리적 기준과 일치한다고 증명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이것은 진리를 배반하는 태도이며, 철학자가 저지르는 가장 큰 죄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한 인간으로서 성인들의 성찬에 참석하도록 허락받았다고 믿을 수도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로서 학자들이 가는 연옥에 오래 머물러야 마땅하다.


개인적으로 스토이시즘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 조소는 인정하는 바이긴 하다. 단, 기독교에 비해 커뮤니티에 도움은 안 되는 학문으로 평가절하한다.



사실 스토아학파의 철학에는 지기 싫어하는 마음으로 버티는 약간의 오기sour grapes가 들어 있다.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지만, 선해질 수는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선한 사람이라면 불행은 문제될 것이 없는 척해 보자는 말이다. 이러한 학설은 영웅적이고, 악한 세계에서는 유용하지만 참되지도 않고, 근본적으로 성실하지도 않다.


고대철학도 모두 돌려깠지만, 중세 철학 역시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결론이 미리 주어진 논증의 발견은 철학이 아니라 특별한 변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아퀴나스가 고대 그리스와 근대라는 두 시대의 최고 철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 플로티노스와 스피노자에 대해서는 개인적 고결성 때문에 평가가 좋은 편이다. 아래는 스피노자에 대한 글이다. FYI, 희망과 공포, 겸손과 후회가 악한 이유는 인과관계의 몰이해 때문이다.


쾌락 자체는 선하지만, 희망과 공포는 악하며 겸손과 후회도 악하다. 그러니까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사람은 이중으로 비참하거나 허약하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유를 분석한 내용이다. 영국이 공산화가 될 수 없는 적절한 설명이 맞다고 본다. 참고로 마르크스는 생애 후반기를 런던에서 보냈다.


진보한 나라에서는 실천practice이 이론theory에 영감을 불어넣지만, 덜 진보한 나라에서는 이론이 실천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이러한 차이가 이식된 사상은 본토에서만큼 성공을 거두기 어려운 이유다.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로 유명한 경험주의 철학자이다. 벤담의 사상은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었다. 반면 러셀은 니체는 파시즘을,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이끌었다고 한다. 니체는 들뢰즈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계를 통해 재평가가 이루어져 사후의 명성이 그를 압도할 지경이다.


철학자 가운데 니체는 서슴지 않고 소수의 편에 섰고, 마르크스는 전력을 다해 다수의 편을 들었다. 아마 벤담은 상반된 이익 관계에서 비롯된 갈등을 조정하려고 애쓴 유일하게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벤담은 양측 모두에게 반감을 샀다.


베르그송의 생철학은 난해하고 문학적이라고 평가절하된다. 그를 비판하는 내용은 참 재미있으므로 이 책의 백미라고 볼 수 있다. 직접 한 번 보길 바란다.


물론 베르그송의 철학은 대부분, 아마도 대중적 인기를 얻은 부분은 논증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논증으로 뒤집히지도 않을 것이다. 상상력이 넘치는 베르그송의 세계관은 시적 역작으로 평가되며, 대체로 증명될 가능성도 반증될 가능성도 없다.


마지막에 분석철학을 배치하여 교묘하게 홍보하며 이 책은 끝을 맺는다.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 신 플라톤주의의 일자, 중세의 신(神) 증명, 칸트의 물자체 X 등 시대를 바꿔가며 존재론을 둘러싼 그 수많은 논리가 기술 이론을 적용하면 사실은 논리학, 일종의 말장난에 불과했다는 결론은 꽤 재미있다.


“x가 c라면 ‘x는 황금이고 산이다’라는 진술이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c라는 독립체는 없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 “황금산은 실존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그 의미를 둘러싼 수수께끼는 사라진다.


나는 이 책의 말미에 적은 (저자는 정작 실천하지 못한) 선입견에 대한 생각을 통해 바람직한 철학자의 마인드 셋을 생각하게 되었다.


진정한 철학자는 모든 선입견을 검토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진리 추구에 어떤 제한을 받게 되면, 철학은 공포심으로 마비되어 ‘위험 사상’을 퍼뜨리는 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검열을 준비하게 된다. 사실 진리 추구에 제한을 둔 철학자는 이미 자신의 탐구 활동에 검열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