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오쩌둥의 마지막 혁명은 그의 오랜 경력 가운데 가장 큰 비극으로, 그리고 중국 인민에게 비참한 결과를 안겨준 채 막을 내렸다. 1966년 72세의 마오쩌둥은 자신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고 명명한 재앙적인 동란을 초래한 마지막 혁명극을 무대에 올렸다. 이것은 (자신의 눈에) 빈사상태에 빠진 혁명을 다시 살려보려는 마오쩌둥의 처절한 마지막 시도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했다. 그것도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엄청난 실패였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 p.427.
#2
전통적인 관점과 달리 우리는 문화대혁명을 단순히 마오쩌둥의 마지막 권력 투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이를 새롭고 이상적인 사회에서 새롭고 이상적인 인민을 창조하는 자신의 이상주의적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진지하지만 비극적 결함을 숨길 수 없었던 그의 노력이었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 중반부터 마오쩌둥은 사회 정치적인 관계에서 사회주의식 개조가 부족하다고 믿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건설 이후에도 여전히 인민들은 타성에 젖어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에 빠져 있었다.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자아에 빠져 자본주의로 돌아갈 몽상에 젖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미끄러지듯이 그쪽으로 빠지는 것을 허락한다면 공산당 자체가 퇴보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중국 문화에서 오래된 전통적인 가치를 무너뜨리지 않은 상태에서 공산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에 도달하게 된 이유다. 하지만 그는 분명 인성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 이러한 잘못된 판단이 문화대혁명의 실패를 야기했고, 마오쩌둥의 전체 프로젝트를 어그러뜨린 것이다. 마오쩌둥이 설계한 병영 공산주의 체제(인민공사 체제), 냉혹하고 엄격한 사회는 마오쩌둥의 사망과 동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 판초프,레빈 <마오쩌둥 평전>, pp.20-21
#3
'문혁'을 비이성적 변태로 보는 것, 큰 미치광이가 수억 명의 작은 미치광이들을 대동하고 부린 난동으로 보는 것이야말로 문혁에 대한 가장 나태한 해석이다. 해석자는 역사를 한 떼거리의 정신병자들이 벌인 사건으로 만들어 손쉽게 소탕해버린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독자에게 어떤 지혜도 줄 수 없다.
- 한샤오궁, <혁명후/기>, p.98
#4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노선과 정책이 착오적이고 당내 생활이 극히 비정상적이었습니다. 나쁜 사람들이 남의 약점을 노리고 심지어 좋은 사람도 누군가의 계략에 빠져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 당의 기풍을 심각하게 파괴했습니다. 기회를 엿보고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자들이 잘 나가고, 당내에 맹목적인 작풍이 아주 컸기 때문에 당의 위신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 <후야오방 문선>, p.351. (후야오방은 자오쯔양과 함께 1980년대 중국에서 덩샤오핑의 왼팔과 오른팔 역할을 하며 개혁개방을 이끌었던 인물, 중국에서 가장 민주적인 지도자로 유명했고 학생 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며 1987년 1월 실각. 1989년 4월 사망하자 천안문 사태가 일어남)
#5
그 시대에 모택동의 지시는 "한마디가 1만마디와 맞먹는 것’ 으로 설령 느낌이 있어 아무 생각 없이 한 한마디라도 모두 ‘최고지시' 로 변했고 모두 지고무상의 것이 되었다 그 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기억하는 데 매번 ‘모주석의 최신 지시' 를 발표할 때에는 즉시 신속하게 ‘조국상하 전 국민과 양자강 남북의 전국에 두루 전달되었다.’ 대낮이거나 깊은 밤중이거나 다만 ‘최신 지시’ 가 발표되면 사람들은 즉시 길거리로 밀려나와야만 했고 천안문광장으로 밀려나와 환호를 했고, 군중집회를 했다. 문혁중에 많은 ‘혁명의 진전’ 은 모두 이러한 방식으로 지도되었 던 것이다.
- 덩룽, <대륙의 지도자 등소평>, p.474 (덩룽은 덩샤오핑의 딸로, 80-90년대 덩샤오핑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덩샤오핑은 귀가 안좋았기 때문에 덩룽이 덩샤오핑에게 말을 다시 전해주어야 했음)
#6
전국에서 무력투쟁이 시작한 뒤 몇몇 지방은 완전히 무정부 상태에 접어들었다. 사실상 각급 지방 정부는 마오쩌둥과 중앙이 도대체 왜 '문혁'을 일으켰고 어떻게 '문혁'을 진행하는지에 대해서 완전하게 확실히 파악하지 않고 군중이 일어나서 반란하는 것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윈난성위원회 제1서기는 '문혁'이 시작된 뒤 열린 간부 대회에서 공개적으로 말했다. "이번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하는지 여러분도 잘 모르고 우리도 잘 모릅니다. 앞으로 성위원회도 여러분을 지도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각자가 알아서 하십시오.
- 왕단, <왕단의 중국 현대사>, pp.232-233 (왕단은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학생 대표의 한 명으로 현재 대만으로 귀화)
문혁 전개과정과 왜 사그라들었는지도 정리가능허신지?
금방 글로 명확하게 정리할 정도로 생각이 정돈되어 있는건 아니라서...적는다면 꽤 오래 걸릴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