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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생이 소설을 쓴다는 상상을 해 보았다. 생각만해도 무미건조한 느낌이다. 아니, 백 번 양보하여 철학자가 소설을 쓴다고 하더라도 볼테르까지가 아닐까? 하지만 테드 창(장펑남), 한국말로는 강봉남 씨는 주관적 작품의 느낌은 볼테르가 아닌 안톤 체호프에 근접할만큼 서사가 유려하다.
이 단편집 중 가장 아름답게 생각된 작품은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이다. 작가의 창작 노트에 따르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테넷>에서 게이트(문)으로 묘사된 물리학자 킵 손의 시간여행 아이디어에서 따왔다. 시간여행을 해도 어두운 과거를 바꿀 순 없다. 작가는 이 작품 뿐만 아니라 결정론과 자유의지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들을 묘사한다. 그의 작품이 철학적인 느낌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자들은 말합니다. “세상에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네 가지 있다. 입 밖에 낸 말, 공중에 쏜 화살, 지나간 인생, 그리고 놓쳐버린 기회.”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용서라니 당치도 않소. 당신이 전해준 말은 내게는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이오. 평생 감사를 표해도 그 빚을 다 갚을 수 없을 것이오.”
“슬픔에는 빚이 없습니다. 평안이 함께하시길.”
“평안이 함께하기를.”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단편 중에서도 짧은 단편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손을 뻗기 직전 내 생각을 읽는 간단한 스위치를 통해 독자에게 자유의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내리는 선택에 의미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라는 단편은 제목을 한 번 쯤 들어본 듯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생애 주기(라이프 사이클)이란 용어는 굉장히 친숙하다. 소프트웨어 객체 대신 인간으로 치환하면 소설에 대한 이해가 빠를 것이다. 처음에는 가상 세계 속 디지언트가 유사 반려견으로 생각되었는데, 점점 인간 아이와 같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아니. 깨어 있는 채로 무슨 일 일어나는지 알고 싶어. 하지만 가끔 짜증이 나.” 그러고는 잭스가 묻는다. “가끔 나 돌보고 싶지 않은 기분이야?”
대답하기 전 애나는 잭스가 그녀의 얼굴을 보게 한다. “너를 돌볼 필요가 없다면 내 인생은 좀더 단순해질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만큼 행복하지는 않을 거야. 사랑해, 잭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애나는 이렇게 말하는 잭스의 표정이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무룩하다. 그녀가 좀더 진지한 어조로 묻는다. “돈이 왜 필요한데?”
“나 아냐. 애나 주려고.”
“왜 나한테 돈을 주고 싶은 건데?”
“애나가 돈 필요하니까.” 잭스는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내가 돈이 필요하다고 한 적이 있었어? 언제?”
“지난주 나 말고 왜 다른 디지언트하고 놀아주는지 물어봤어. 애나가 놀아주면 다른 사람들이 돈 준다고 했어. 나도 돈 있으면 애나한테 줄 수 있어. 그럼 애나 나하고 더 놀아줄 거야.”
“잭스.” 그녀는 한순간 말을 잃는다. “넌 정말 착하구나.”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어쩌면 게임이나 메타버스 등 가상 세계의 상대방은 디지언트와 차이가 없다. 우리는 세계 속 법칙 하에 행동할 따름이다. 조금 이해를 돕자면 작품 속 애나와 데릭은 영화 <라라랜드>의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의 관계처럼 연애 타이밍이 엇갈리는 남녀이다. 데릭이 인간(애나)과 디지언트(마르코) 사이에 고민하는 것은 결국 디지언트가 인간의 위치로 격상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마르코의 뇌에 화학적 조작이 가해지는 게 나을까, 아니면 애나가 자기 뇌를 약물에 노출시키는 게 나을까?
애나는 폴리토프의 제안에 응하면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마르코의 경우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애나는 인간이다. 데릭에게 마르코가 아무리 멋진 존재라고 해도, 그에게는 애나 쪽이 더 소중하다. 둘 중 하나에게 신경화학적인 조작이 가해져야 한다면, 애나가 아닌 쪽이 낫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기계 같다가도 아래 볼드체의 글씨처럼 감성적인 문장이 테드 창의 매력이다.
인공지능에게도 마땅히 법적인 권리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소설은 꽤 있지만, 그런 큰 철학적 의문에 천착하느라고 그 저변에 깔린 세속적인 현실을 얼버무리고 지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영화가 언제나 거창하고 로맨틱한 제스처만을 통해 사랑을 묘사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러나 사랑이란 긴 안목으로 보면 돈 문제를 해결하거나 배우자가 방바닥에 팽개쳐놓은 빨랫감을 챙기는 일 또한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인공지능이 법적 권리를 획득한다면 큰 진전이겠지만, 인간 측에서 인공지능과의 개인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 일 또한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주지 않을까.
>창작 노트 -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바디캠으로 전부 기록되는 세상을 그린다. 이미 중국과 앞다투어 CCTV 천국에 살고 있는터라 감흥은 덜한 편 같다. <돈키호테> 사실은 진실의 적이다(facts are the enemy of truth) 혹은 "증인은 최악의 증거"라는 법률 격언에도 나와 있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기억은 사실이 아니다. 그렇기에 더 소중한 법이다. 과학적으로 회상을 많이 하는 기억은 보다 많이 왜곡된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소중한 기억은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의 기억은 사적인 자서전의 집합이며, 나의 기억에 할머니와의 오후가 두드러지게 각인되어 있는 것은 그 기억과 결부된 나의 감정들 때문이다. 그런데 그 광경을 찍은 동영상을 통해 할머니의 미소는 사실 건성에 불과했고, 실은 재봉틀이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짜증이 나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게 그 기억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내게 안기는 행복감 때문이다. 그것을 위태롭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글을 읽으면 인지적 사이보그가 된다. 이 글을 구태여 읽는 당신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글쓰기는 테크놀로지다. 따라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의 사고 과정에는 테크놀로지가 매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인지적 사이보그가 되며, 그 사실은 우리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율리시즈> 멀리건은 아텔로탑을 옴팔로스(배꼽)로 불렀다. 이 단편은 신학적 이론에 따른 젊은 지구를 상정한다. 결국 자유의지를 이야기하고 싶은 작가. 그런 면에서는 단테와도 닮은 듯.
그런 연유로, 주여, 저는 당신이 굽어보고 계시든 그렇지 않든, 애리소나 발굴 현장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설령 인류가 우주가 창조된 이유가 아니라고 해도, 저는 여전히 우주가 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떻게’라는 질문의 해답을 계속 탐구하겠습니다.
이런 탐구야말로 제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그것을 선택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저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옴팔로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프리즘이라는 도구를 통해 평행우주의 나와 소통하는 세상이다.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을 따른다. 사실은 AA(유명한 미국 알콜중독 모임) 같은 중독자 치유 모임 이야기가 주축이 된다. 누구나 이불킥하고 과거를 후회하곤 한다. 특정 시점을 분기하여 시뮬레이션해서 나를 보여주는 것이 가능한 세상이 있다면, 우리는 계속 가능성의 늪에 빠져 살 것인가? 아니면 let it go 할 것인가?
에드거 앨런 포는 단순히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경향을 ‘비뚤어진 임프’라고 표현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심술궂은 악마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본 작품의 창작 노트에 인용한 마틴 루터의 변론은 의미심장하다.
철학자들은 이런 의견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고 끝없는 논쟁을 벌여왔다. 혹자는 1521년에 마르틴 루터가 교회에 대한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면서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을 예로 든다. 그러니까 그는 그 이외의 행동을 아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루터의 공적을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까? 만약 그가 “나는 어떤 식으로도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어떨까. 그랬다고 그를 더 칭송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창작 노트 -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전반적으로 넷플릭스 <블랙미러> 시리즈 같은 느낌의 책을 원한다면 읽기를 권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무수한 이미지에 압도되지 않고 '인지적 사이보그'가 되어 생각할 시간을 준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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