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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소설의 무대인 포경선 '피쿼드' 호의 선장 에이해브는 대놓고 원죄-구원의 도식에 위치한 인물이다. 그의 원죄란 모비 딕에게 다리와 동료들을 잃었다는 데에 있고, 구원은 모비 딕을 잡는 것에 있다. 하지만 그의 구원은 그만의 것이다. 어떤 성경에서도 모비 딕을 잡아야 천국에 간다고 쓰인 부분을 찾아볼 수 없다.
정작 모비 딕은 고래일 뿐이다. 고래에겐 원죄도 없고 구원도 없다. 고래는 평생토록 먹이를 찾아 바다를 누비다가, 죽어서 경뇌유와 용연향을 남길 뿐이다.
그렇다면 에이해브는 저주에 걸렸다. 존재하지 않는 죄를 스스로 뒤집어쓰고, 존재하지 않는 구원을 향해 자신의 전부를 내던지게 하는 저주. 물론 어차피 인간의 삶은 허무하고 그가 자기 삶을 그가 만든 신기루에다 던져버린다 한들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의 뒤꽁무니를 쫓아오는 에이해브를 모비 딕이 뒤돌아 쳐다본다고 생각해 보자. 그의 모습은 안쓰럽고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반면 2등 항해사 스터브에게 버림받은 핍이라는 흑인 소년을 보라. 그는 처음으로 고래를 잡으러 오른 보트에서 낙선하고, 태평양 망망대해에 태양과 함께 버려져 절대적인 고독감을 느낀다. 그의 동료들은 고래를 쫒느라 그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피쿼드’호의 그 악마적인 구원의 몸부림이 가져온 첫 피해자이자 낙오자다. 그는 극적으로 구조되어 다시 ‘피쿼드’호에 오르지만, 광인이 되어 인간의 언어를 잃는다. 여기서 언어란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도구이자, 인간에게 인식되는 세계를 자기의 세계에 가두게 하는 나르키소스의 우물이다. 그러므로 언어를 잃었다는 뜻은 인간성을 잃었다는 뜻과 함께, 인간에게 주어진 원초적 저주에서 풀려났음을 의미한다.
그렇다. 진짜 원죄란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났음에 있고, 구원은 인간이 인간임을 포기할 때 비로소 찾아온다. 그렇다면 ‘인간은 원죄를 지닌 존재이다’의 명제는 증명이 필요 없는 동어반복임이 아닐 수 없고, 구원이란 있으나 마나 한 단어다. 정말로 구원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언어의 속임수에 불과하지 않은가?
총평- ‘
모비 딕’의 독특한 미학은 신화나 서사시에서부터 있어 왔던 진부한 플롯(괴물을 잡으러 모험을 떠난 위대한 영웅의 이야기)을 근대 소설의 형식 속에서 완벽하게 해체 시켰다는 점에 있다. 인간의 위대함은 더 이상 없다. 서사시의 후예인 소설은 위대함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 고래나 코끼리, 드넓은 바다나 빛나는 태양에서만 찾는다.
소설의 도구인 언어부터가 결코 위대함에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은 저주받은 언어로 인간의 비정함과 실패를 말함으로써 잃어버린 금고를 찾는 소경처럼, 잃어버린, 어쩌면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을 가치들을 더듬거릴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 인간임을 포기할 때 비로소 찾아온다가 혹 자기애 그리고 교만 즉.인본주의를 내려놔야 비로서 신에 다가갈 수 있다는.의미임?
ㄴㄴ 그냥 단순하게 인간 = 원죄, 동어반복이라는 뜻. 원죄의 반의어 격인 구원은 없음. 에이해브가 결코 구원에 닿을 수 없고, 필립은 구원받을 수 있는 이유. 필립은 인간에게 버림받고 '광인'이 되었으니까. 사실 소설 읽어보면 무슨 느낌인지 알 텐데, 글을 너무 못쓴다 내가
ㄱㅅㄱㅅ 근데 스타벅은 그댝 의미 없음 ? 커피체인 스타벅스 창업자들이 모비딕의 스타벅에서 상호 착안했다 읽음
나도 모비딕을 자연 또는 신 그 자체로 보면서 읽ㅇ었는데 모비딕을 잡는 과정을 구원보다는 투쟁의 형태로 느꼈음. 신과 투쟁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위대함을 느꼈는데 이렇게 다르게 볼수도 있구나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