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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 읽은 책의 양 자체는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하나같이 주옥같은 명작들이어서 꽤나 만족스러운 한 달을 보낸 것 같다. 이번에도 1개월 동안 어떤 책들을 읽었는지 차근차근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다.

1. 무진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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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뿌려진 피와 머리맡의 총만 없었다면 그것은 영락없이 만취되어 길가에 쓰러진 한 거지의 꼬락서니였다. 그것은 간밤의 소란스럽던 총소리와 그날 아침의 황폐한 시가가 내게 상상을 떠맡기던 그런 거대한, 마치 탱크를 닮은 괴물도 아니고 그리고 그때 시체 주위에 둘러선 어른들이 어쩌면 자조까지 섞어서 속삭이던 돌덩이처럼 꽁꽁 뭉친 그런 신념덩어리도 아니었다. 땅에 얼굴을 비비고 약간 괴로운 표정으로 죽은 남자가 내 앞에 그의 조그만 시체를 던져 주고 있을 뿐이었다.”

- 건(乾) 中 -

1941년 오사카 태생의 소설가이자 국문학계에서는 진정한 한글 문학의 시발점을 끊어준 불멸의 천재로 추앙받는 작가 김승옥의 중단편 선집을 읽어봤다. 이번에 읽어본 민음사판 김승옥 선집은 제목 전면에 내걸린 단편소설 ‘무진기행’ 외에도 9편의 중단편소설들이 수록되었다. 이 책 말미에 수록된 ‘서울의 달빛 0장’을 제외하고는 수록된 소설들은 1960년대에 발간된 작품들인데, 당시 김승옥이 20대에 불과한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작들은 문인들로부터 감수성의 혁명을 불러왔다며 큰 찬탄을 받았다. 내가 이 책을 읽게된 계기는 김승옥의 작품이 국문학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점에 흥미가 동했던 것도 있었지만 최근 감명깊게 본 영화인 ‘헤어질 결심’에 지대한 영향을 준 작품이 다름아닌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라는 얘기도 들어서 이를 파악해 보기 위함도 있었다.

한국 문학사에서 미문가로 꼽히는 김승옥의 작품답게 이 책에 적힌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은 제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스산한 시골 풍경부터 칙칙하기 짝이 없는 1960년대 서울 시가지에 이르기까지 김승옥의 펜은 작품에 등장하는 배경을 활자를 통해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작가의 필력은 비단 물리적인 것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작품 내 등장인물들의 심상과 감정도 소묘라도 그리듯이 세심히 스케치하고 수채화라도 칠하듯이 다채롭게 채색한다. 책 속에 들어찬 문장들을 빨아들아다 보면 이 문장들이 20대 청년의 글솜씨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놀라고, 1960년대에 씌여졌다는 게 안 믿길 정도로 세련된 필치에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괜히 문학도들이 습작으로 무진기행을 필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체감하였다.

미려한 문장과는 대조되게도 김승옥의 작품은 대부분 분위기가 암울하다. 왜 이런 분위기를 띄고 있는지는 작가가 한창 집필을 하던 당대 사회상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작가가 한창 소설가로 활동히던 시기와 작품 내 대부분의 시대적 배경은 1960년대이다. 이 시기를 말하자면 6.25 전쟁이 정전된지 10년 정도 밖에 안되서 전쟁의 상흔이 남아았었고, 북한이 재남침이라더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서려있던 시대였다. 또 4.19 혁명과 5.16 정변을 거치면서 정치적인 불안도 도사리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와 계획경제도 도입하여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시대이기도 하다. 김승옥은 근대화을 거치면서 각박하기 짝이 없던 1960년대를 살아가며 작가를 비롯한 한국인들이 느꼈을 법한 감정들을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이를테면 전쟁에서 오는 불안감과 두려움, 당시 한국에 만연한 빈곤에서 오는 궁핍함, 근대화의 물살에 적응하지 못하고 표류에 빠짖 이들이 느끼는 고립감, 불의가 닥치는 순간에도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순응하고 마는 이들이 느끼는 무력감과 수치심을 곱디고운 문장으로 수식해냈다. 이런 요소들은 근대화의 유산에서 살고 있는 21세기 한국인들에게도 적잖은 기시감을 안겨준다. 본 작품들은 60년대 시대정신을 작가의 미학적 감각과 잘 버무려서 만든 명작들이라서 과장 좀 보태서 현대 한국의 이정표로 삼을 수 있을 만큼 문학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수록된 작품들 중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작품을 꼽아보자면 몽환스러운 분위기와 허무함이 기가 막히게 어우러져 불후의 명작으로 남은 단편 ‘무진기행’과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6.25 전쟁이 남긴 참화와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도덕적 해이를 충격적으로 담아낸 단편 ‘건(乾)’과 퇴폐적이지만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묘사가 일품인 단편 ‘서울의 달빛 0장’이 있다. 사실 앞에서 워낙 좋은 말만 하긴 했지만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거의 반세기 전에 출간된 작품들이고 작가 김승옥도 팔순을 넘긴 사람이니만큼 요즘 통념에는 잘 맞지 않고 읽으면서 불쾌할 만한 구시대적인 요소들이 제법 있다. 이런 까닭에 가벼운 마음으로 추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상술한 바와 같이 과거와 현재의 한국을 조망해 볼 수 있는 명작이기에 기회가 된다면 일독을 강력히 추천한다.

2. 백치 (Идио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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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으론, 우스꽝스럽다는 것은 때에 따라선 오히려 좋은 일이며, 그편이 오히려 낫습니다. 서로를 더 빨리 용서할 수 있고 더 빨리 화해할 수 있으니까요.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순 없고, 완전한 상태로부터 바로 시작할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 백치 中 -

러시아 문학의 거장이자 주옥같은 명작을 여럿 창조해낸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Фёдор Достоевский) 의 장편소설 백치를 읽어봤다. 제가 처음으로 접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인 죄와 벌을 워낙 재밌게 읽어서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죄와 벌 다음으로 지하로부터의 수기 (Записки из подполья)나 백치 둘 중 하나를 읽어보려고 고민했는데, 백치의 시놉시스를 보고는 더 끌렸던 것도 있고 때마침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거의 새책이나 다름없는 문학동네 판본을 정가의 반값 남짓하는 가격에 팔고 있길래 구매해서 읽어봤다.

이 책은 레프 니콜라예비치 므이쉬킨이라는 남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는 작중 러시아에서 유서깊다고 알려진 므이쉬킨 가문 출신의 귀족 청년이지만 어릴 적부터 양친을 여읜데다가 뇌전증에 걸려서 곧잘 발작을 일으키다 보니 백치 상태나 다름없을 정도여서 5년 간 러시아를 떠나 스위스에서 요양생활을 했다. 이후 어느 정도 병세가 호전되자 페테르부르크행 기차를 타고 귀국하는 와중 마주보는 좌석에서 만난 파르푠 세묘노비치 로고진이라는 청년과 말을 트게 되고, 자신의 이국적인 옷차림을 보고는 그가 흥미를 느끼며 사정을 물어오자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로고진도 이를 듣고는 자신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어마한 부를 축척한 상인의 아들이지만 나스타샤 필립포브나 바라쉬코바라는 절세미인에게 구애하고자 집안의 재산을 빼돌려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선물했는데, 이게 아버지의 분노를 사 타지로 도망을 갔다가 돌연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는 돌아가는 길이라고 털어놓는다. 기차가 종착역에 이르며 두 사람은 서로 헤어지고 므이쉬킨은 러시아 재정착을 위해 도움을 좀 구하고자 자신의 먼 친척이 시집갔다고 하는 이반 표도로비치 예판친 장군 일가의 저택으로 간다. 므이쉬킨과 주고받은 연락이 서신 한 통에 불과하다 보니 예판친 장군 부부와 이들의 세 딸 (알렉산드라, 아젤라이다, 아글라야)는 그의 방문에 적잖이 당황하지만 이윽고 그가 보여준 솔직하면서도 선량한 품성에 매료되어 그를 환대해주었다. 서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화두가 나스타샤 필립포브나로 돌아가는데 이야기를 하며 알게된 사실에 따르면 그녀는 예판친 장군의 지인인 거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토츠키의 정부이자 장군의 비서인 가브릴라 아르달리오노비치 이볼긴(이하 가냐)와 정략 결혼을 하기로 되어있던 여인이었다. 그날이 마침 나스타샤 필립포브나의 혼인 여부를 발표하고자 파티가 예정되어서 가냐가 그녀에게 선물할 용도로 그녀의 초상화를 하나 장군에게 가져왔었다. 므이쉬킨도 그림을 보게 되는데 그녀의 얼굴은 몹시 아름다우면서도 명랑하고 오만하다는 인상이 들었지만 눈동자에 한없이 차오른 우수와 고통의 흔적을 꿰뚫어 보고는 이상야릇한 감정에 빠진다. 

작가의 전작인 죄와 벌이 범죄 스릴러로써의 플롯을 갖춘 작품이지만 백치는 주인공인 므이쉬킨을 중심으로 한 치정극이라고 볼 수 있다. 본작의 골자를 이루는 내용도 므이쉬킨이 아름다운 외면에 가려진 우울함을 알아차리고는 연민을 느끼며 사랑을 고백한 나스타시야와 그의 선량하고 순수한 면모에 반해 그에게 새침하게 애정공세를 가하는 아글라야에게도 연정을 품으면서 생긴 미묘한 삼각관계에서 빚어진다. 또 한편으로는 나스타시야를 광적으로 사랑하는 불한당 로고진이 므이쉬킨을 연적으로 삼으면서 맺어진 살벌한 삼각관계도 이야기의 중추를 이룬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흔한 연애소설로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죄와 벌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기독교적 구원관에 대한 고찰과 미학적인 가치에 관한 탐구도 버무려져서 꽤나 다층적이고 심오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성격를 잘 표현해주는 대목이 바로 므이쉬킨이 좌우명 삼아 언급하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 라는 말인데, 내면이 한없이 아름다운 므이쉬킨이 외면이 매우 아름답지만 내면이 문드러져가는 나스타샤를 구원하려고 시도하며 벌어지는 사건들과 이에 연루된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한 것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니 만큼 실로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탁월한 점 중 하나로는 매력적이고도 입체적인 인물상을 여럿 구축했다는  점이 있다. 우선 주인공인 므이쉬킨만 하더라도 천사같은 마음씨로 우직히 선을 행하려고 하지만 감정적인 동요도 겪고 병치레도 하는 등 인간적인 한계도 두드러지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주요 인물인 나스타시야도 어릴 적 받은 상처로 성격이 되바라지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행태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우수에 젖은 여린 마음도 간직하고 있고, 로고진은 나스타시야를 너무 광적으로 좋아하는 나머지 그녀를 손에 넣기 위해 협박을 비롯한 폭력적인 수단을 주저없이 사용하는 무뢰한이지만 한편으로는 순수함을 희구하는 열정적인 면모도 지닌 입체적인 인물들이다. 그외에도 츤데레 아가씨 아글라야, 소시민이지만 야심이 그득한 가냐, 입만 벌리면 거짓말이 자동으로 나오는 이볼긴 장군, 음흉한 아첨꾼이지만 묵시록 해석에 관심이 많은 레베제프, 폐결핵 및 중2병 말기환자 입폴리트 등 조연들도 저마다의 특색을 뽐내며 작품의 완성도에 기여한다.

끝으로 이 책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 만큼 작가의 전작인 죄와 벌 보다 더 군상극으로써의 성격이 더 두드러진다. 저의 경우에는 여러 인물 시점에서 이야기를 조망할 수 있고 캐릭터들이 매력 있어서 죄와 벌 보다 더 재밌게 읽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야기가 여러 인물들의 사연을 파고 들기도 하고 중간중간 작가 본인의 사설도 끼어들어서 구성이 정신 사나운 편이라 가볍게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다. 다만 상술하였듯이 탁월한 완성도를 갖춘 명작이기에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한 번이라도 읽어봤다면 꼭 한 번 읽어 보는 걸 추천한다.

3. 칼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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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은 죽음을 내어주면서 죽음을 받아낸다. 생사의 쓰레기는 땅 위로 널리고, 칼에는 존망의 찌꺼기가 묻지 않는다."

- 칼의 노래 中 -

1948년에 출생한 소설가 김훈의 대표작인 칼의 노래를 읽어봤다. 본 작품은 46세에 늦깎이로 등단한 작가가 두번째로 출간한 장편소설인데, 2001년에 한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였고 작가에게도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중학생 시절 교양이라도 쌓으라는 부모님의 강권 때문이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책의 내용이 너무 어렵고 문학에도 별 관심이 없어서 온갖 발악을 하면서 안 읽었었다. 그 후 몇 년 뒤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자 책장에 처박아둔 이 책을 펼쳐서 읽어봤는데 범상치 않은 문장에 감탄하며 몇달 간 시간을 쪼개 읽었던 기억이 있다. 본격적으로 독서에 흥미를 붙인 지금에 이르러서는 칼의 노래가 안겨준 강렬한 인상은 뇌리에 남아 있지만 정작 구체적인 내용은 다 까먹어서 이번 기회에 내용을 복기해 보고자 읽어봤다.

이 책은 임진왜란을 거쳐 정유재란이 발발한 뒤 중상모략을 당해 의금부에 압송되어 고문을 당한 후 도원수부로 백의종군하고 있는 이순신의 넋두리로 시작된다. 그는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세운 엄청난 전공에 경계심을 느낀 선조의 의심을 사고 있었던데다 정유재란 발발 당시 적군에서 흘린 불확실한 첩보에 응해 거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었고, 백의종군을 하면서도 도원수였던 권율로부터 싸늘하기 짝이 없는 냉대를 받고서는 무기한 대기발령으로 임지마저 정해지지 않았다. 거기에다 그의 후임자인 원균이 칠전량 해전에서 대패하며 임진왜란 때부터 차근차근 비축해왔던 수군 전력의 대부분이 소실됐다는 암담한 소식까지 들려온다. 결국 이런 상황을 좌시할 수 없었던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재임명 후 전라 우수영에 도착한 그는 남은 전력이라고는 칠전량 해전에 참전한 경상우수사 배설이 독단적으로 후퇴하며 남겨 놓은 전선 열두 척이 전부인 조선 수군의 처참한 현황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수군 없는 수군통제사가 되었다며 한탄을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조정에서도 수군의 한미한 전력을 눈치채고는 수군을 육군과 통폐합시키려는 시도를 하였고 일손 하나 하나가 귀할 때 배설마저도 탈영하며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마음을 다잡고 아직 열두 척이 남아 있으니 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겠다는 각오를 담아 조정에 장계를 보내고 사지가 될 수도 있는 결전지를 물색한다. 그중 적격으로 꼽은 곳이 현지인들에게는 울둘목으로도 불리는 진도 근방에 명량 해협이었는데 와류가 거칠어 아군에게도 위험하지만 적군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어서 절대적 열세의 상황에서도 일말의 희망을 걸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몇 안되는 전선으로 일자진을 이뤄 수백 척 가량의 일본 수군에 맞서기로 결심한다.

본 작품은 한국사에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는 이순신이 정유재란 중 백의종군을 당한 일부터 노량해전까지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을 소재로 한 작품은 소설에서 영화, 드라마까지 무수히 많지만 그중에서도 이 책은 독특한 정체성을 구축하였는데, 본작은 통제공의 눈부신 활약을 조명하는데 치중하기 보다 고통과 슬픔을 묵묵히 감내하는 인간 이순신을 그려내는데 노력을 기울인다. 작중 묘사되는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입은 총상과 중상모략을 당해 의금부에서 문초를 당하면서 생긴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며 매일을 고통에 시달린다. 또 정유재란이 발발한 해에 노모와 아들을 연달아 잃는 정신적 고통까지 겪게 된다. 여기에 원균이 칠전량 해전에 대패하며 황폐화된 조선 수군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혼란 중에도 이순신을 시기하며 수군에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은 채 육군과 통폐합하려 들고 호시탐탐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임금 선조의 졸렬한 행태를 보이는 등 외부적인 요소들도 통제공에게 하등 도움이 되는 게 없이 그의 고독감을 배가시킨다. 또 학살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과 전쟁 중에도 부정부패에 찌들어 있고 일본군에게도 부역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지역 수령들의 소식도 고스란히 전해 듣고는 절망감과 무력감에 시름하는 충무공을 보노라면 절로 인간으로서의 연민감이 생길 정도이다. 하지만 이런 역경에도 불구하고 최적의 전술을 짜내어 일본 수군의 서진을 막아내는데다 전선을 건조하며 전력을 보충하고 근면하게 첩보를 수집하며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등 초인적인 사명의식도 보이다 보니 독자들로 하여금 이순신 제독의 숭고함에 탄복하게도 만든다.

이 책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걸출한 문장이다. 작가인 김훈은 소설가로 등단하기 전에는 여러 언론사에서 기자로 활동해왔었는데, 직무상 경험을 십분 발휘해 건조하면서도 간결하게 문장을 구사한다. 이는 난중일기에서도 드러나듯이 실제로도 직설적이고 간명한 문체로 곧잘 글을 써왔던 이순신의 실제 성격하고도 잘 어우러져 걸출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책에 적힌 문장들을 두루 살펴보면 사용된 어휘들은 대체로 난해하지 않고 간단한 편이지만, 이를 여러번 반복하고 도치하면서 간결하되 함축적인 문장들이 되었다. 이런 문장들은 작품에 걸쳐 산재해 있는 허무주의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연출한다. 물론 이 문장들이 항상 술술 읽히게끔 만들어 지지는 않지만 완성도 높게 제련된 문장들은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잘 담아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읽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4.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Things Fall A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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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이 땅에 대한 우리의 관습을 알기나 하는가? 우리말조차 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알겠나? 그런데도 그 작자는 우리네 관습이 나쁘다고만 말하지. 게다가 백인의 종교를 받아들인 우리 형제들마저 우리의 관습이 나쁘다고 말한다네. (Does the white man understand our custom about land? How can he when he does not even speak our tongue? But he says that our customs are bad; and our own brothers who have taken up his religion also say that our customs are bad.)”

-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中 -

1930년 영국의 식민 통치 아래 있던 나이지리아의 이보 족 마을에서 태어나 자신의 조국을 넘어 전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올라선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 (Chinua Achebe)의 대표작 중 하나인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영어 원서로 읽어봤다. 본작의 경우에는 아체베가 소설가로서는 처음으로 출간한 작품인데, 당시 그의 나이가 28세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을 만들었다는데서 그의 비범함을 알 수 있다. 여태까지 세계문학을 읽어봤어도 유럽/미국 문학이나 남미 문학을 주로 읽어서 이 책이 제 생애 처음으로 접하는 아프리카 문학이다. 사실 이 책 자체는 동네 서점에서 사온 지는 몇달이 넘기는 했는데도 도통 읽고 있지 않다가 너무 책자애만 썩혀두는 건 아니다 싶어서 이번 기회에 읽어봤다.

이 책은 나이지리아 이보 족이 사는 아홉 마을에서 천하장사로 이름을 날린 오콩코라는 사내를 소개하며 시작된다. 그는 열여덟의 나이로 이름난 씨름꾼인 고양이 아말린제를 메쳐버리며 이름을 알렸다. 또 그는 그의 고향인 우무오피아에서 전쟁이 나면 항상 앞장 서서 싸워서 여태까지 적장 5명의 목을 멘 맹장이었고, 젊은 시절 마을에 기근이 났을 때도 근면하게 일하며 자신의 농장을 일궈내어 부를 축척해 아내를 3명이나 들이고 마을에서도 칭호를 달고 있던 명사였다. 이렇게 명성이 자자한 만큼 이웃 마을 모두가 우무오피아와 작대하길 꺼렸고, 만에 하나 우무오피아 사람들과 마찰이 생길 경우 특사로 온 오콩코의 서슬퍼런 요구에 매번 들어줬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것으로 보이는 오콩코의 이면에는 놈팽이로 악명을 날린 아버지 우노카를 향한 깊은 혐오감이 자리잡아 있었다. 우노카는 너무나도 게으르고 연약한 사람이라 매번 농사를 망쳐서 가난한데다 주위 사람들에게 걸핏하면 빚을 지던 위인이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인지 오콩코는 매사 남성적인 강인함만을 좇으며 폭력적인 면모를 보여왔는데, 그 정도가 심해 마을에서 땅의 여신을 흠숭하고자 지정한 평화 주간에도 친구 집에서 노닥거리느라 그의 끼니를 제때 챙기지 못한 셋째 아내를 상대로 가정폭력을 벌여 마을 신관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고명한 전사였던 에제우두가 노환으로 별세하자 그를 추모하고자 마을 전사들이 예포를 여럿 발사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오콩코가 발시한 눈먼 총알이 고인의 어린 아들의 심장을 꿰뚫고 말았다. 사고사였지만 마을 사람을 죽이는 건 큰 죄였기에 오콩코와 그의 가족은 7년간 우무오피아에서 추방령을 받게 된다. 추방 이후 자신의 외가가 있는 마을에 정착한 오콩코는 고향에서의 설욕을 꿈꾸며 7년을 보낸다. 그 적지 않은 시간동안 이보 족의 마을에는 백인들이 왕래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원주민들을 상대로 기독교를 전파하고 자신들의 군사와 정부 체계를 들여오며 이보 족의 땅에 격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후 7년이 지나고 우무오피아에 돌아온 오콩코는 멀라 보게 달라져 있는 자신의 고향을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의 원제인 ‘Things Fall Apart’ 는 작품의 제사(題詞)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일랜드의 명시인 윌리엄 B. 예이츠의 시, 재림(The Second Coming)의 한 구절인 ‘Things fall apart; the center cannot hold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져, 중심조차 잡을 수 없도다.)’에서 따왔다. 예이츠의 재림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묵시록에서 예시된 종말과도 같이 황폐화된 유럽을 노래하고 있다면,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유럽 국가들의 제국주의로 인해 풍비박산이 나버린 아프리카의 전통사회를 여실히 그려내고 있다. 작중 묘사되는 우무오피아를 비롯한 이보 족의 공동체는 비록 미신적인 신앙이 중심이 되었을지언정 나름의 합리성을 갖추면서 질서를 영위하던 사회였다.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이어저온 구전설화를 통해 자녀들에게 도덕과 사회규범을 교육시켜왔고, 일견 비이성적이고 야만스러워 보이는 애니미즘 신앙을 통해 마을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조언도 해주고 그들의 분규도 조정을 해주는 등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삶 그 자체였던 전통문화를 충실히 묘사하였다. 하지만 십자가를 들고 온 유럽의 백인들은 이보 족의 문화와 신앙을 야만과 미신만으로만 치부하였다. 이들의 배타적인 면모에 경계심을 느낀 이보 족 사람들이 충돌을 일으키자 백인들은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워 저항하는 이들을 무참히 도륙하고, 살아있는 이들은 공포로 옥죄며 지배하였다. 

이렇게까지만 보면 간악한 백인에 의해 착취된 아프리카의 참상을 고발하며 아프리카 민족주의만을 고취하는 작품으로도 보일 수 있겠지만, 본작은 그렇게 단순하고 뻔한 이야기만을 늘어놓지 않는다. 작가는 아프리카 토속신앙이 지니고 있는 장점을 보여주었지만 반대로 미신적인 교리로 굴러가는 토속신앙에 고개를 갸우뚱해 하는 이보 족들도 등장하기도 하고 ‘오수’라고 불리며 지역사회에서 멸시당하는 추방자들과 불길하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쌍둥이 태아 등 토속신앙에서 소외된 이들과 폐단 희생자들도 빠짐없이 이야기에 담아냈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소외된 이들을 개종시키며 세를 불려나가는 것도 그렇고,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가치에 부합하는 주인공인 오콩코도 용맹하지만 이상적인 인물상은 아니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체베는 아프리카 고유의 모든 것을 미화하는데만 골돌하지 않았다. 동시에 작중 유럽인들이 그렇게 우쭐해 하면서 우위에 올려놓는 기독교 신앙도 아프리카의 토속신앙과 마찬가지로 허점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도 드러낸다. 또한 서로 다른 두 종교가 각자가 지닌 허점과 모순을 오롯이 인정하고 존중함으로써 화합 속에서 공존 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중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태도에 꽤나 감명을 받았다. 이런 스탠스는 나이지리아의 전통문화를 사랑하지만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던 작가의 개인사를 대변하는 것으로도 보이기도 하고, 아직까지 서로 다른 부족과 종교끼리의 분쟁으로 시름하고 있는 아프리카를 향해 열렬히 전달하고자 하는 희망의 메시지로 보이기도 한다. 

끝으로 본작은 제법 무거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문장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은 편이라 영어 원서였음에도 불구하고 술술 잘 읽었다. 그러면서도 문장은 간단하되 핵심을 깊숙히 찌르기도 해서 몇몇 문장들은 꽤나 감탄하면서 읽었다. 그리고 작중 여럿 나오는 이보어들과 이보 족 고유의 속담과 관용표현들이 곧이곧대로 나와서 이 책은 이제까지 다른 소설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신선한 경험을 선사해준다. 국내에서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판으로 번역된 것이 하나 있으니 번역본이든 원서든 간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찾아서 읽어 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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