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소설가 이문열이 뉴욕에 왔다면서 내게 전화를 했다. 나는 외롭던 시절이고 문인이 해외에서 나를 찾은 것도 오랜만의 일이라 반가웠다. 그래서 쇼핑몰로 돈을 번 지인에게 돈을 빌려 맨해튼으로 나갔다. 아무리 망명자 신세라지만 마땅히 선배인 내가 술을 한잔 사야겠다는 허세였다. 이문열은 연출가 윤호진, 후에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을 하기도 한 정진수 등과 함께 왔는데, 그때 이미 뮤지컬 <명성황후>를 기획하고 있어서 원작이 될 희곡 『여우사냥』을 쓰기로 한 그와 함께 브로드웨이 뮤지컬 견학차 방문했다고 했다.
술이 몇 잔 돌아간 뒤에 그가 언제 귀국할 거냐 물었고, 나는 그냥 때를 보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가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대해 얘기하고 북한 사회체제의 불합리성에 대해 격렬하게 얘기를 꺼냈다. 나는 무덤덤하게 듣고 있다가 나도 이형과 같은 생각이라고 대꾸했다. 북은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강력한 단합과 통제를 위한 일종의 '농성체제'를 유지하면서 사회주의의 본질에서 멀어졌고, 실상 사회주의와 군사 파시즘의 양면성을 지닌 독재체제였다. 그럼 왜 방북했냐기에, 나는 언제나 상식적으로 말했던 것처럼 '민주화와 통일은 한몸이다'라고 대답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성숙되는 것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되며, 그것이 평화적 통일의 길이라고도 말했을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서, 내가 방북한 뒤에 이전에 제도권 언론들이 썼던 것과는 다른 내발언들이 편향으로 보였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버스 운전사가 핸들을 갑자기 오른쪽으로 꺾으면 저절로 몸이 왼쪽으로 쏠리는 승객들처럼 균형을 잡으려는 것이겠다, 우리 같이 균형을 잡도록 힘쓰자고도 얘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피차 술이 좀 취하자 그가 문득 월북한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그도 당국을 통해 여러 가지로 알아본 바를 말했고 나에게 좀더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생각한 바가 있어서 언제 뉴욕에 다시 오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워싱턴을 방문하고 일주일 뒤에 귀국 비행기를 타러 뉴욕으로 다시 올 거라고 했다. 그럼 그때 연락하라고 그에게 일러두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여행사 겸 '이산가족 상봉'업무를 하는 교포를 알고 있었지만 가까운 뉴욕에 유엔으로 파견된 북한 대표부가 있는 것도 알고 있어서 직접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이문열이 남겨둔 부친의 월북 시기와 인적사항을 적어서 팩스를 넣었다. 좀 기다려보라더니 정확하게 사흘 뒤에 팩스와 전화가 차례로 왔다. 팩스에는 이문열 부친의 간단한 이력과 가족관계가 적혀 있었고 생존해 있는 현주소도 나와 있었다. 그러고는 내게 전화를 건 서기관이 몇마디를 덧붙였다.
예정대로 이문열이 일주일 뒤에 뉴욕에 들렀고 우리는 다시 만나서 이번에는 그가 사는 술을 한잔했다. 한참을 지나서 내가 팩스로 온 종이를 내밀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의 부친 이원철은 북에 가서 전공을 농업경제사가 아닌 수리공학으로 바꿨다. 아마도 남로당 등에 대한 숙청과 재교육이 만연했던 1956년 이후의 일이었을 테고 평안도 전답의 수리공사가 대대적으로 시행되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시인 이용악이 평안도 물길 공사에 대한 행사시를 장시로 남기고는 절필해버렸던 때이기도 했다. 그의 부친은 몇 줄 안되는 약력으로 보더라도 대단히 유능한 지식인이었다. 그래서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는 원산의 어느 공업대학인가에 직을 얻었고 재혼하여 오 남매를 두었다. 그의 아우들 이름과 직업과 나이가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그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던 이문열이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무너지듯이 허리를 굽히고는 입을 꼭 다물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그 처절한 장면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눈시울을 닦았다. 한참 뒤에 격정의 파도가 가라앉고 나자 그는 술 한 잔을 넘기고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영감쟁이, 우리 어머니는 진작 재혼할 줄 알고 있습디다." 나는 북에서 나중에 전화로 덧붙이던 얘기까지 해주었다. 베이징 북한대사관에 오면 아버지와 통화하게 해줄 것이라고. 그러나 이건 내 생각인데, 유명한 축구선수 아무개가 감독이 되어 국제경기차 베이징에 갔다가 아버지 소식을 들었고 북한대사관에 가서 통화를 하고는 엉엉 울고 그대로 입북해서 만났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그뒤에 쉬쉬하고 구속은 안 되었지만 그는 공식적인 모든 직위에서 사라져버렸다고. 이건 아마도 북에서 낚시를 던진 것 같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뉴욕에서 그와 헤어지기 전에 말했다. 이제는 당신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그때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뻘이었고 훨씬 미숙했던 젊은이였다고.
그가 귀국하고 사나흘 뒤인가, 우리측 정보 영사의 전화가 왔다. 그는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힐난조로 말했다. "황선생, 그러다가 어떻게 귀국하려고 그럽니까, 왜 월북 권유를 하고 다니쇼?" 그 순간 씁쓸한 생각이 들면서 나는 그런 일도 없고 그럴 사람도 아니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동시에 이 모든 분단의 억압에서 놓여나고 문학에 대한 노심초사도 벗어버리고 익명의 망명자로 살아가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나는 미국 각계의 망명권유를 마다하고 무국적자로 체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내 이문열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하루속히 물귀신 같은 이념의 덫에서 벗어나 작가로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다."
황석영이 쓴 이문열에 대한 글이나 봐라
읽을 때마다 뭉클해진다
사실 여의도 파이터들도 의사당에서나 싸우지 뒤로는 서로 궁디팡팡하는데 국민만 속고있는것ㅋㅋ
이거 파딱 지원문이네요
ㅗ
그라고보니 얼마전 뽑힌 뉴파딱 안보이네ㅋㅋ
정떡 vs 콩송편 - dc App
슬프다
이문열을 은근히 낮춰보면서 황석영 본인은 이념의 덫에서 자유로운 줄 알고 있는게.. 솔직히 가소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