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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쩌면 어제 엄마가 죽었다는 첫 문장. 소설의 이름과 내용은 모르더라도 첫 문장만큼은 어디서 들어보았을지도 모를 책.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묘한 책이다. 어렵지 않지만 굉장히 어려운 책이다.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책의 줄거리나 문장은 그리 어렵지 않다. 쉽게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다. 어려운 건 도통 주인공의 행동이 이해되질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왜 이런 인물이 주인공인 책이, 이토록 고평가 받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긴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책 자체에 대해 내려치기 하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온갖 해석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특히나 주인공 뫼르소를 사이코패스니 소시오패스니 하는 해석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런 인물상에 대한 비판의 텍스트로 이방인을 해석한 것이다. 나 역시 이방인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저런 해석이 명백한 오독이란 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뫼르소에 대한 저런 해석이 틀렸다고 단언한 수 있는 것일까. 또 그와 동시에 이방인이 굉장히 어려운 텍스트인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이방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카뮈의 다른 저작인 '시지프 신화'를 반드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방인은 카뮈의 사상을 소설로써, 시지프 신화는 에세이로써 드러낸 글이다. 두 개의 저작은 비슷한 시기에 쓰여 발표되었다. 이는 카뮈가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다. 이방인이 비유라면, 시지프 신화는 묘사다. 이방인만 읽어서는 카뮈의 사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다. 적확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자막 없이 외국어 영화를 보고 내용을 이해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카뮈의 사상에 있어 핵심은 '부조리'다. 사실 부조리란 단어에 대해서도 오해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부조리의 뜻을 찾으면 다음과 같다.
명사
1. 이치에 맞지 아니하거나 도리에 어긋남. 또는 그런 일.
2. '부정행위'를 완곡하게 이르는 말.
3. 철학 인생에서 그 의의를 발견할 가망이 없음을 이르는 말. 인간과 세계, 인생의 의의와 현대 생활과의 불합리한 관계를 나타내는 실존주의적 용어로, 특히 프랑스의 작가 카뮈의 부조리 철학으로 널리 알려졌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부조리란 단어를 2번의 뜻으로 많이 사용하곤 한다. 병영 부조리, 부조리를 당했다 등이 그 용례다. 하지만 카뮈의 철학에서 '부조리'는 2번의 뜻과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의 3번 뜻은 어렵기만 하다. 부조리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미래를 그리며 산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진다. 그런데 계속해서 그 미래를 그리면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죽음이다. 죽음은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다. 결국 미래의 끝에는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그렇다면 미래를 그린다는 건 의미가 있는 행위일까? 그렇다면 사는 건 무슨 의미인가.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각자 생각하는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누구나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권선징악이 있다. 우리는 선이 상을 받고 악이 벌을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세계는 항상 그런 식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때론 악이 선을 이기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이성)과 세계 돌아가는 방식 사이에서 괴리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이 차이를 납득하기 어렵다. 불편함을 느낀다. 이 괴리감, 이성과 세계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발생한 긴장감이 바로 부조리의 일종이다.
다시 인생의 의의, 삶의 의미라는 측면으로 돌아가자. 정해진 삶의 의미란 것이 있을까.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인생의 의의가 있을까? 없다. 정답이 없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세계는 인간에게 의미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세계로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무의미를 견디지 못한다. 사는 게 의미가 없는 행위라면 도대체 나는 지금 왜 살고 있는 것인가.
무슨 뜻인지 모를 수 있다. 간혹가다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짓거리를 왜 하고 있는 거지? 이걸 해서 내가 얻는 게 뭐지?' 와 같은 감정, 질문들 말이다. 단순 반복적 행동일 수도 있고 직장 생활일 수도 있고 어떤 취미 생활일 수도 있다. 우린 이런 감정을 느낄 때,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거나 혹은 그 의미를 찾지 못했을 땐 그 행위 자체를 그만두기로 한다. 반복적 행위를 멈추거나, 취미를 그만두거나, 퇴사를 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개별적 상황들이다. 인간에게 있어 보편적 상황은 바로 삶 그 자체가 된다.
바로 앞서 우리는 어떤 행위의 무의미함을 느끼게 되고 이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행위를 그만둠을 알았다. 그렇다면 삶에 대해 우리가 무의미함을 극복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삶을 그만두는 것이다. 자살이다. 시지프 신화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삶에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무의미함을 못 견디기에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에 온갖 노력을 한다. 하지만 삶에 의미가 없다는 세계의 원리는 변하지 않기에 우리는 이 무의미함을 극복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살을 해야 하는가?
당연하겠지만 카뮈는 당연히 "아니다"라고 한다. 삶은 무의미하다는 세계의 원리, 삶에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인간의 이성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 충돌 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 '부조리'다. 세계와 이성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기에 부조리 또한 불가피하다. 카뮈에게 있어 부조리란 삶을 사는 데 있어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지구와 달 사이에 존재하는 중력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요한 것은 부조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를 대하는 태도와 관련된 것이다.
앞서 중력의 예시를 들었으니 다시 중력의 예시를 들어보고자 한다. 지구 있고 인간이 있으면 이 둘 사이엔 중력이 존재한다. 아무리 중력이 싫다고 해도 중력을 없앨 수는 없다. 중력을 없애고 싶으면 지구를 없애든가 인간을 없애든가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 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중력을 극복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인간은 계속해서 중력을 거스르기를 희망했다. 그 끝에 인간은 비행기를 만들었고 우주선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중력을 절대 극복하지 못한다. 설령 우주선을 통해 지구의 중력 범위를 완전히 벗어난다 하더라도 다른 천체의 중력과 마주한다. 중력은 우리 우주에 존재하는 법칙이다. 그렇다면 중력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부조리도 마찬가지다. 부조리를 없애고 싶다면 세계를 없애든가 나를 없애야 한다. 세계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나를 없애는 건 자살이다. 죽으면 부조리가 사라지겠지만 이미 죽었는데 부조리가 사라진 게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이는 부조리 해결이 아닌 부조리에서의 도피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부조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조리에 맞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력에 계속 맞서려 했듯, 부조리에도 계속 맞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카뮈는 무의미함을 맞서는 인간의 모습에서 인간의 숭고함과 위대함을 보았다.
시지프는 제우스로부터 끊임없이 돌을 산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돌을 아무리 산 위로 다시 굴려 올려도 돌은 반대편으로 다시 떨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지프는 다시 돌을 굴려 산 위로 올린다. 무의미한 행위를 계속함으로써 무의미함 자체에 반항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부조리와 무의미함에 반항의 태도를 지녀야 함을 의미한다. 중요한 건 부조리 그 자체가 아닌, 부조리에 대한 인간의 태도 문제다.
이 정도가 얼추 카뮈가 시지프 신화를 통해 얘기하고자 했던 내용이다. 카뮈가 부조리와 이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대해 소설로써 얘기하고자 한 것이 이방인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부조리 문학으로의 이방인을 이해하기 힘들더라도, 뫼르소가 사이코패스니 소시오패스니 하며 이런 인간상에 대한 비판이라는 식으로 이방인을 해석하는 것은 명백한 오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가 짝을 이뤄 발표된 것처럼 추후에 카뮈는 소설 페스트와 에세이 반항하는 인간을 짝을 이뤄 발표한다. 반항하는 인간에 기반해 페스트를 독해하면 카뮈가 의도한 바가 비교적 쉽게 읽힌다. 하지만 이방인은 다르다. 시지프 신화가 말하는 바를 이해했다 하더라도 이방인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나는 이방인을 부조리의 텍스트로 해석한다 할지라도 사람마다 해석의 의미와 방향이 상당히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이방인은 의미심장하고 모호하며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많다. 그렇기에 이방인이 굉장히 어려운 텍스트인 것이다.
이방인의 텍스트를 세세하게 분석하고 싶지만서도 그럴 용기와 능력, 깜냥이 내게는 없기에 대략적으로만 고민한 바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이방인의 텍스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마리와의 연애를 시작한다. 뫼르소는 태양이 눈부시다는 이유로 아랍인에게 총 다섯 발을 발사해 살해한다.
뫼르소는 재판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수 있음에 굳이 재판을 스스로 불리하게 만든다. 결국 엄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으로 인해 뫼르소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우린 이 행적에서 어떤 부조리와 태도를 볼 수 있는 것일까.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소설이 1인칭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뫼르소의 내면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 점에서 뫼르소의 사회성이 결여되었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뫼르소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일치한다. 뫼르소는 속이는 사람이 아니다. 설령 그 솔직함이 사회적 가치와 괴리가 있다 할지라도 뫼르소는 거짓을 말하지 않고 거짓을 행하지 않는다. 뫼르소의 이성과 그를 둘러싼 세계는 극한의 부조리를 보인다. 뫼르소의 이성을 통한 행동과 말들이 그를 죽음으로 밀어 넣는다. 따지고 보면 뫼르소뿐만 아니라 엄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단 이유로 그를 사형에 처한 작 중 세계관도 이상하지 않은가. 이 또한 부조리적 상황일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방인의 전부는 2부의 마지막 챕터를 위한 빌드업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회개의 기회를 주려는 신부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뫼르소. 작 중 내내, 세계에 대해 무감각함을 나타내는 뫼르소가 유일하게 감정적이 되는 순간이다. 왜 그토록 뫼르소는 신부의 가르침에 화를 낸 것일까. 왜 뫼르소는 그 이후 죽음을 인지하고서야 마음의 평안을 얻은 것일까. 왜 뫼르소는 자신의 처형 날 많은 사람들의 증오를 원한 것일까. 이것들이 모두 카뮈의 부조리 철학과 무슨 연관이 있나. 부조리적 인간인 뫼르소와 돌을 굴러 올리는 시지프와 무슨 관계인가.
카뮈와 뫼르소에게 있어 부조리한 상태는 외면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다. 하지만 부조리 자체를 부정하는 신부의 설교는 위선일 수밖에 없다. 부조리는 극복의 대상이어야지 부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한다. 죽음 앞에선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뫼르소는 그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부조리적 인간이다. 하지만 신부는 죽음을 바로 코앞에 둔 뫼르소에게 자꾸 어떠한 가치에 대해 설파하려 한다. 이것은 부조리에 대한 부정이며 외면적 태도이고 이는 위선이다.
뫼르소는 죽음을 인지하고서야 자신의 어머니가 죽음을 앞두고도 연인을 둔 이유를 생각해 본다. 뫼르소의 어머니 또한 무의미에 저항하고 반항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지라도, 모든 것이 무의미하더라도 지금의 사랑을 택한 것이다. 뫼르소는 죽음을 인지하고서야 생의 의지를 느낀다. 죽음은 모든 것의 무의미를 뜻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뫼르소는 그제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무의미 앞에서 마주한 살고 싶다는 의지, 그 의지 자체가 이미 부조리에 대한 반항이다. 뫼르소와 시지프는 모두 자신이 마주한 부조리에 대해 반항하는 인간이다. 인간의 가치와 숭고함은 더 큰 부조리와 맞설 때 거대해진다. 자신에게 솔직한 뫼르소와 이를 향한 더욱 큰 증오는 부조리의 극대화된 형태다. 증오가 클수록 부조리는 커지고 이에 저항하고 반항하는 뫼르소 자신의 모습은 더욱 위대해진다. 어쩌면 뫼르소는 자신의 반항이 더욱 위대해지기를 원했기에 증오를 원했으리라.
이방인은 위대한 시지프가 되고자 한 인간의 이야기다.
따지고 보면 내가 이런 리뷰글을 쓰는 것 또한 부조리를 마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이방인은 세계적 고전의 반열에 들어선 작품이다. 이를 쓴 카뮈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다. 수많은 사람들, 비단 한국인 뿐만 아니라 세계의 지성들이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해설과 리뷰를 남겼다. 당장 사르트르부터 그 시작을 알리고 있지 않은가. 지금도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의 뛰어난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극소수의 사람만 보게 될 리뷰, 심지어 이 글조차 카뮈의 철학에 대한 오독에서 자유롭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카뮈의 부조리 철학에 감명받은 사람이라면 이 글을 써야 할 의무가 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난 이 리뷰를 쓴다.
시지프 신화를 읽다보면 카뮈의 단호함과 정교함 그 문단과 문단사이의 연관성에 진짜 놀랐음 감상평 잘쓰시네용
감사합니다!
이방인 부분만 빼면 내가 썼던 글이랑 거의 비슷하네ㄷㄷ - dc App
이방인 리뷰는 뭘 보든 다 똑같은 말들밖에 없는게 신기하네
시지프 신화 때문에 그런듯
정말 인상깊은 글이였습니다. 수려하네요
덕에 감상평 쓰는 법과 책을 읽을 때에 어찌 읽어야할까에 많이 도움 됏다
엄청나다
필력 개쩐다.... 이방인 앞쪽만 읽고 재미 없어서 포기했는데 다시 읽고 싶어짐 ㄷㄷ... 리뷰의 힘이란... 무의미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고 갑니다 선생님
ㅈㄴ잘읽음 ㄱㅅ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