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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칫국만 또 마셔보기」
1968년에던가에는 나는 너무나도 돈에 궁하여, 이백만원의 상금 하나만을 노리고 내 시집 『동천』을 걸어, ×××문화상을 지망해서 도장 찍고 서명하여 지원서까지도 냈었지. 이런 지원서 내는 상에까지 참가하기는 이것이 난생 처음이었지.
'떡 줄 양반은 꼼짝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미리 마시기'란 쌍말 그대로 지원서 제출 이후 몇달인가를 군침만 삼키면서 목당그레질만 하고 지내자니, 자연히 아래와 같은 시 귀절 같은 것도 떠오르기도 했었지-- '보름을 굶은 아이가/ 산 하나로 낯을 가리고 웃으면/ 또 보름을 더 굶은 아이는/ 산 두개로 낯을 가리고 웃고……' 어쩌고 말씀야.
그러신데, 그것도 내게는 운이 안 닿아, 박목월 군에게로 넘어가 버리고, 그렇지, 나는 결국 고 '김칫국만 또 마셔 보기'의 고 김칫국맛이나 또한번 자알 실감하게만 되었지.
- 『안 잊히는 일들』(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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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외적인 이야기긴 하지만 위의 시에서 언급되고 있는 상은 서울시문화상이다. 당시 『동천』을 누르고 수상작이 된 박목월의 『경상도의 가랑잎』 역시 시인의 후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동갑내기 두 시인이 하필 같은 해에 대표작을 내는 바람에 서정주로서는 낭패를 본 셈이다. 상금을 노리고 문화상에 지원했다는 것이나 결국 수상을 놓치고 김칫국이나 마시게 되었다는 시의 내용은 서정주 후기 시 특유의 허심탄회한 자기 토로가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이 시의 수수께끼는 그가 수상을 기다리는 와중에 '보름을 굶은 아이'를 노래한 시인 「춘궁」을 썼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보릿고개」 같은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서정주가 굶주림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가령 『천지유정』에서도 일제 말기인 1945년 초의 몇 달 동안을 한국 사람들의 단식 체험기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보름에 보름을 더해 굶어도 웃을 줄 아는 「춘궁」의 내용은 고통스러운 분위기의 「보릿고개」와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사실 서정주의 단식 체험이 가난에 의한 강제적인 것 외에 자발적인 방식으로도 있었기 때문이다. 50년대 초반에 그는 정신 수양을 목적으로 며칠간 단식을 시도했는데, 이때의 단식은 최근에 야당 대표가 했던 것처럼 물 같은 건 먹어 가면서 몇십 일씩 해도 별 문제가 없는 그런 단식이었으며, 끝내고 나면 자연을 비롯하여 자기 주변의 풍경이 훨씬 맑게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상금에 굶주려하면서 그는 그때에 얻을 수 있었던 굶주림의 지혜를 되새기며 자신의 허기를 긍정적인 것으로 자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백만 원이라는 금액은 굶주림이라는 표현을 붙이기엔 너무나 우스운 허기이다. 상금을 놓친 그는 자신이 상금을 받을 만한 위치에 올라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자각하며, 자신의 노래가 사실상 가난한 자의 노래가 되지 않음을 느끼고 웃었을 것이다.
그냥 일 해서 돈 벌면 안 되나? 가난 호소하는 시인들 볼 때마다 의문이야.... 사람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서두
문단 원탑이라는 사람이 자기 궁하다고 하는건 좀 그렇긴 한듯ㅋㅋ 저때는 나름 대학교수도 하고 있었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요... 예외도 있지만 보통 한국 문인들은 고학력 엘리트들 아닌가?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이 시절 시인들이 상대적으로 생활력이 떨어지는 면은 있는 것 같음.. 거의 유일한 예외가 김광균인데 이 아재도 해방 직후에는 <노신> 같은 가난타령 시 쓰다가 30대에 시원하게 문학 때려치고 무역업에 투신해서 말년까지 떵떵거리며 살았음
시인하지 말고 무역 합시다!
이 재능 가지고 커리어 날려먹는것도 또 다른 재능이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