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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철학 공부를 하다 보면 철학 역사를 통틀어서 어렵기로 악명 높은 학자, 책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라든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 구조주의 학자들의 서적들은 아주 악명이 높기로 유명한데 그런 악명 높은 책들 중 하나가 바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다. 나도 하이데거의 자자한 명성 덕분에 하이데거를 고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이번에 하이데거의 2차 서적을 읽으면서 오히려 굉장히 단순하게 정리될 수 있는 학자가 하이데거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정리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다.
“하이데거: 현대인, 너 T발 C야?”
20세기 철학의 대가를 21세기의 인터넷 밈과 그것도 아주 저급하게 보이는 말까지 써가며 정리한 것이 참으로 죄송할 따름이지만 내 나름대로 하이데거를 정리하다 보니 든 생각은 바로 저 문장이었다.
사실 하이데거는 수능 사회탐구 과목에서 생활과 윤리를 선택했다면 모두가 기계적으로 외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 고향상실 하이데거, 고향 상실..벤야민 아우라, 벤야민 아우라”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 하이데거는 바로 우리가 고향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지적한다. 기댈 곳 하나 없이, 언제나 마음의 공허를 느낀 채. 근본적으로 세워진 토대 없이 살아간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모른다.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하이데거에겐 그것이 정말 문제인 것이다. 문제인 것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내 생각엔 이제 그 수준을 넘어섰다. 그 공허감을 문제라고 지적하면 배부른 소리 하는 미친놈이 된다. 문제를 문제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 공허 위에서 우리의 존재를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려(sorge)의 방식으로 존재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우려는 ‘불안’과 ‘걱정’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렇게 되면 우린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는 존재가 그동안 믿고 살아왔던 모든 것들이 무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이 죽음이다. 그 당시에는 절망하고 무섭겠지만 죽음을 한 번 선구하면 죽음을 추후 일어날 재앙이나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와 항상 맞닿아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동시에 우리의 삶은 항상 깨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이후 우리는 비본래적인 삶에서 벗어나 본래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입장이다. 여기까지가 잘 알려진 하이데거의 사상이고 내가 집중한 하이데거는 이후부터 서술할 예정이다.
군 시절 물리학자가 꿈이던 후임에게 죽음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 친구의 성향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대답은 예상했던 대로 세포가 활동을 중지하고 분자가 분해되고 원자 단위로... 뭐 이런 내용이었다. 이 태도를 좀만 더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하이데거가 지적한 현대인의 태도를 알 수 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현대인은 지금 너무 오만하다는 것이다. 데카르트 이후 현대 과학이 발전하면서 모든 것을 오로지 계산 가능하고 에너지로 환원 가능한 부품으로 보면서 그것을 지배할 생각만 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런 과학적 입장만이 세계를 올바르게 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 후임에게 죽음 대신 음악을 물어보았다면 진동들의 조합 혹은 진동이 공기를 타고 달팽이관을 자극하고 이런 종류의 대답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으니 그 대답이 실제로 나왔는가는 중요치 않다.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대답들을 문제없이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죽음이나 음악 말고도 ‘삶’으로 범위를 넓혀도 똑같다. ‘이기적 유전자’가 너무나 큰 성공을 이룬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삶의 의미 같은 것들을 물어보았을 때 사실 도덕이나 어떤 규칙, 규범들은 중요치 않고 인간은 그저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선택들을 할 뿐이며 그것이 삶의 목적 혹은 본질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나는 적지 않게 보았다. 이렇듯 현대 인류는 모든 것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고 싶어하고 죽음과 삶마저 지배하려 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이런 무미건조함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뿐만이 아니라 그런 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문과라 과학을 몰라서 그런다”, “요즘 시대에 인문학, 철학 해서 뭐할 건데? 그게 돈 벌어줌? 철학 알빠노?” 같은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 점잖은 척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에겐 동물과 달리 이성이 주어져 있고 그 이성을 활용하는 올바른 방법은 과학이다 같은 부류의 대답을 늘어놓으며 자신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리고 무지한 문과들이 과학을 몰라서 무식하다는 몰상식한 발언까지 서슴없이 한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가던 들길을 잠깐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라고 한다. 이 말과 함께,
“현대인, 너희 T발 C야?”
죽음은 무가 무화되는 하나의 사건이며, 예술이란 작품 안에 진리가 자신을 정립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따르면 반 고흐가 그린 구두를 보면서 대지의 습기와 풍요로움, 거친 바람이 부는 가운데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있는 것을 인식할 때 존재자들을 비로소 근원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학생 때 쓰던 교과서를 방 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 책과 함께 지냈던 세월을, 책상 위에 교과서를 펴놓고 공부하던 그 시간을 기억하며 과거로 회귀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것과는 사뭇 다르고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우린 그 순간 교과서의 소박함에서뿜어져 나오는 풍요로움으로 충만한 우리를 느낄 수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과학을 무시하고 자연으로 회귀하자는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으나 하이데거가 지적하는 것은 과학 그 자체가 아니다. 과학을 발전시키자는 말이 아니라, 과학이 엄청나게 발전하고 모두가 풍요로워 보이지만 모두가 공허함을 느끼는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떤 생각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과학을 대하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이렇듯 하이데거는 그의 악명에 걸맞지 않은 아주 소박한 주장을 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이 이제는 너무 흔하게 느껴지고 의미 없어 보일 수 있으나 나는 여전히 그가 유효하고 필요하다고 굳게 믿는다. 모든 사람들이 들길에 서서 우리를 열고 존재자들에게 다가갈 때 은닉해 있던 존재자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그 소박함 속에서 충만함을 느끼는 그 순간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쓰다보니 조금 공격적이고 강한 표현들이 몇 개 있는 것 같은데 공대분들이랑 싸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과학 발전 중요합니다. 우리나라가 과학 강대국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후임이랑도 사이 좋습니다, 그 후임 욕하는 거 아님. 똑똑한 친구입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ㅎㅎ 혹시 한병철 <피로사회> 읽어보셨나요? - dc App
아뇨 - dc App
2차 서적밖에 못 봤으면서 웬 기다란 소설을. 안 쓰면 니 애인 잡아간다고 누가 협박했어?
한자 유동은? 과학이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