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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사건
-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제1학년 때」
열 다섯 살에 아버지 소원대로 서울로 와서
계동(桂洞) 솔 수풀 밑 중앙학교(中央學校)에 들어갔는데,
'그 때 제일 재미난 일은 무엇이었나?'
일흔 세 살 먹은 지금 곰곰히 생각해 보니
별난 것은 없고
영어 선생이 턱이랄 게 거의 없어
무(無)턱이라고 학생들이 별명 붙여 웃었던 일,
이 무턱 선생의 가르치는 목소리는 늘
서러운 시골 아주머니의 서러운 불평 소리만 같아서
웃겼던 일,
휴식 시간에 뒤꼍 소나무 숲 속에 가서
단팥 고물을 넣은 빵을 사 먹던 일,
일어(日語)의 나까사와[中澤] 선생이 되풀이 되풀이하던
'조도오시[助動詞]…조도오시' 정도다.
그러던 중에 겨울이 되니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도는데
'광주에서 왜놈 중학생이
우리 여학생을 히야까시 했다더라.
그 여학생의 남동생이 보고 화가나서
대들어 싸웠는데
일본인 경관은 우리 학생만을 호되게
다루었다더라.
그래 드디어 우리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 사이에선
편싸움이 벌어졌는데
일본 학생들은 단도날을 붕대로 감고
그 끝만을 드러나게 해서
그걸로 우리 학생들을 드윽드윽 그었다더라.'
하는 것이어서
'야!' 하는 마음들이
치위 속에서 한바탕씩 일어나게는 됐네.
이러던 어느 날 아침 학교 교실에 들어가니까
'용감히 싸워라 학생대중아!' 하는
격문이 책상마다에서 나오고,
이윽고 상급생들이 와서
"책가방들 메고 운동장으로 모여라" 해
나도 구경삼아 운동장으로 나갔는데,
거기엔 이미 학생들이 그뜩 모이고
주모자는 단에 올라 주먹을 들고 외치고 있었네,
"식민지 노예 교육을 철폐하라!
일본 제국주의 타도!
조선 독립 만세!"
그래 나도 멋도 모르고 신바람이 나
만세만큼은 빠지지 않고 따라 부르고 있었지.
"가자!" 하고 주모자들이 앞장서 달려가서
우리들은 우우 몰리어
뒷산을 서쪽으로 빠져나가
조선총독부 바짝 옆까지 갔는데,
앗휴! 처음 보는 말탄 경찰들!
그들은 미국 서부 활극의 카우보이들처럼
삽시간에 우리를 양 떼같이 에워싸고
가죽 채찍을 휘두르며
우리들을 몰고 광화문통 네거리를 지나
종로 네거리 옆 종로 경찰서로 이끌고 갔네.
상급생들은 어떻게 다루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1학년짜리들 만큼은
그 종로 경찰서 바로 앞마당에
여러 줄로 줄을 맞춰 세워놓고,
웃통들을 벗기고,
여러 명의 정복 순사들이
가죽 말채찍들을 들고 나와
그걸로 사정없이 되게
우리들의 등때기를 몇 번씩 후려갈겨댔는데
글쎄?
그게 그 때 아프던 기억은 나지 않는군.
이런 날에 이렇게 얻어맞아 본 사람은
알겠지만서두
이건 맞고 있는 그 때에는 아픈줄은 모르는거야.
그런데 그게
그 날밤 하숙방 요 우에
자려고 누우니까
비로소 쓰리고 쑤시고 아려 오는데
야 이거야 정말 약이 오르더군.
'이놈의 새끼들 어디 두고 보자!'고
이빨을 악물고 속으로 외쳤지.
이건 1929년 겨울
내 나이 만 열 네 살 때의 일이었네.
나는 소학교 5~6학년을 한 해에 공부해 졸업해서
한 살 줄이는 덕을 보았었으니까.
- 『팔할이 바람』(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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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은 서정주의 소년기 기억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건의 하나이다. 위의 시에서 나타난 1929년에 이어 그는 1930년과 1931년에도 비슷한 사건에 가담해 결국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 권고자퇴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참여'에 대한 이 시절 서정주의 의욕은 이후 아버지의 돈을 훔쳐 달아나 단행한 방랑이나 빈민촌 생활로도 이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훗날 시인 자신이 이러한 일련의 행동에 대해 이성보다 감성에 의해 벌어진 치기 어린 행위에 가깝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의 시의 다음다음에 이어지는 「제2차년도의 광주학생사건」이라는 시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가만 있자, 일흔 세 살 먹은 지금 기억이거니와/ 이 때 나는 무얼 잘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따로 없이/ 그냥 그러기로 한 거니까 그러고 있었을 뿐이었네./ 저절로 솟아나는 눈물에 뒤범벅이 되어서 말일세.' 그러니까 뒷날의 서정주는 소년 시절 자신의 항일 운동이 정식적인 항일 의식의 소산이 아니었다고 평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노파심에라도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을 근래 활개를 치는 이른바 '종족주의'적 국민성의 논리와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성 아닌 감성의 소산이므로 정식적인 것으로 칠 수 없다는 이해는 그의 항일 태도만이 아니라, 잘 알려진 대로, 친일 태도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천지유정』은 그 대표적인 텍스트라 하겠지만, 그의 동생인 서정태 또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긴 것은 아울러 참조가 된다. '그러고, 마쓰이 히데오에 대한 시도 말이지. 그 시는 내가 군대 간 후에 쓴 시여. 지 동생 개죽음당허는 것 아닌가, 나헌테 괜찮을까 혀가지고 쓴 것이여. 그란디 내가 야그헌 것은 제3자 야그로 안 알어. 친형제가 말헌 걸로 알어.' 다시 말하건대 그는 친일도 항일도 온전한 내 이성의 소산인 행동으로 볼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그 진술이 가리키는 것은 이분법을 넘어서서 사회를 보는 시선이다. 감정에 휩쓸려 항일을 했고 감정에 휩쓸려 친일을 했다고 고백했으니, 서정주는 그러면 항일 '종족주의'와 친일 '종족주의'의 동시 소유자인가? 가소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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