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분량인, <애러비>를 읽어오신 분들을 댓글에 감상을 남기시고 자유롭게 토의를 하시면 되시겠습니다
내일은 <이블린>을 읽어오시면 되겠습니다
댓글 5
만일 사회에 속한 아이의 몸이 자신의 욕망을 가지고 모험을 떠난다면 그 결말은 어떻게 될까? 단편 <애러비>는 그 질문에 대해 한 가지 답변과도 같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음. 사실 어린 시절의 어떤 욕구 같은 건 되게 두루뭉실하고 막연하게나마 주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이루기가 더더욱 어렵다고 생각함. 어른이 되어서의 욕구가 제반 환경 및 능력 부족에서 온다면 어린 시절의 욕구는 그 애매함이 불가능의 원인이 아닐까(성인이 되어서의 멋진 사람이 되어야지랑 어린 시절의 멋진 사람이 되어야지는 좀 느낌이 다르지)? 거기다 성인이 되어서는 본인의 자율성과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야 일이 가능할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지만 어린 시절엔 거의 그런게 없다는 거.
배고픈독린이(jsong1999)2023-10-10 19:27
답글
그렇기에 우리의 주인공도 비슷한 일에 처하게 되었지. 순수한 동심의 사랑을 위해 무언가(뭔지는 모르겠지만!)를 사주려 하고, 애러비에 가기 위해 주변 어른들을 달달 볶고(혼자서 가기엔 너무도 먼 곳이니까), 어른들의 사정으로 다 늦어서야 출발하고(이때는 또 혼자서 갈 수 있는게 재밌지), 가서도 별 다른 소득도 못 보고(어른이었다면 지갑의 사정으로 해결이 됐겠지만 용돈 받는 어린이에겐….)…. 하지만 그렇기에 그만큼 우리는 이 주인공을 더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됨. 등교길에 마음에 둔 누나를 따라가며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고, 애러비에 가겠다는 다짐 하나만으로 생활이 흔들리고 정신 못 차리고, 사제가 죽어감으로서 독특한 분위기와 의미가 부여된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사랑을 연발한다던지 등등
배고픈독린이(jsong1999)2023-10-10 19:27
답글
반면, 어린이의 세계가 긍정적으로 다가오는만큼 어른들의 세계는 더 어둡고 불순해보이지. 주인공이 집중하지 못한다고 타박하는 선생님이라던가, 약속 했지만 아무튼 무슨 사정으로 술 마시고 늦게 돌아온 아저씨라던가. 여기서 백미는 애러비에서 아가씨와 수작질 중이던 청년들임. 분명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고 이를 표하고자 애러비에 있지만, 돌아갈 돈을 생각하면 작은 항아리도 사지 못하고 울상을 지은 채 서 있을 주인공과 실없는 말들을 주고 받으면 껄렁하게 한탕 해보려는 청년들은 같은 공간 안에서도 너무도 대비되는 모습이지(특히, 한 청년도 아니고 청년들인 것도 포인트).
배고픈독린이(jsong1999)2023-10-10 19:27
답글
애러비는 어떻게 보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주인공이 발돋움하고 바라본 어른의 세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음. 하지만 어린이의 몸으로 다가간 애러비는 불이 다 꺼지고 부스들도 정리 중인 처량한 모습이지. 그리고 결국 자신이 지금 가진 마음이란 세계에 있어서 스러져 갈 가벼운 의식에 불과하다는 걸 깨닳는 순간 남은 불 마저 덜컥 꺼지고 애러비라는 공간조차도 사라져버림.
배고픈독린이(jsong1999)2023-10-10 19:27
답글
앞의 두 단편과 다르게 <애러비>는 짧은 분량 내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고 자신의 경험을 떠올릴 수 있을 법한 얘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확실히 읽기 쉽고 받아들이기도 쉬울 거 같음. 또한, 앞의 단편들과 함께 어린아이의 의식이란 사회 내에서 어떻게 비치는지 다각도에서도 살펴볼 수 있을 거 같고. 초독의 <더블린 사람들>이 해설만 보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꼬집는 사회 소설이자 습작에 가까운 소설이라 여겨졌다면, 재독 중인 지금은 찰나에 마주칠 수 있는 또다른 형태의 의식소설이 아닐까 생각이 됨. 결국 여기서 <젊예초>가 나오고 <율리시스>가 나온다는 건 차이가 없지만…
만일 사회에 속한 아이의 몸이 자신의 욕망을 가지고 모험을 떠난다면 그 결말은 어떻게 될까? 단편 <애러비>는 그 질문에 대해 한 가지 답변과도 같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음. 사실 어린 시절의 어떤 욕구 같은 건 되게 두루뭉실하고 막연하게나마 주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이루기가 더더욱 어렵다고 생각함. 어른이 되어서의 욕구가 제반 환경 및 능력 부족에서 온다면 어린 시절의 욕구는 그 애매함이 불가능의 원인이 아닐까(성인이 되어서의 멋진 사람이 되어야지랑 어린 시절의 멋진 사람이 되어야지는 좀 느낌이 다르지)? 거기다 성인이 되어서는 본인의 자율성과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야 일이 가능할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지만 어린 시절엔 거의 그런게 없다는 거.
그렇기에 우리의 주인공도 비슷한 일에 처하게 되었지. 순수한 동심의 사랑을 위해 무언가(뭔지는 모르겠지만!)를 사주려 하고, 애러비에 가기 위해 주변 어른들을 달달 볶고(혼자서 가기엔 너무도 먼 곳이니까), 어른들의 사정으로 다 늦어서야 출발하고(이때는 또 혼자서 갈 수 있는게 재밌지), 가서도 별 다른 소득도 못 보고(어른이었다면 지갑의 사정으로 해결이 됐겠지만 용돈 받는 어린이에겐….)…. 하지만 그렇기에 그만큼 우리는 이 주인공을 더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됨. 등교길에 마음에 둔 누나를 따라가며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고, 애러비에 가겠다는 다짐 하나만으로 생활이 흔들리고 정신 못 차리고, 사제가 죽어감으로서 독특한 분위기와 의미가 부여된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사랑을 연발한다던지 등등
반면, 어린이의 세계가 긍정적으로 다가오는만큼 어른들의 세계는 더 어둡고 불순해보이지. 주인공이 집중하지 못한다고 타박하는 선생님이라던가, 약속 했지만 아무튼 무슨 사정으로 술 마시고 늦게 돌아온 아저씨라던가. 여기서 백미는 애러비에서 아가씨와 수작질 중이던 청년들임. 분명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고 이를 표하고자 애러비에 있지만, 돌아갈 돈을 생각하면 작은 항아리도 사지 못하고 울상을 지은 채 서 있을 주인공과 실없는 말들을 주고 받으면 껄렁하게 한탕 해보려는 청년들은 같은 공간 안에서도 너무도 대비되는 모습이지(특히, 한 청년도 아니고 청년들인 것도 포인트).
애러비는 어떻게 보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주인공이 발돋움하고 바라본 어른의 세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음. 하지만 어린이의 몸으로 다가간 애러비는 불이 다 꺼지고 부스들도 정리 중인 처량한 모습이지. 그리고 결국 자신이 지금 가진 마음이란 세계에 있어서 스러져 갈 가벼운 의식에 불과하다는 걸 깨닳는 순간 남은 불 마저 덜컥 꺼지고 애러비라는 공간조차도 사라져버림.
앞의 두 단편과 다르게 <애러비>는 짧은 분량 내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고 자신의 경험을 떠올릴 수 있을 법한 얘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확실히 읽기 쉽고 받아들이기도 쉬울 거 같음. 또한, 앞의 단편들과 함께 어린아이의 의식이란 사회 내에서 어떻게 비치는지 다각도에서도 살펴볼 수 있을 거 같고. 초독의 <더블린 사람들>이 해설만 보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꼬집는 사회 소설이자 습작에 가까운 소설이라 여겨졌다면, 재독 중인 지금은 찰나에 마주칠 수 있는 또다른 형태의 의식소설이 아닐까 생각이 됨. 결국 여기서 <젊예초>가 나오고 <율리시스>가 나온다는 건 차이가 없지만…